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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넘게 유진을 안 보고도 잘 살았는데 어쩌다 한 번 유진을 본 뒤로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아주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지금 연호의 마음이 딱 그랬다.
심란한 연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방에서는 쉴 새 없이 치킨을 튀겨 대고 있었다. 전에는 아르바이트가 하루의 낙이었다면 요즘 연호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비로소 내 오토바이를 갖게 된 연호였다. 혼자 이곳저곳을 쏘아 다니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오토바이는 좋았다. 빠르고, 정신없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진로에 대한 고민도, 엄마에 대한 걱정도 모든 걸 잊게 해 주었다.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양념 치킨 한 세트가 전부인 단출한 주문이 들어왔다. 나머지 주문은 죄다 사이드 메뉴의 향연이었다. 그걸 감안하고 시키는 거겠지만 연호가 더 돈이 아깝게 느껴졌다. 매장에서 직접 사 가면 배달비는 안 내도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연호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자세한 주소는 일단 도착하고 나서 확인할 생각이었다. 경영관으로 들어가면서 뒤늦게 상세 주소를 확인하자 어쩐지 숫자의 나열이 낯이 익었다.
“왔어요?”
전날 와 봤다고 호수가 낯이 익은 걸 보면 연호도 그렇게 머리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혹은 그 반대거나. 연호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나온 유진의 모습에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유진의 후배로 보이는 여자가 덩달아 연호를 마중 나왔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 오로지 유진을 향해 있었다. 유진은 이번에도 연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대신 들고 갔다. 애초에 별로 무겁지도 않은 봉투가 없어지자 연호의 양손이 가벼워졌다. 여자는 유진이 테이블로 걸어가는 뒤를 따라갔다. 연호는 차마 유진을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가 늦게 와서 못 먹은 건데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 주시고….”
“다 같이 먹을 간식 시키는 김에 시킨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먹어요.”
유진이 연호에게 다정했던 건 연호가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유진은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걸 몰랐던 게 아닌데 눈앞에서 그 사실을 확인당하자 자연스럽게 싫은 기분이 들었다. 카드를 건네주는 유진의 등 뒤로 갓 튀긴 치즈 스틱 냄새가 났다. 식사를 하지 못한 후배를 위해 끼워 넣은 사이드 메뉴였다.
“치즈 스틱보다는 감자튀김이 더 맛있어요.”
연호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었다. 이 정도는 평범한 직원과 손님이 나눌 만한 대화였다.
“다른 매장은 모르겠는데 우리는 그래요.”
“…….”
“우리 사장님이 감자튀김 진짜 잘하거든요.”
유진은 그저 듣기만 했다.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연호가 카드를 돌려준 후에도 유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제는 말 거는 것도 싫은 건가. 근데 어제는 형이 먼저 말 걸었는데. 내가 건 거 아니었는데. 연호는 소리 없이 투덜거리며 카드 단말기를 집어넣었다. 그러다 뒤늦게 고개를 들자,
유진이 빤히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뻣뻣하게 굳어 버린 연호가 유진의 시선을 견뎌 내듯 유진을 마주했다. 감정을 자각하고 나자 전에는 유진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진이 좋은데 유진이 무서웠다. 유진이 무서운 이유는 단 하나, 죄책감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닌데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상대방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연호가 유진과 같은 성별인데다, 일방적인 태도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안겨 준 전적 때문이었다.
19년 만에 찾아온 정체성 혼란이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움은 잠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에 대한 절망이 더 컸다. 연호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몇 시까지 해요?”
“뭐가요?”
“아르바이트. 시간 바뀌었다면서요.”
분명히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그렇긴 했지만 근무 시간을 물어볼 줄은 몰랐다. 설마 그 시간대를 피해서 주문하려는 건…. 연호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애매모호한 답변이었다.
“바쁠 땐 좀 더 있기도 하는데 늦게까지는 안 해요.”
“그게 몇 시인데요?”
“배달은 일곱 시부터 피크거든요. 대낮에는 완전 꿀이에요.”
“그러니까 몇 시까지 하는데요.”
의외로 유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을 피하는 연호에게 살짝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아씨, 어떡하지. 연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유진에게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지만 이런 기회마저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보는 것도 안 된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약간 서럽기까지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퇴원 이후 사장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거짓말처럼 좋은 핑계가 떠올랐다. 연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유진에게 들이밀었다. 유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형 이거 필요 없죠. 팬 미팅 응모권인데 주문하는 사람한테만 주거든요.”
“필요 없어요.”
“그럼 한남우 줘도 돼요?”
유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시선은 여전히 연호를 향해 있어서 침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유진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하나도 안 친한데요.”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연호가 즉답을 내놓았다.
“친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둘이 따로 만났다면서요.”
전에 연호도 유진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남우와 친한 유진이 의아해 연호가 일방적으로 추궁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유진의 의중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건 한남우가 마음대로 찾아온 거고 나 걔랑 하나도 안 친해요. 그딴 새…. 아니, 걔랑 진짜 그러기 싫은데.”
“그럼 굳이 챙겨 줄 필요 없겠네요.”
“…그러게요.”
설득 당한 연호가 순순히 수긍하자 유진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내가 갖다 줄게요.”
응모권을 가져가려는 유진 때문에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 고작 손이 닿은 것뿐인데 지레 놀란 연호가 과장스럽게 손을 빼내었다. 탁, 예기치 못한 효과음이 발생했다. 부딪친 부위가 얼얼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지만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연호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유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잘 보여도 모자란 판국에 이런 실수를 하다니,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빨리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유진은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 연호에게 뿌리쳐진 손이었다.
“이건 그냥 제가 줄게요.”
“…….”
“어차피 또 시킬 테니까 그때 주면….”
그 말에 유진이 고개를 들어 연호를 쳐다보았다.
“남우 형은 저녁에나 시킬 텐데 어떻게 주려고요?”
유진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연호가 당황해서 그렇지 사실은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하면 될 문제였지만 그 쉬운 대답이 잘 생각나질 않았다. 연호가 떠오르는 대로 대충 대답했다.
“그렇게 늦게 주문하는 건 아니니까 좀 기다렸다가 직접 줘도 되고 아니면 따로 만나서 주면 되죠 뭐.”
“…….”
“형은 신경 쓰지 마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우리…. 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요새 연락 엄청 와요. 응모권 물량 제대로 들어왔냐고 지가 더 난리, 난리…. 아씨, 이래서 번호 알려 주기 싫었는데….”
연호는 그 앞에서 아무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손이 부딪친 이후로 계속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보기보다 말을 안 듣네.”
…네? 연호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이 개의치 않고 손을 뻗었다. 연호가 놀라지 않도록 이번에는 좀 더 천천히 유진의 손이 다가왔다. 손이 닿은 건 찰나였지만 손가락의 감촉은 생생했다. 연호가 들고 있던 응모권이 유진에게 들려 있었다.
“이건 내가 전해 줄게요.”
“…….”
“그래서 아르바이트는 몇 시까지 해요?”
“여섯 시요.”
“여섯 시….”
“왜요?”
유진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연호는 유진이 근무 시간을 물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근무 시간이 바뀐 걸 몰랐던 유진이 몇 번이나 헛걸음을 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걸 연호가 알게 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
“…일단 알겠어요.”
이제는 휴대폰 번호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진이 연호의 말을 곱씹었다.
***
모든 건 유진의 오해에 불과했다. 새해부터 야반도주라도 한 줄 알았던 매장은 잠시 휴업 중이었고, 사장이 무사히 깁스를 푼 지금은 더 이상 매장은 닫혀 있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 연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전화를 받았다.
연호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게 아니라 근무 시간을 바꾼 것뿐이었다. 연호의 근무 시간은 평일 오후 여섯 시까지였다. 이 모든 걸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유진은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진은 언제든지 연호를 만날 수 있었다. 겨우 전화 한 통이면 되었다. 한 통의 전화만 있으면 연호는 언제나 유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연호가 배달원이고 유진이 손님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은 그동안 연호를 만나기 위해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당연한 일상이 한순간에 깨져 버렸다. 연호가 사라졌다.
유진은 연호에게 확인을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유진이 들었던 꿈같은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했다. 확인을 위해서는 연호를 만나야 했고, 연호를 만나면 또다시 그 눈을 마주해야 했다. 오직 유진만을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떠오를 때면 유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멀미를 했다. 어쩔 때는 연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울렁거렸다.
감정이 제대로 피어나기도 전에 상대의 부재부터 경험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유진이 겪은 일방적인 상실감은 본래의 목적을 퇴색시켰다. 처음에는 연호에게 사실 확인이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유진은 연호를 찾고 있었다. 왜인지는 유진도 몰랐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었다.
변화는 유진에게만 적용되지 않았다. 한 달여 만에 다시 만난 연호는 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 이제 연호는 자신의 감정을 유진에게 막무가내로 권하지 않게 되었다. 유진이 인사를 건네면 기쁘게 다가오다가도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의 대화가 줄어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연호의 몫이었다. 그 사실을 유진은 아주 늦게 깨달았다. 왜? 어째서? 혼란스러웠다.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유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연호는 오늘도 조용했다. 유진을 보고 소란을 피우지도, 친한 척을 해 오지도 않았다.
유진은 그런 연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왜 자꾸 쳐다봐요?”
결제 승인을 기다리던 연호가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그랬어요?”
“완전요. 형 요새 나 엄청 쳐다봐요.”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궁금한 것 같았다. 연호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유진의 얼굴을 대놓고 쳐다보는 건 연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유진과 연호의 차이점이 있다면 연호는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는 점 정도였다. 인정한다뿐일까,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묻는다 해도 연호는 그 이유를 대답할 수 있었다.
보고 싶으니까. 유진과 사귈 수는 없어도 보는 건 할 수 있었다. 유진이 연호에게 퇴근 시간을 물었을 때 연호는 유진이 자신의 근무 시간을 피해서 주문을 하려는 줄 알고 세상에서 가장 억울할 뻔했다. 다행히 유진은 그러지 않았고,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처음 유진을 만났을 때처럼, 그런 일상.
처음에나 좀 심란했지 연호는 금세 적응했다. 이제는 당연시된 실연에 속이 상하다가도 막상 유진을 보면 또 좋았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누군가와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연호는 좀처럼 유진과의 연애를 상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안 될 관계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덕분에 연호는 자신이 동성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길거리에서 남자들을 유심히 쳐다보게 된 정도였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유진 같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연호는 얼굴을 존나 보는 것 같았다. 연호는 청순한 스타일을 좋아했다.
유진은 이번에도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코는 괜찮은가 해서요.”
“…당연히 괜찮죠!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겨우 한 달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이었다. 연호는 누가 뭐래도 이 이상 그날 일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유진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그때도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던 연호였다. 만약 유진에게 또 다시 그런 말을 듣는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진 같은데.”
“여기 카드요.”
연호가 어색하게 대화를 피하려 들었다. 확실히 연호는 유진보다 서툴렀다. 그건 나이가 어려서일 수도 있었고, 단순히 두 사람의 성향이 달라서일 수도 있었다. 유진이 이를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크리스마스는 잘 보냈어요?”
“…네, 뭐….”
“그때 피 많이 났잖아요. 걱정했어요.”
연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가 그대로 가라앉았다. 전 같으면 마냥 기뻐하며 유진에게 다가갔을 테지만, 연호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유진에게 약간의 거리를 남겨 둔 채 연호가 투덜거렸다.
“…일찍도 말하네.”
구시렁거리는 꼴이 누가 봐도 진심임을 알게 해 주었다. 연호는 유진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솔직했으며, 또 단순했다. 유진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 유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연호가 한 번만에 화제 돌리기를 포기하고 냉큼 속마음을 드러냈다.
“아씨, 크리스마스 얘기 그만해요. 생각하기 싫어요.”
빳빳한 새 쇼핑백이 볼품없이 구겨지던 모습을, 유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연호는 끝내 선물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유진이 모른 척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렇게 묻는 유진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연호는 또다시 마음이 상했다. 연호에게는 상처로 남았던 그날 일이 유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연호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다녔다. 척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눈치였다. 여자 친구와의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망쳤거나, 아니면 싸웠거나. 유진은 진심으로 그랬기를 바랐다.
“얘기하기 싫어요.”
바람과 달리 유진이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등을 보인 건 연호였다.
“…맛있게 드세요.”
잔뜩 풀이 죽은 채 터벅터벅 걸어가는 연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유진이 보았던, 선물을 놓고 간 것도 모르고 코피를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그날과 같은 모습이었다.
유진이 연호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였다.
“잠깐, 만.”
왜인지는 유진도 몰랐다. 일단은 연호부터 붙잡고 봤다. 유진에게 붙들린 연호가 놀란 얼굴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유진이 황급히 연호의 팔을 놓아주었다. 연호의 시선은 여전히 유진에게 향해 있었다. 가만히 유진을 응시해 오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유진이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나 새터 가요.”
“…….”
“…….”
“…….”
유진은 연호가 배달을 오기 전까지 새터 관련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연호에게 못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확실한 건 상황과 대상 중 그 무엇도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걸 잊었는지 연호가 제 뺨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알아요.”
“…….”
“한남우가 얘기해 줬어요. 자기 보고 싶어도 참으라던데 미친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어.”
어색함은 어디 가고 연호가 금세 낄낄대며 웃었다. 연호가 남우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랬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날카로운 눈매가 잔뜩 휘어져 있었다.
저놈의 마스크만 없으면 표정이 제대로 보일 것 같은데 도통 볼 수가 없었다. 귀도 마찬가지였다. 헬멧을 벗어도 마스크가 남아 있었다. 피어싱은커녕 귓불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유진이 자연스럽게 연호를 쳐다보았다. 유진의 시선은 두 눈에서 콧대로,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윤곽에서 귓불로 이어졌다.
“또 보네.”
“…….”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닌데. 마스크 쓰고 있는데…. 엘리베이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연호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안 묻었어요.”
“근데 왜 자꾸 봐요?”
“보지 말까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연호가 누구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더….”
거기까지 말한 연호가 의식적으로 입을 닫았다. 유진이 감지한 연호의 변화 중 하나였다. 연호는 차분해졌고, 그 증거로 지금처럼 유진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지 않는 순간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말해요.”
“뭐가요?”
“말하려다가 말았잖아요. 마저 말해요.”
유진이 답지 않게 연호를 채근했다. 유진이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만 다가오던 연호가 갑자기 사라진 것도 모자라 안 하던 짓을 하니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띠링, 익숙한 알림 음에 연호가 본능적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오면 일단 타고 봤다.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연호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더 봐도 된다고요.”
“…….”
“맨날 봐도 되는데. 형 보고 싶은 만큼 봐요. 나야 좋지 뭐.”
역시나 연호가 하려던 말은 별 얘기가 아니었다. 그것도 안 듣느니 못한 시답잖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화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주 생소한 감각이었다. 유진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조심히 가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던 연호가 손을 흔들며 화답해 왔다.
엘리베이터가 닫힌 후에도 유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연호에게 끝내 대답해 주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니,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쳐다보는 이유야 뻔했다.
마스크 속이 궁금하니까. 유진이 다시 한 번 연호를 떠올렸다. 울렁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연호는 그날도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시간이 새벽 두 시였으니 못해도 최소 세 시는 됐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단잠을 방해 받아서 짜증이 난 것도 있었지만 귀찮음이 더 컸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올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엄마는 옆방에서 자고 있었고 이제 와서 아빠가 연호에게 연락을 할 일도 없었다.
휴대폰 진동이 끊이질 않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오기가 발동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전화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야! 야! 나! 가!」
미친놈인가? 연호가 감긴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막연히 생각했다.
「내가! 됐어! 으하, 으하하! 나 간다? 이거 꿈 아니지? 내가 됐다니까?」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발신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쉽사리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남우가 꽥꽥 소리를 질러 댔지만 연호는 이불 속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 야! 자냐? 벌써 자? 여보세요? 야, 강연호. 야! 야!
“…아, 존나 민폐 진짜.”
- 야, 나 당첨됐어. 내가 됐다고! 내가! 팬 미팅에! 아흐흑, 아! 아아!
남우는 자는 사람을 깨워 놓고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애초에 기대가 없어서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전화를 끊으려면 눈을 떠야 했는데 그러기도 귀찮았다.
꼴에 남들 눈을 중요시하는 남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일코 중이었다. 연호는 남우의 팬심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 연호의 의사는 없었다. 연호가 잠꼬대를 하듯 휴대폰에 대고 웅얼거렸다.
“내가 올해 가장 잘못한 일이 있다면….”
- 내가 응모권 다 분류해 놔서 아는데 어떤 걸로 당첨됐는지 알아?
“너한테 번호 알려 준 거다, 개새끼야….”
- 네가! 네가, 나 주려고 따로 챙겨 준! 천유진한테 버려질 뻔한! 아흐, 이, 예쁜 새끼! 내가 너 진짜 알아봤다! 이런 새끼일 줄 알았다고!
모든 게 소음이었지만 유진의 이름만큼은 생생하게 들렸다. 유진이, 우리 유진이 예쁘지…. 연호는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뒤이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며 의리를 지키겠다는 개소리가 이어졌지만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호가 번쩍 눈을 떴다. 가히 눈을 뜬 심 봉사에 버금가는 기적이었다. 심청이는 유진, 아니, 남우였다.
- 남우 형이 많이 취했나 봐요.
유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휴대폰이라 괜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연호가 휴대폰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 많이 놀라셨죠. 형이 갑자기 휴대폰을 넘겨줘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취할 수도 있지!”
야심한 새벽, 포근한 잠자리에서 듣는 유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라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한남우 이 예쁜 새끼! 연호는 누운 자세 그대로 뻥뻥 이불을 걷어찼다. 반대로 유진은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형? 유진이 형?”
유진이 조용해지자 주변의 소음이 연호의 새벽을 대신하려 들었다. 새터에 갔다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아직도 깨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수한 소음 속에서 유진이 말했다.
- 너였어?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연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나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아니요. 저 연호예요.”
사소하지만 확실한 변화였다.
“아, 형 내 이름 모르는구나. 내가 누구냐면요-.”
- 알아요. 연호, 강연호.
그 나긋한 목소리에 연호가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유진에게 이름이 불리는 날이 올 줄이야. 아니, 그것보다는 유진이 연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내가 형한테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있었나? 연호가 기억하기에 유진은 한 번도 연호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연호에게는 한남우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남우에게 조금 고마운 것 같기도 했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 자고 있었어요?
“전혀! 안 자고 있었어요. 하나도 안 졸려요!”
- 아직도? 뭐 하고 있었는데요?
뭐 하긴. 자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천성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데 어설픈 연호가 되도 않는 거짓말을 했다.
“노, 놀다가요. 지금 막 들어왔어요!”
비록 조금 더듬거리긴 했지만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유진은 꽤나 구체적인 질문을 해 왔다.
- 누구랑?
“어…. 친구랑요.”
- …미성년자가 이 시간에 갈 데가 있어요?
“그, 럼요. 뚫리는 데 완전 많아요. 룸 카페도 있고, 멀티방도 있고, 아, 노래방도….”
연호가 지금까지 놀다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사실이었다.
- 죄다 방이네.
“밖에 춥잖아요. 얼어 죽어요.”
- …그래요.
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 죽으면 안 되지….
어딘가 나사 빠진 대답이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유진이 새터에 가 있는 동안에는 꼼짝없이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여러모로 기분이 나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친구랑은 어디 갔었어요?
“어…. 그냥 놀았는데.”
- 요즘 고등학생들은 뭐 하고 노는데요?
“와, 방금 완전 아저씨 같았어요. 세대 차이!”
- 안 나진 않을 걸요.
“형 몇 살인데요?”
- 남우 형한테 못 들었어요?
“걘 자기 얘기밖에 안 해요.”
- 둘이 내 얘기 안 해요?
당연하지. 그랬다가 또 뒷조사 한다고 오해받으면 어떡하라고. 연호가 속으로만 대답했다. 속상한 마음을 숨기려는 듯 연호가 괜히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한남우 친구 없어서 걔 얘기 들어 주기도 벅차요. 하긴, 친구 있는 게 더 이상하겠다. 아, 그렇다고 형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 둘이 자주 만나나 보네요.
“아 씨, 은근슬쩍 같이 묶지 마요. 기분 나빠요.”
아무리 유진이어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연호는 이 말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유진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원래 화제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덕분에 연호는 처음으로 유진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무려 여섯 살 차이였다.
“설마 군대도 갔다 왔어요?”
- 갔다 왔죠.
“형이 군인 아저씨였다니….”
연호가 허망하게 중얼거리자 유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유진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연호에게는 유진의 소리가 전부였다.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밤이었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유진은 다른 때보다 다정했고, 그 다정함은 오롯이 연호를 향해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강요도, 감정도 없는 평범한 대화, 그 속에서 연호는 처음으로 유진의 온도를 실감했다. 유진은 연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느리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신중한 것 같기도 했다.
그 결과 연호는 유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유진은 어울리지 않게 특전사 출신이었다. 왜 그런 데에 갔냐고 묻자 아주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형이 다녀와서요.’
연호는 유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연호는 유진의 형이 궁금하지 않았다. 연호가 유진에게 얼른 화제를 돌리길 채근했다.
“그런 거 말고 형 얘기해 줘요.”
- 하고 있잖아요.
유진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유진은 다른 사람들과 형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상황에 매우 익숙했다.
“형네 형 얘기가 아니라 천유진 네 얘기요.”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길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건 한숨 같기도 했고, 탄식 같기도 했다.
하아….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나른한 숨결이 연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러니까 꼭 유진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연호는 괜스레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이러다가 오늘 꿈에도 유진이 나올 것 같았다. 연호는 종종 유진의 꿈을 꿨다. 연호가 유진을 좋아하는 데 있어 죄책감이 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 잘하네요. 또 속을 뻔했어.
“네? 뭐가요?”
- 너도….
거기까지 말한 유진이 그대로 말을 멈췄다.
“형?”
몇 번이나 유진을 불러도 소용없었다. 유진은 끝내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 여자 친구한테도 그래요?
“누구 여자 친구요? 아니, 그것보다 뭐가요?”
- 너 잘하는 거 있잖아요. 사람 착각하게 하는 거.
연호는 누구든 쉽게 친해지는 형처럼 멋대로 유진에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유진을 좇았다. 마치 유진이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굴었다. 결국 유진은 자신이 염려한 대로 착각에 빠지고 말았으나, 현실은 유진이 생각하던 그대로였다.
그저 유진이 착각한 거였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그랬다. 모두가 유진이 아니어도 되었다.
이 당연한 사실이 못 견디게 불쾌한 건 그럴 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어쩌면 유진이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는 그 한마디 때문에 수도 없이 빈 매장을 들락거린 것도, 연호가 아르바이트 시간을 바꾼 것도 모르고 몇 번이나 의미 없는 주문을 반복한 것도 전부 다 바보 같았다.
- …그러니까 남우 형이 그렇게 달라붙는 거예요.
“여기서 한남우 얘기가 왜 나….”
- 이제 남우 형으로 갈아탔어요? 형 얘기 좀 그만해요.
내가 뭘 또 잘못했나? 유진의 날 선 반응에 연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책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연호는 잘못한 게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연호가 또 다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갑자기 한남우 얘기 꺼낸 게 누군데. 형이 먼저 했잖아요.”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연호는 서러운 마음을 숨기기 위해 더욱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진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사람한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어디서 그런 새끼랑!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 …그게 문제가 아니지.
“또 뭐가요!”
- 남자에, 사귀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것부터가 잘못인 거야.
안 그래도 성 지향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연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혼란스럽게 하는 당사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유진의 말은 알아서 흘려 넘겼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잘못’인 거야. 한 단어가 유독 가슴에 박혔다. 그것이 꼭 연호에게 하는 말 같아서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억울하기도 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좋아할 수도 있지. 누가 사귀어 달래? 바라지도 않잖아. 이렇게 참고 있잖아. 연호가 반은 오기로, 반은 진심을 담아 외쳤다.
“남자가 남자랑 사귈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대수예요?”
- …뭐?
“게이는 뭐, 남자면 다 좋아하는 줄 알아요? 게이도 취향 있어요. 짐승도 아니고 친구랑 애인도 구분 못할까 봐?”
- …….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의처증 걸리고 그러는 거예요. 애인이 친구 만나는 것도 싫고 나랑만 있으면 좋겠….”
- 강연호.
…딸꾹,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연호가 놀랐는지 딸꾹질을 했다. 게임 효과음을 닮은 딸꾹질 소리가 웃길 만도 한데 유진은 웃음기 하나 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해 왔다.
- 너 바이야?
Bisexual, 한국말로 번역하면 양성애자.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연호가 잠시 고민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확신은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랑 사귀어 봤어야 알지! 그렇지만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연호는 일단 결론부터 내리고 봤다.
“마, 맞는데요!”
너…. 유진이 곧바로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지레 겁먹은 연호가 선수를 쳤다.
“나 여자, 남자 다 좋아해요. 완전 좋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게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근데 어쩌다 이런 얘기가 나온 거지? 갑자기 왜? 연호가 뒤늦게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사이, 유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 …가지가지 하네, 진짜….
“내가 뭐요!”
- 됐고, 올라가서 봐요.
…딸꾹, 처음 보는 유진의 모습에 연호가 다시 한 번 딸꾹질을 했지만 유진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새벽녘의 기괴한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
올라가서 보자.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말이었다. 유진은 새터에서 돌아오면 금방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처럼 굴었지만, 연호는 그날 이후 유진을 만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유진이 주문을 하지 않으면 연호는 유진을 만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딱 그 정도 관계였다.
그런데 싸웠다. 그걸 싸웠다고 표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틈만 나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연호는 유진이 왜 화를 냈는지 알지 못했다. 설마 이번에도 연호가 유진에게 일방적으로 다가가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잘만 떠들어 대던 유진이었다. 술이라도 마신 건지 말투가 평소보다 늘어지긴 했지만 어디에도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의아함만 더해졌다. 답답하기도 했다. 유진과 연호가 일반적인 관계였다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래서였다. 오랜만에 유진에게 주문이 들어오자 연호는 누구보다 빠르게 배달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 연호를 말린 건 사장이었다.
“그건 더 있다가 가야 돼. 다른 데부터 다녀와.”
“왜요? 얘가 더 먼저 주문했잖아요.”
“고객 요청. 한 시간 있다가 오라네.”
한 시간은 무슨. 가만 보면 유진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았다. 어딘지 모르게 복잡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뭐든 빠르고 명쾌한 연호가 보기에는 그랬다.
배달지가 같아서 오늘도 당연히 유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약속한 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연호가 허탈하게 음식을 내려놓았다.
역시 두 사람은 고작 배달원과 손님의 관계가 맞았다. 지난 크리스마스처럼 유진에게는 새벽의 전화 통화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랐다.
오늘 주문한 음식은 브라우니였다. 메인 메뉴가 아니라 사이드 메뉴를 시킨 걸 보면 다들 밥을 먹고 온 것 같았다. 오늘도 유진이 음식 값을 내줄 예정이었는지 계산을 앞두고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살 법도 한데 모두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다 못한 연호가 끼어들었다.
“다른 분이 대신 계산하시면 안 돼요?”
“아, 되긴 하는데….”
“일단 우리가 계산하고 돈 달라고 하자.”
“유진 선배한테 돈 받기는 좀 그렇지 않냐. 솔직히 맨날 사 주잖아.”
“맞아. 자기는 먹지도 않는데…. 아 씨, 야, 누가 낼래.”
“설마 오늘도 치킨은 아니지? 아, 지겹다 진짜.”
내 돈 내고 사 먹지 않아도 불만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투덜거림 속에서 유진 대신 계산을 할 사람이 정해졌다. 이런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남우보다는 나았다. 남우는 어떻게든 유진이 계산을 하도록 만들었을 테니까.
저 멀리 오토바이가 보였다. 더 이상 캠퍼스에 볼일이 없어진 연호가 오토바이 키를 꺼냈다. 강하게 손목이 붙들린 것도 그때였다.
“-강연호!”
오랜만에 조우한 유진은 뛰어왔는지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연호의 오토바이 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