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4)

19℃

이제 그만 추울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오긴 했는데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아, 그냥 오토바이 탈걸. 연호는 귀마개를 고쳐 쓰며 걸음을 빨리 했다.

- 도착했니?

“네. 두 시간으로 맞춰 놨어요.”

날씨가 또다시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연호는 사장 대신 보일러와 수도를 점검하기 위해 매장에 나와 있었다. 사장은 연초부터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었다.

“사장님 부러진 데는 좀 괜찮아요?”

- 거의 다 나았어. 조금 있으면 깁스 풀어도 된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무사히 치러 낸 건 좋았는데, 긴장이 풀린 탓인지 사장은 부주의하게 사고를 일으켰다. 발등 위에 떨어진 꽁꽁 언 치즈 덩어리들은 흉기나 다름없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뼈가 잘 붙지 않는다는 사장은 어느 때보다 울적해 보였다. 매장은 벌써 한 달 넘게 닫혀 있었다.

-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났니?

“그건 왜요?”

- 딱 봐도 방금 일어난 목소리니까 그렇지. 너 요새 밖에 나가기는 하니? 공장 알바는 더 안 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사장님 빨리 와요. 사장님이 튀겨 준 감자튀김 먹고 싶어요.”

사장이 입원한 동안 연호는 친구의 제안대로 공장 아르바이트를 하고 왔는데, 그곳은 바로 노동 착취의 현장이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숙식 제공에 높은 시급은 다 이유가 있었다. 연호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땐 사장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 그래, 그래. 얼른 나아서 후딱 튀겨 줄게.

사장의 대답에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텅 빈 매장에서 유일하게 느껴지는 살아 있는 소리였다. 한때는 매일같이 치킨과 감자를 튀기던 곳이었다. 사장은 곧 퇴원한다고 했지만 어쩐지 그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두 시간 동안 PC방에 다녀올까 싶었지만 밖이 너무 추워서 나가기가 싫었다. 연호는 매장에서 가장 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서 습관처럼 휴대폰 게임을 시작했다. 한창 게임을 하고 있는데 매장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사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단골손님들 다 떠났겠지?’

처연한 목소리가 저절로 재생되었다. 연호가 고민 끝에 전화를 받았다.

- 와, 씨, 받았다! 받았어!

첫 마디만 듣고 바로 알았다. 이래서 인간의 적응력이 무섭다는 거였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기요! 사장님!

남우의 무성한 외침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사장님 아닌데요.”

- 망한 줄 알았네! 내일부터 이벤트 있는 거 알아요? 준비는 다 해 놨어요?

“지금 사장님 안 계세요.”

- 오늘 미리 주문할게요. 일단 프라이드 하나….

“귀 먹었어요? 사장님 안 계시다고요.”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남우가 잠잠해졌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익숙한 건 남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 야, 어떻게 된 거야! 매장 망했어? 내일부터 이벤트 시작하는데 망한 거냐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아요? 한 살 더 먹지 않았어요?”

-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잘 살아 있었나 보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사장에 대한 애정이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남우의 개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대로 끊어 버릴까 싶어 연호가 속으로 마지막 10초를 세는데 남우가 다시 한 번 개소리를 했다.

- 야,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너를 왜요?”

- 형이라고 하랬지. 문이나 열어.

쾅, 쾅, 쾅. 거짓말처럼 매장 문이 흔들렸다. 마치 4DX 영화 같았다.

“이거 매장 전화 아니야? 너 안에 없어?”

남우가 매장 문 너머로 열심히 연호를 채근했다. 와, 존나 싫다…. 연호가 오랜만에 질색을 했다. 진심이었다.

***

“어우, 방학 내내 학교 오려니까 힘들어 죽겠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춥냐? 무슨 2월이 더 추운 것 같아.”

방학 중에도 매일같이 학교에 나오는 건 남우만이 아닌데도 유난이 따로 없었다. 한 시간이나 늦은 주제에 별로 미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필이면 나이가 제일 많아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저 개새끼. 회의실에 모여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어? 언제 왔냐? 오늘 못 온다며. 다 해결된 거야?”

뒤늦게 유진을 발견한 남우가 당황한 듯 과하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언제나처럼 유진이 상냥하게 말했다.

“그 얘기는 아까 다 했어요.”

“언제?”

“형 오기 전에요. 그럼 이어서 할까요.”

새 학기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선거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유진은 선거를 잘 치러야 했다. 형이 그랬으니, 유진도 그래야만 했다. 형은 총학생회장 출신이었다.

개강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남우는 아직 겉옷도 벗지 않은 채였지만 어차피 있으나 마나였다. 유진이 곧바로 회의를 재개하려 들었다.

“아, 맞다. 유진아.”

“할 말 있으면 회의 끝나고 해요.”

“아니, 그 정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긴 한데….”

“그럼 안 하면 되겠네요.”

방금 연호를 만나고 와서 그런지 남우는 연호와 유진의 공통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둘 다 존나게 싸가지가 없었다. 그놈에 그 빠돌이다웠다.

“다시 말해 봐요.”

유진이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고 똑바로 남우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가 소리 내서 말했어? 어, 어디까지 말했는데?”

“빠돌이.”

사람이 이래서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 순간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괜히 제 발 저린 남우가 알아서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내가 진짜 제 시간에 왔는데 오다가 누굴 만났거든. 하도 오랜만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어. 그, 기억하지? 치킨 집 알바, 걔 살아 있더라? 매장도 망한 거 아니래. 다음 주부터 다시 연다는데?”

“우리 자주 시켜 먹던 치킨 집 얘기하는 거 맞죠? 망한 줄 알았는데 반갑네요.”

“그 알바생도 계속 하려나? 남우 오빠랑 친한 애 있었잖아.”

“소스 잘 주는! 걔 웃기던데. 남우 오빠랑 케미가 완전. 근데 매장은 왜 닫았던 거래요? 사장이 바뀌었나?”

남우의 줄기찬 주문으로 연호네 피자와 치킨에 완전히 길들여진 404호 사람들이었다. 말은 안 해도 그동안 연호네 소식이 궁금했었는지 모두가 남우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실은 끝을 모르는 회의가 견디기 힘들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유진은 그런 남우를 말리지도, 채근하지도 않았다.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넌 뭐 하고 지냈냐고 했더니 무슨 공장에 가 있었다는 거야. 그 돈으로 오토바이 샀단다. 쪼끄만 게 발랑 까져 가지고….”

“…….”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더라. 그, 가죽 같은 거.”

“…….”

“귀에 피어싱도 있던데 공부 어지간히 안 했을 것 같….”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유진이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남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피어싱을 한 걸 어떻게 알았냐고? 고민해 봐도 대답은 간단했다. 봤으니까 알았다. 그 당연한 논리에 유진도 다른 의문을 제시하진 않았지만 특별히 수긍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남우의 수다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유진은 끝까지 남우를 말리지 않았다. 회의가 다시 시작된 건 한참 후였다.

***

사장이 퇴원했다. 연호도 배달 아르바이트를 재개했다. 평탄한 출발이었으나 모든 건 사장의 예상대로였다. 예고도 없이 한 달 넘게 닫혀 있던 매장을 다시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사장은 옛 선조들의 경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장의 퇴원 시기에 맞춰 프랜차이즈와 제휴를 맺은 아이돌 그룹의 팬 미팅 응모권 증정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다. 팬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일당백의 위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매장 유리창 전면에 붙은 브로마이드와 각종 포스터를 기점으로 매장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 갔다.

여기에는 남우의 공이 컸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진미도 매일 먹으면 질리기 마련인데 남우는 그런 융통성도 없이 꾸준히 주문을 이어 나갔다.

“어제 404호 또 시켰더라.”

“또요?”

남우는 정도를 몰랐다. 덕분에 연호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은 매일같이 404호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너 가고 좀 있다가 전화 왔었어. 지겹지도 않나 몰라. 어제는 6만 원 정도 나왔던데.”

6만 원은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일회성 주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이번에도 남우는 유진의 카드를 사용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아무리 팬 미팅에 가고 싶어도 그렇지 이건 아니었다.

“맨날 내던 사람만 내던데…. 아, 나도 돈지랄 하고 싶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순간 그렇게 물어볼 뻔했지만 묻지 않았다. 괜히 이런 걸 물었다가 아직도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연호가 의식적으로 질문을 삼켰다. 어느 순간부터 생겨난 새로운 습관 중 하나였다. 연호는 무의식중에 유진을 생각하지 않으려 들었다.

“퇴근하기 전에 한 군데만 더 들렀다 올래?”

“두 군데 가도 되는데.”

“여기만 끝나면 바로 집에 가. 개학 전에 밤낮 바뀐 거 고쳐야지.”

“개학이라…. 벌써 그립네. 힘내라, 고딩.”

“…자기도 작년까지 고등학생이었으면서.”

“난 이제 스무 살이거든.”

형의 킬킬대는 목소리와 사장의 걱정 어린 목소리까지, 연호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상 풍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어쩐지 신기했다.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고, 그 아무리 대단한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괜찮아지기 마련이다. 열여덟 살에 시작된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연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있었다. 사장의 갑작스러운 사고도, 공장 아르바이트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것도, 중고이긴 하지만 염원하던 오토바이를 산 것도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올해 연호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이번 배달지는 대학교로, 주문 내역은 겨우 치킨 한 박스와 콜라 한 통이 다였다. 이 정도야 껌이었다. 연호가 가볍게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치킨 왔습니다.”

연호의 기계적인 외침에 방 안에서 이런저런 기척이 났다. 연호는 심드렁하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다급하게 문이 열렸다. 배가 많이 고팠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연호는 기계적으로 직원용 멘트를 읊었다.

“안에 놔 드릴….”

“괜찮아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그대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연호와 달리,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연호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유진에게서 이전에 맡아 본 적 있는 유진의 냄새가 났다.

이런 걸 두고서 눈 뜨고 코 베인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유진이 연호 대신 치킨과 콜라를 받아 들었다. 순식간에 양손이 가벼워졌다. 연호가 사라진 무게감을 인지했을 때 유진은 이미 연호에게 등을 보인 후였다.

“진짜 치킨 시키셨어요? 저희 밥 먹고 와서 완전 배부른데….”

“남으면 버리면 되니까 그냥 간식 삼아서 먹어요.”

사람들과 평범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유진은 언제나처럼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따금 연호에게 보여 주던 곤란한 표정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만남 자체가 오랜만이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동시에 갑작스럽기도 했다. 본관 404호가 아닌 곳에서 유진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방학에도 학교에 나오는구나. 대학에 관한 것들과는 거리가 먼 연호에게는 이 상황이 더욱 놀랍게 느껴졌다.

“계산이요.”

유진이 다가와 카드를 내밀었다. 살아 움직이는 유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유진의 시선을 피했다.

“…안녕하세요.”

연호는 카드를 받아 들며 웅얼웅얼 인사를 건넸다. 이게 뭐라고 절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어렵게 건넨 인사에도 유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인사도 받아 주지 않는 건가 싶어서 절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5만 원 미만은 서명을 할 필요가 없어서 계산이 빨리 끝났다. 유진에게 카드를 돌려주려는데 유진이 카드를 받는 대신 질문을 던져 왔다.

“그만둔 거 아니었어요?”

…나한테 한 소리인가? 연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계속 연호를 보고 있던 유진이지만 그의 시선이 어딘가 살짝 비껴 나가 있었다. 연호의 눈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연호의 귓가를 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헬멧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남우는 헬멧도, 마스크도 쓰지 않은 연호의 맨얼굴을 마주했다는 말이었다. 연호를 바라보는 유진의 눈이 깊어졌다.

“제가 왜요?”

왜냐고 묻는다 한들 유진이 알 리가 없었다. 딱히 유진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연호가 알아서 추리를 시작했다.

“한남우가 또 헛소리했어요?”

당연하게도 짚이는 데가 있었다.

“우리 사장님 아직 안 망했어요. 아, 아니지. 안 망할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말을 뱉고 보니 어쩐지 사장에게 미안해졌다. 연호가 괜스레 남우를 욕하며 툴툴거리는데 유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진은 아까부터 계속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뭔가 묻었나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연호가 배달 중에 헬멧과 마스크를 벗는 일은 없었다.

“그럼 왜 안 왔어요?”

반면 유진은 오늘도 니트 차림이었다. 역시 잘 어울리고, 역시 예뻤다. 아니, 오랜만에 보니 더 예쁜 것 같았다. 연호가 고등학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하대하지 않는 저 습관적인 존댓말도, 부드러운 말투도, 다정한 목소리도 모두 좋았다. 멍하게 유진을 올려다보던 연호가 뒤늦게 유진의 질문을 기억해 냈다.

“아, 어제요? 나 오후 타임 뛰거든요. 오늘은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물어보길래 대답한 것뿐이었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어제요?’ 라니, 마치 뒷조사라도 한 것 같은 꼴이었다. 심지어 장소가 다른 데도 그랬다. 아직 상처로 남아 있는 그날 기억이 또 다시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네?”

“원래 안 그랬잖아요.”

다행히 유진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연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연호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설명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연호 자신이었다.

유진이 연호에게 무언가를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던가. 대답은 쉬웠다.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연호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물어봤으니 대답은 해 줘야 했다.

“봄 방학 동안만 바꾼 거라 개학하면 다시 밤에 할 거예요.”

봄 방학, 개학. 도대체 얼마 만에 듣는 단어인지 벌써부터 기억이 희미했다. 문제는 연호에게는 너무 당연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올 3월에 졸업이 아닌 개학을 앞두고 있다는 건….

“…지금 몇 살이에요?”

“열아홉 살이요.”

“그럼 작년에는….”

난데없이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역시 의아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연호는 이번에도 묻는 말에 착실하게 대답했다.

“열여덟 살이었는데요.”

유진은 연호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나이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연호가 어리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는데도 구체적인 숫자를 알고 나니 어쩐지 황당하기까지 했다. 연호는 유진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다. 빈말로도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 차였다.

이렇게 어린애한테…. 이 뒤로 어떤 말이 올지는 유진 본인도 알지 못했지만 놀라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연호가 심통 난 얼굴을 했다. …내가 열아홉 살인 게 그렇게 신기할 일인가. 세상에서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노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싫을 게 뻔했다. 이렇게 생기고 싶어서 생긴 게 아닌데 말이지. 연호는 조금 마음이 상했다.

“유진 오빠. 안 먹어요?”

연호와의 대화가 길어지자 안에서 유진을 찾으러 나왔다.

“먼저 먹고 있어요.”

유진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연호에게 곧잘 보여 주던 곤란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쩐지 확인 사살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연호가 푹 고개를 숙인 채 깊게 마스크를 올려 썼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는 인사를 했다. 연호가 유진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연호의 등 뒤로 유진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조심히 가요.’

유진은 여전히 다정했고 상냥했으며, 예뻤다.

강제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쉬게 된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연호는 살면서 자신이 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니까 연호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은 없지만 연호의 첫사랑은 여자였다. 첫사랑은 태권도장 누나로, 중학교 때에도 좋아하던 사람은 있었다. 선도부를 하던 여자 선배였다. 지금 다니는 학교는 남고여서 일상에서 여자를 접할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얻어 타기 위해 형들을 쫓아 나가면 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연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냥함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에 쉽사리 경계를 풀지 못했다.

연호는 천성적으로 분위기가 유한 사람을 좋아했다. 부드럽고 다정하며,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먼저 다가가서 안아 주고 싶어지는 사람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겨를도 없었다. 연호가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갔다.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한 몸짓이었다. 아까부터 머릿속에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남우와 유진의 목소리였다.

‘너 게이야?’

‘진짜 게이라도 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호가 유진을 좋아하는 건 맞았지만 그렇고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럼 왜 형을 생각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이 질문만큼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유진을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도 그랬다. 유진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건 연호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럼 왜 형을 만난 일이 이렇게 기쁜 거지? 나는 왜 형이 말을 걸어 준 게 기쁜 거지? 나는 왜 다음에도 형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나는 왜 앞으로도 쭉 형을 보고 싶은 거지? 나는 왜 형이 다른 사람한테 웃어 주는 게 싫은 거지?

계단을 내려오는 중간중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1층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후였다. 숨이 너무 차서 마스크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코끝까지 올려 쓴 마스크를 끌어내리자 겨울 특유의 찬 공기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바깥 온도와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숨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풍경 너머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하얀 입김이 거슬렸다. 이 역시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연호가 억지로 숨을 참아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잘 참아지지 않았다. 사람 마음도 그랬다. 그 계기가 얼마나 사소하든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게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억누르고 싶지도 않았다. 좋으면 좋은 대로 마음껏 좋아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짝사랑의 시작과 동시에 연호는 실연을 했다.

연호가 코를 훌쩍거렸다. 콧물이 나오지 않는데도 그랬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고, 또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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