소설리스트

8화 (8/14)

38℃

“사장님한테 얘기 못 들었어요?”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유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하라고 했잖아요.”

늦게 온다고 욕을 먹으면 먹었지 왜 일찍 왔냐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 연호였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일종의 컴플레인이었다. …일찍 와서 죄송하다고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건가? 연호의 직업병이 발휘되었다.

“내 말 듣고 있어요?”

정작 딴짓은 유진이 하고 있었다. 유진이 연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엇을 하는가 보았더니 무릎까지 접어가며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떨어트린 줄도 몰랐던 연호의 오토바이 키였다. 언제나 올려다봐야 했던 유진의 가마가 내려다보였다. 유진은 뒤통수도 예쁘고 가마도 예뻤다. 당연한 일을 하듯 연호의 오토바이 키를 주워 주는 모습까지 안 예쁜 곳이 없었다.

역시 연호는 유진이 좋았다. 이 사람이 좋았다.

유진과 알고 지낸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유진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더 많았다. 이제야 보게 된 유진의 가마처럼, 아마 연호가 보지 못한 모습들이 훨씬 많을 테다.

더 여러 가지 모습들이 보고 싶었다. 연호가 빤히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은 오토바이 키를 쥔 채 의아한 얼굴로 연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유진을 보고 있으니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바람에 실려 온 유진의 냄새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유진의 존재가 좋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였다. 연호가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려는 듯 웅얼웅얼 변명을 했다.

“형 배고플까 봐 식기 전에 딱 맞춰 온 건데.”

“됐으니까 시키는 거나 잘해요.”

확실히 유진은 알면 알수록 연호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면이 많았다. 그래서 싫으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는 않았다. 좀 놀랍기는 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만 해도 벌써 몇 번째였다. 유진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게 될 때마다 연호가 더 기분이 나빴다. 마냥 착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성격이 있는 편이 훨씬 안심이 되었다.

“형이나 잘해요. 맨날 남한테 퍼 주기나 하고 사 주고도 욕이나 먹고…. 내가 걱정돼서 진짜….”

사람들이 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연호의 이야기를 듣고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네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고.”

그의 관심은 딱 하나였다. 유진은 줄곧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좋아요?”

“갑자기 뭔 소리예요.”

“여자랑 남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좋냐고.”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저거라니. 유진이 왜 이런 걸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앙금이 남아 있던 연호가 뚱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둘 다 좋으니까 바이라고 하죠. 나 바이라니까?”

“…좀 작게 말해요.”

“와, 먼저 얘기 꺼낸 게 누군데.”

그건 그랬다. 할 말이 없어진 유진이 말없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어딘가 신경질적인 몸짓이 한없이 새롭게 느껴졌다. 방금 전에 보았던 유진의 가마처럼, 연호가 모르는 유진의 새로운 모습 중 하나였다.

과연 유진은 어떤 사람일까. 연호가 보고 있는 이 모습이 유진의 전부는 아닐 테다. 어쩌면 유진은 연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고 보면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반대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형은 좀 볼수록 다른 것 같아요.”

그렇다면 더더욱 유진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엄청 어른스러운 줄 알았는데….”

연호의 말에 유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뒷말은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유진이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그런 보람도 없이 연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겁나 매력 있다고요.”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을 잃다 못해 어딘가 허탈하기까지 했다. 네가 뭘 안다고…. 유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비아냥거리는 미소에 연호가 좋다고 따라 웃는 게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속이 다 울렁거렸다.

처음 느끼는 감각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코피를 흘리던 연호의 맨 얼굴을 마주했을 때 이후로 줄곧 겪고 있는 증상이었다. 유진은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은 여전히 연호의 의중을 밝혀 내지 못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연호는 유진이 겪어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인지도 몰랐다. 익숙하지 않은 건,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건 다 싫었다. 무서웠다. 자신이 없었다. 달라진 연호를 보는 것만으로도 유진은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유진이 연호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그런 것 좀…. 하지 말아요.”

“그런 거가 뭔데요?”

“너 잘하는 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사람 착각하게 만드는….”

“전에도 그런 소리 하지 않았어요? 뭔지 모르겠으니까 좀 쉽게 말해 봐요. 나 공부 못한단 말이에요.”

유진은 이렇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연호가 신기했다. 사실 공부를 못한다는 건, 나아가 천재가 아니라는 건 유진에게나 치부이지 연호에게는 아니었다. 이처럼 연호에게는 유진을 괴롭히는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몰랐다.

“형? 어디 아파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유진의 안색을 살피려는 듯 연호가 다가오자 유진이 그만큼 물러났다. 유진은 아까부터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어디가 어지럽기라도 한 건지, 지금의 유진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유진이 형.”

연호가 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유진의 얼굴을 숨긴 손가락 사이로 연호의 모습이 보였다. 연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 유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더 이상 헬멧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 정도였다. 유진이 자꾸만 얼굴을 숨기는 통에 헬멧이 방해된 탓이었다.

그런데도 유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연호가 마스크를 턱 끝까지 끌어내리며 다시 한 번 유진과 시선을 맞췄다. 이제야 유진이 보였다. 연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형 괴롭히는 줄 알겠다.”

“…….”

“그럴 리가 없는데. 그죠.”

배달원인 연호가 유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 상황은 어떻게 봐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 학생들의 눈에 띄는 건 괜찮았다. 아버지와 유민을 알고 있는 교수들이 문제였다. 쓸데없는 얘기가 나오지 않으려면 1초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그게 잘 안 되었다.

저 눈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유진은 비로소 연호를 제대로 마주하고 있었다. 온전히 얼굴을 드러낸 연호는 헬멧이나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유진이 멍하게 연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요?”

연호가 무어라 떠들고 있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연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네가, 그런 식으로 굴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하는데. 라는 건 생각뿐, 유진이 더듬더듬 속마음을 토해 냈다.

“나를….”

거기까지 말한 유진이 잠시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연호는 여전히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유진이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

잖아….

떨리는 숨에 뒷말이 저절로 먹혀 들어갔지만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반복할 자신은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유진은 자신의 범주를 넘어섰다. 이제는 연호 차례였다.

정작 연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연호가 물었다.

“성적인 의미로요?”

“…뭐?”

“막 인간적으로 동경하는, 그런 게 아니라 사귀고 싶고 뽀뽀하고 싶은, 그런 의미로?”

유진이 대답을 망설였다. 연호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 자세 그대로 유진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유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연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착각하는 거 아닌데.”

연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한참이나 대답을 망설이던 유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 형 좋아하는 거 맞아요.”

“…….”

“근데 별로 신경 쓰지 마요. 그래서 내가 뭘 잘한다고요?”

다리가 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가 연신 발을 콩콩거리며 물었지만 이번에도 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호가 사장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뜰 때까지도 그랬다.

유진이 멀어지는 연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유진이 자리를 떠난 건 한참 후였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유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정작 연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연호는 그날 일을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유진이 물어서 그에 대한 대답을 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연호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유진에게 바라는 게 없어서였다. 오히려 지금이 딱 좋았다. 연호는 유진에게 고백할 생각도 없었고 이 사람과 꼭 사귀고 말겠다는 투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유진의 공이 컸다. 유진은 연호가 바이라는 걸 알고도 연호를 피하지 않았다. 연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봐도 고백일 수밖에 없는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연호를 경멸하지도 않았다. 연호로서는 최악의 선택지를 피해 간 셈이니 지금의 관계가 만족스러울 만도 했다.

뭐든 그렇다. 원래 지른 놈이 마음도 편안한 법이다. 언제나 그렇듯 편안하지 않은 건 유진이었다.

“어, 형!”

멀리서 보이는 유진의 모습에 연호가 무작정 큰 소리부터 내고 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잠깐이긴 했지만 연호가 오토바이 핸들을 놓칠 뻔했다. 유진이 연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시동이나 꺼요.”

“와, 타이밍 딱이네. 벌써 몇 번째지? 완전 신기하지 않아요?”

“시동부터 끄…. 강연호!”

그대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연호는 말 그대로 주차를 한 것뿐이었지만 평생 오토바이와 인연이 없었던 유진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위험해 보였다. 유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웃어 보였다.

“에이, 괜찮아요. 나 한 번도 사고 난 적 없어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더욱 신뢰도가 떨어졌다. 못 미더운 건 연호 하나로도 족하건만 하필이면 오토바이는 바퀴가 겨우 두 개뿐이었다.

이래서였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건 싫었다. 괜히 피곤하기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진은 또다시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헬멧을 쓰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건만 연호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연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어? 내가 들어도 되는데.”

유진은 말없이 연호의 짐을 챙겨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연호가 유진을 쫓아가며 양손을 펄럭거리자 유진이 턱짓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기다렸다는 듯 연호가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도 모두 연호가 눌렀다. 유진은 순순히 그런 연호의 뒤를 따라왔다. 모든 건 자연스러웠고 두 사람의 대화 역시 전보다 한결 편안해졌다.

“오늘도 담배 피우고 있었어요?”

“네.”

“신기하다. 어떻게 형은 냄새가 하나도 안 나지.”

학교에서 지정한 공식적인 흡연 구역은 경영관 앞으로, 오늘의 배달지인 신관 주변에는 그 어떤 흡연 구역도 없었다. 심지어 유진에게는 담배 냄새조차 나지 않았지만 연호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유진이 연호를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우연을 빌미 삼아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그저 좋았다.

이처럼 유진이 연호를 싫어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전보다 더 자주 만나고 있으니 연호의 소박한 기대치가 충족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미쳤나 진짜. 야, 또 왔어!”

그러나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우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손님의 선창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연호가 배달 일을 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오늘이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연호가 배달을 올 때마다 밖에 나와 있던 유진이 보이지 않았다는 정도였다.

“치킨 못 먹어서 환장한 귀신이 붙었나. 왜 맨날 여기서 시키는 거래?”

“그냥 카드를 우리한테 주면 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먹고 싶은 거 시키면 되잖아.”

“야, 다른 애들한테는 메뉴 마음대로 고르게 해 준대. 왜 우리한테만 저렇게 쪼잔하게 굴지? 누구 때문에 이 고생 중인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걸까. 연호는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졌지만 사실은 마냥 부러운 마음이 더 컸다. 이들은 무려 유진과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진이 배달을 시키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관계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라면 뭐든 다 고마워하고 항상 예뻐만 해 줄 텐데. 연호가 불퉁하게 말했다.

“계산이요.”

“좀 기다리세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요.”

“잠깐이면 돼요.”

오늘은 금액이 커서 그런지 유진 대신 계산을 자처하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오늘도 유진이 계산을 하겠지. 오늘은 또 누가 밥을 못 먹은 건지 궁금하다 못해 짜증이 났다. 유진이 배달을 시키는 이유는 늘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다. 정작 유진은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냥 다른 분이 계산하면 되잖아요.”

“아,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갑자기 불려 간 거라 우리도 이럴 줄 몰랐다고요.”

“그럼 전화해 봐요.”

유진이 온다는 건 이 꿀 같은 휴식이 끝난다는 이야기였다. 연호의 말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저희 이번만 계산 나중에 하면 안 돼요?”

“네. 안 돼요.”

“얘기 길어지는 거 보니까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그래요. 돈 달라고 방해하는 건 좀 아니잖아요. 우리 진짜 단골인데….”

남우 같은 놈이 또 있을 줄이야. 기분은 더러웠지만 전과 달리 쉽사리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계산을 빌미로 유진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손님 말대로 유진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사장님한테 물어보고요.”

연호는 고민 끝에 자신의 욕심을 포기했다.

“단골이라서 해 드리는 거예요. 두 번은 안 돼요.”

연호의 바람과 달리 사장은 이들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했다. VVIP의 위엄은 대단했다. 애초에 유진에게 계산을 떠넘기지 않으면 이럴 필요도 없을 테지만. 복도에서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연호가 매뉴얼을 읊어 주었다.

“매장으로 오늘까지 연락 주시고 저희 쪽에서 연락 가능한 휴대폰 번호도 알려 주세요.”

“…….”

“저기요.”

사장과 통화를 하느라 헬멧을 벗은 연호였다. 그것도 모자라 마스크까지 벗고 있었다. 바깥에 비하면 실내는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연호와 눈이 마주친 손님이 당황해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연신 연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호는 남우를 닮은 손님들을 욕하느라 바빴다.

“유진 선배 번호 알려 주면 되겠지?”

그 말에 연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줄곧 시큰둥하게 굴던 연호였기에 그 변화가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유진의 번호라니, 연호도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유진과의 새벽 통화 이후로 줄곧 유진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기회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런 걸 기회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이래서야 정말 뒷조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떠올랐다.

‘너 스토커야?’

‘남의 뒷조사는 왜 하고 다녀.’

그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연호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결국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연호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자신의 감정이었다. 다른 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실수인 것을 알면서도 이를 똑같이 되풀이하는 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었다. 연호가 다급하게 손님을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네?”

일단 부르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뭐가 됐든 유진의 번호만 아니면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은 연호 혼자서 제 발이 저린 건지도 몰랐다. 누가 뭐래도 연호는 유진에게 흑심이 가득했으니 유진의 번호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야 유진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연호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냥 누나 번호 알려 줘요.”

“네?”

“누나 번호 알려 달라고요.”

소란스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동시에 손님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와, 대박이다….”

“야, 뭐 하고 있어. 당장 알려 줘야지!”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야유를 보내던 사람들이 지금은 연호에게 열렬히 환호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이 찝찝했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근데 왜 얘보고 누나라고 한 거예요? 얘 이제 2학년이에요. 재수도 안 했는데.”

“대학생이면 다 누나잖아요.”

“…그럼 설마 고등학생이에요?”

“와, 너 진짜 능력 좋다. 어떻게 고등학생한테….”

“몇 학년? 어디 학교 다녀요?”

호기심과 호의로 얼룩진, 쓸데없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연호는 진상을 비롯한 강자에게는 강했지만 아무런 악의 없이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유진도 자신을 보면서 이런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어차피 연락은 매장 전화로 오지 않나? 그럼 굳이 형 번호를 안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

찬 바람을 맞다 보니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돌아가는 내내 후회가 물 밀 듯이 밀려 왔지만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기회는 물 건너갔고 후회해 봐도 이미 늦은 후였다.

정말 늦은 건 연호가 아니었다. 유진이 뒤늦게 회의실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연호는 없었고, 사람들은 아까부터 이상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유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 주제에 얼굴은 태연하기 짝이 없어서 아무도 유진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 없을 때 우리들 다 있는 데서 대놓고 번호 따 갔어. 요즘 고등학생들 패기 무섭더라. 근데 뭐, 그럴 만하더만. 어린 게 존나 잘하게 생겼더라. 미성년자로는 안 보이던데?’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증언은 모두 한결같았다. 외모 묘사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유진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아르바이트생은 주변에 사람들이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한 사람만 바라보며 번호를 알아 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유진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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