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연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유진을 만난 뒤로 또 다시 며칠이 지났다. 연호는 여느 때처럼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네. 앞으로는 더 신경 쓰겠, 아.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라….”
유진을 못 만나는 것도 심란한데, 아까부터 끊임없이 사과를 하는 사장의 모습이 연호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듣다 못한 연호가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사장이 휴대폰에 무언가를 적어 연호에게 내밀었다.
본관 404호. 지난번에 양념 소스가 너무 많았대.
누가 봐도 남우의 짓이었다. 연호는 사장의 앞에서 조용히 전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사장이 마무리 멘트를 건네자 연호가 대뜸 수화기를 낚아채 갔다.
“치킨 안 지겨워요? 이제 이벤트도 끝났는데 그만 좀 시켜요.”
남우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서비스 정신도 부족하고 싸가지까지 없는 직원이 있긴 했다. 연호 목소리임을 알아들은 남우가 씩씩거렸다.
- 야. 돈 벌기 싫어? 집에 돈이 넘쳐나나 봐?
“오늘은 유진이 형 있어요?”
쉽사리 따라가지 못할 만큼 재빠른 화제 전환이었다. 한껏 비아냥대던 남우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대답을 버벅거렸다. 그조차 싫은 듯 연호가 짜증스럽게 남우를 채근했다.
“내 말 안 들려요? 귀 먹었어요?”
- 넌 어째 갈수록 싸가지가 없어지냐.
“있어요, 없어요. 그것만 말해요.”
- 없다, 왜.
“그럼 됐어요.”
연호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장이 옆에서 그런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손님인데 너무 버릇없어 보였으려나. 후회해 봐도 이미 늦은 후였다. 연호가 뒤늦게 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404호 손님이랑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다행히도 사장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 손님 얼굴 보고 얘기해 보면 좀 낫니? 애가 꼬장이 보통이 아니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지만 그동안 숱하게 남우의 주문 전화를 받아 온 사장이었다. 그도 어느 정도 남우의 성정을 파악한 상태였다.
“실제로 보면 더해요.”
“공부도 잘했을 텐데 어린애가 벌써부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잊고 있던 유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남우가 사람을 봐 가면서 행동한다는 이야기였다. 유진은 이를 두고 ‘만만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더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넌 왜 그렇게 유진이를 찾냐?”
“3만 7천원입니다. 유진이 형 카드나 내놔요.”
그 때문인지 오늘따라 퉁명스러운 연호였지만 이제는 남우도 자연스럽게 연호의 불친절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걸 친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확실히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발단은 연호가 건네준 브로마이드 여덟 장이었지만 일단 두 사람은 너무 자주 보고 있었다. 연호의 나이를 알게 된 후 남우의 태도가 수그러든 것도 한몫했다.
“수상한데.”
“사인할 필요 없는데. 5만 원 미만 무서명이에요.”
“나도 알거든. 너 게이야?”
일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연호는 대꾸 없이 남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우가 개의치 않고 술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니, 그렇잖아. 맨날 유진이 형, 유진이 형, 유진이 형…. 천유진한테 하는 만큼 나한테 반만 해 봐라.”
“형, 형 거리면 다 게이예요?”
“나야 모르지. 너 진짜 천유진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한테만 말해 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남우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말해 보라니까?”
남우가 끊임없이 연호를 떠보려 들었다. 연호가 심드렁한 얼굴로 남우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좋아하면 유진이 형한테 말해야지 내가 그걸 왜 너한테 말해요.”
“잠깐만. 너 왜 나한테는 형이라고 안 하냐. 내가 천유진보다 더 나이 많거든.”
“나이 많아서 좋겠네요.”
유치했다.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유진도 없겠다, 연호가 분노하는 남우를 버려 둔 채 나갈 채비를 하는데 남우가 흥미로운 화제를 던졌다.
“너희 모르지? 천유진 중학생 때 존나 예뻤다?”
“우와, 진짜요?”
“으, 난 징그러운데…. 그래 봤자 남자잖아.”
“야, 아니야. 천유진은 진짜 여자 같았어. 처음에는 유민이 형 여동생인 줄 알고 난리였다가 다들 얼마나 실망했는데.”
유민이 형? 유진을 연상시키는 이름에 연호가 나가다 말고 쫑긋 귀를 세웠다.
“너희도 알지? 그 왜, 교수님들이 맨날 얘기하는 천유진네 형. 유민이 형은 완전 남자답게 생겼거든. 아버지랑 판박이인데 천유진만 저런 거야.”
이를 알아차린 남우가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우리가 사립이라 천유진네 아버지부터 유민이 형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천유진이랑 완전 달라. 둘이 하나도 안 닮았어.”
이로써 연호는 유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진은 위로 형이 있는 것 같았다. 외동인 연호는 언제나 형제를 원해 왔다. 집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리는 생활은 더 이상 싫었다. 만약 연호에게 유진 같은 형이 있거나 유진 같은 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좋았다.
“너희 사람 아이큐가 2로 시작하는 거 봤냐? 유민이 형이 그렇거든. 그런데도 뻐기는 거 하나도 없고 존나 착해서 유민이 형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무슨 딴 세상 사람 같다….”
“진짜라니까? 운동도 잘해서 학교 대표, 서울시 대표로 메달 따오고 그랬어. 유민이 형, 몸도 존나 좋아. 다 근육이야. 나처럼.”
“사진 있어요?”
남우가 은근하게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어필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냥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와. 최연소 합격생이니 뭐니 하면서 기사도 났어. 볼래?”
처음에는 유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대화의 주인공은 유민으로 변해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유민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누가 들어도 충분히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모두가 음식을 먹으며 남우에게 귀를 기울였다. 유진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이 났다. 흥미를 잃어버린 연호는 곧장 404호를 나왔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404호를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유진을 보고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절로 악 소리가 나왔다. 유진이 연호의 입을 막지 않았다면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쉿.”
유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연호의 눈앞에서 천천히 깜박였다. 연호는 비로소 유진과의 거리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동시에 유진의 냄새가 났다.
쿵,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것도 모자라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유진의 손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연호가 유진의 손 아래서 버둥거렸다.
“조용히 해요.”
“…….”
“대답.”
연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인데 그조차도 시끄럽게 느껴졌다. 못미더웠다. 유진이 부러 간격을 두고 천천히 손을 치워 주었다. 유진이 비켜서자 연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코끝에서 유진의 냄새가 맴돌았다.
유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유진이 살면서 누군가의 얼굴을 만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마저도 마스크를 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타인의 얼굴을 만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던 코와 입술의 촉감이 생생했다. 유진이 말없이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토할 것 같아요.”
누군가 불시에 유진의 입을 틀어막는다면 당연히 불쾌했겠지만, 유진은 막상 그 원인이 자신이 되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웅크린 연호를 내려다보던 유진이 자세를 낮춰 연호를 살폈다. 이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토할래요?”
“그 정도는, 아닌데….”
“그럼 어떻게 해 줄까요.”
다정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목소리가 조금 더 듣고 싶은 마음에 연호가 대답을 얼버무렸다. 연호의 개수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들통이 났다. 연호는 유진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처음 보았다. 웃는 얼굴이 제일 예쁘긴 했지만 표정이 다양한 편이 훨씬 인간미가 있었다. 솔직하게 소감을 전하자 유진이 미묘한 얼굴로 연호를 쳐다보았다.
조심히 가요. 잠깐의 침묵 끝에 유진이 작별을 고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하라던 유진이 꽤나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 온 것이다. 목소리가 들렸는지 소란스럽던 404호가 조용해졌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유진이 요란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남우가 과장스럽게 유진을 맞이하는 게 보였다. 이내 연호의 시야에서 유진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지. 의아했지만 그렇게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냥 아쉬울 뿐이었다. 복도에서 유진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킁킁, 연호가 다시 한 번 유진의 냄새를 맡았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
“강연호 요즘 왜 저래?”
최근 연호는 한눈에 보기에도 들떠 있었다. 평소에는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요즘은 그러지도 않았다. 집이 멀어서 자주 어울리지 못하는 대신 친구들이 불러내기라도 하면 마다하지 않고 튀어나오던 연호였다. 이제는 같이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어도 연신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르바이트에 늦을까 봐, 그뿐이었다.
“존나 수상하지 않냐?”
“여자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대체 뭐냐고!”
정작 연호는 책상에 코를 박은 채 자고 있었다. 어차피 방학이 머지않은 시점이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대부분 형식적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서술형 채점을 놓고 몇몇 학생들의 끝없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연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뭐 하냐?”
“알바.”
“…저 새끼 진짜 왜 저래?”
모두가 질색하는 가운데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연호만 태연했다. 연호의 끝없는 아르바이트 타령에 친구 하나가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야, 너 돈 필요하면 나랑 방학 때 공장 알바나 하자.”
“공장?”
“나 아는 형이 일하는 곳인데 방학 때 단기 알바 찾는대. 숙식 제공에 시급 존나 세고 일도 하나도 안 어렵대. 그냥 들고 나르기만 하면 된다는데 콜?”
방학이라고 해서 할 일은 없었지만 연호는 이미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 고민이 되었던 건 오토바이를 살 돈이 모일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연호가 어렵게 마음을 다잡았다.
“알바 하는 거 있어서 안 돼.”
“너 배달 백 번 뛰어도 공장 알바 한 번 하는 돈 절대 못 벌어.”
“…그래도 안 돼.”
“왜?!”
친구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유진의 얼굴이 둥둥 떠올랐다.
그래. 그거였다. 유진을 볼 수 있으니까. 다정한 목소리, 상냥한 말투,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마음씨, 거기에 예쁘게 웃는 얼굴까지. 연호는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연호는 그 감각에 도취되어 있었다. 당장 내 마음이 설레고 매일매일이 즐거워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니, 생각나지도 않았다. 내가 지금 이렇게 좋으니까 상대방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일부러 모른 척한 건 아니었지만 나쁜 의도가 없었다 해도 이기적인 건 맞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상대방도 좋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부터 그랬다.
연호의 입장에서는 그저 순수하게 호의를 표현하는 것뿐이었으므로 상대방이 싫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받고 싶은 걸 해 주기 마련이니까.
- 그래. 있다, 있어! 내가 무슨 오작교냐? 그만 좀 물어봐!
이 또한 연호의 일방적인 감정의 연장선이었다. 또다시 시작된 유진 타령에 남우가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은 연호가 사장에게 달려갔다. 사장은 치킨을 튀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저 간식 지금 먹어도 돼요?”
“배달 가기 전에 먹으려고?”
“아니요. 포장할 때 같이 넣어 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니?”
사장이 진지하게 물었다. 연호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원대한 계획에 사장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네 간식은 네가 먹고 이건 그냥 단골 서비스라고 하고 가져가.”
“재료 남았어요?”
“그런 걸 왜 네가 걱정하니. 괜찮아.”
연호는 종종 지나치게 매장 걱정을 하곤 했다. 철이 들어서, 혹은 이 매장을 내 매장처럼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연호의 엄마는 식당을 했고, 연호는 어려서부터 주인 입장에서 손님들을 바라보며 커 왔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연호가 매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감자튀김이었다. 사장은 튀김에 소질이 있었다. 치킨도 잘 튀겼고 감자튀김은 더더욱 잘 튀겼다. 연호는 사장이 챙겨 준 사이드 메뉴와 함께 404호에 도착했다.
남우의 말대로 오늘은 유진이 있었다. 알고 오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잔뜩 들뜬 연호가 나서서 테이블 세팅을 도왔다. 가장 색이 노릇노릇한 감자튀김은 유진의 앞에 놓였다.
“조심해라.”
남우가 뜬금없이 유진에게 주의를 주었다. 연호에게도 들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눈으로 연호를 쫓고 있던 유진이 뒤늦게 남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거 언젠가 사고 칠 것 같아.”
“누구요?”
“네 빠돌이.”
그건 너고. 계산을 하던 연호가 사실을 폭로하려 했지만 그보다는 유진이 빨랐다. 사람들의 관심을 부르는 자극적인 단어에 유진이 깔끔하게 의혹을 일축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아버지와 유민 때문에 본의 아니게 유명해진 유진이었다. 유진에 대한 소문은 유진은 절대로 따라잡지 못할 아버지와 유민의 전설로 충분했다. 이 이상 괜한 이야기가 나도는 건 죽어도 싫었다. 유진이 애써 연호를 쫓던 시선을 갈무리했다.
먹을 생각이 없는지 유진은 아예 음식이 없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하필이면 연호가 감자튀김을 세팅해 놓은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연호가 노트북을 보고 있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형은 왜 안 먹어요?”
남우의 빠돌이 발언 탓인지 몇몇 사람들이 식사를 하다 말고 연호와 유진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주변을 의식한 유진이 단칼에 연호의 관심을 잘라 냈다.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확실한 의사 표현에도 연호는 비킬 생각을 안 했다. 유진이 개의치 않고 할 일을 하자 앞에서 얼쩡거리던 연호가 슬쩍 무언가를 들고 왔다.
“선물이에요.”
들뜬 목소리였다. 동시에 가까이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고개를 내리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감자튀김이 보였다. 유진이 연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주문한 적 없는 감자튀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자튀김은 시킨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선물이죠. 단골 서비스!”
유진이 연호를 쳐다보자 연호가 화답하듯 밝게 웃어 보였다.
“형 주려고 가져왔어요.”
연호가 유진과 눈을 맞추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런 연호와 바라보던 유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가, 다시 본래의 미소 띤 얼굴로 돌아왔다.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연호의 이런 면들이 유진으로 하여금 유민을 떠올리게 했다. 사랑받는 게 익숙하거나 사랑받는 게 당연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 하는 것 같았다.
형이 그랬다. 유진이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된 무렵, 형이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유진의 방을 찾았다.
‘맨날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 그러면 키 안 큰다니까.’
오랜만에 마주한 형에게는 진한 술 냄새가 났다. 제 멋대로 친근하게 안부 인사를 건넨 형이 유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선물.’
외형이 낯선 물건이었다. 언뜻 화장품 같아 보이기도 했다. 향수인가? 유진이 어색하게 형의 선물을 받아 들었다. 아무 날도 아닌데 향수 선물을 받다니,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일 들고 다녀.’
‘…학교에 향수 가져가면 안 되는데….’
‘뭐? 향수?’
돌연 형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형이 유진에게 물건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호신용 스프레이야. 이상한 사람 있으면 얼굴에 대고 뿌려.’
형의 선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족만이 해 줄 수 있는 스스럼없는 조언이 이어졌다. 형은 조언자였고, 유진은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도록 잘해.’
‘…….’
‘조심 좀 하고.’
힐끗, 형이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유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작 시선 하나에 유진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선물이라며 건네준 호신용 스프레이가 돌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대로 영영 깔려 죽을 것 같았다.
모두가 형을 좋아했다. 남자다우면서도 다정한, 진지하면서도 개구진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고 유진이 아는 한 형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진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남자는 다름 아닌 형이었다.
그러니 이건 유진이 이상한 거였다.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마음을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전부 다 유진이 못나서였다.
정작 유진은 아무것도 바란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처음부터 유진은 바란 적 없는 호의였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유진이 실수인 척 팔을 움직였다. 툭, 그 작은 움직임 하나에 감자튀김이 맥없이 떨어졌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괜찮으니까 그냥 가요.”
“…….”
“내가 치울게요.”
유진이 앉은 자세 그대로 발만 움직여 감자튀김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화를 낸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연호에게 오래도록 잔상에 남았다.
유진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연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감자튀김과 유진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유진이 연호를 알게 된 이후 가장 긴 침묵이 이어졌다. 가만히 유진을 보기만 하던 연호가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누구에게도 인사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 또한 연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혼자만의 인사를 마친 연호가 마지막까지 유진을 돌아보며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이 어쩐지 풀 죽은 강아지 같아서, 유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유진의 기분에 아랑곳없이 자신 있게 호신용 스프레이를 건네던 형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달랐다. 그것보다 훨씬 불편하고 무거운, 애처로운 느낌이었다.
유진은 계속해서 연호의 뒷모습을 곱씹었지만 연호는 이미 매장으로 돌아간 후였다.
“진짜 안 먹니?”
“네. 안 먹을래요.”
“재료 많이 남았는데….”
빈 테이블에 멍하게 앉아 있던 연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배불러요.”
네 입에 맛없는 게 뭐냐던 사장의 명언대로 뭐든 군말 없이 잘 먹는 연호였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매장으로 돌아온 연호는 끝내 간식을 먹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은 채 버려졌을 감자튀김이 자꾸만 생각났다.
연호가 생각하기에 연호는 유진에게 받은 게 많았다. 배려와 호의, 거기에 음료수까지 받았다. 유진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문제는 유진이 하나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싫어하는 티를 낸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싫어하진 않아요.’
햄버거와 치킨을 싫어하냐고 물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연호는 처음으로 유진의 온도를 실감했다. 유진은 연호처럼 쉽게 끓어오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호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건 얼마 뒤의 일이다.
***
마지막으로 본 유진의 모습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지만, 연호의 불편한 마음과 관계없이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어느새 방학식 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겨울 방학에 크리스마스가 껴 있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뭐가 됐든 좋았다. 학생 신분으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해방감이었다. 연호는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왔다.
PC방에 가기 전에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하는 만큼 모두가 정신없이 간식을 고르는데, 친구 하나가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평생 이것만 마셔야 하는데 100억. 할 사람?”
“제발 시켜 줘. 나 할래.”
“미친. 저걸 누가 돈 주고 사 먹어.”
“뭔데, 뭔데?”
핫도그를 들고 온 연호가 친구들에게 되돌아왔다. 진열대에 어디선가 많이 본 병 음료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에너지 드링크 사면 공짜로 준다는데?”
이벤트의 주인공은 에너지 드링크로 유명한 제조사에서 만든 신제품으로, 같은 제조사 음료를 사면 해당 병 음료를 무료로 증정하는 행사 중에 있었다.
“헐. 우엉이랑 연근? 야, 씨. 줘도 안 먹겠. 아! 뭐야!”
연호가 괜스레 친구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곧바로 응징이 돌아오긴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우엉차는 보기에만 고약해 보이지 막상 마셔 보면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연호가 구시렁대며 핫도그를 계산했다.
연호가 겨울 방학을 맞이한 것과 달리 대학교는 한창 시험 기간이었다. 현저히 줄어든 주문 수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사장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이런 데 일일이 일희일비 하다가는 제 명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는 이미 그래 보였다.
“안 되겠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시간이 많아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연호였다. 집에 일찍 가 봤자 할 것도 없었고, 내일부터는 학교에 갈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건 한층 가라앉은 분위기의 사장 때문이었다. 오늘도 404호에서는 아무런 주문도 들어오지 않은 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연호는 최대한 천천히 퇴근 준비를 했다. 당연하게도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오늘은 이대로 유진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쉬웠다.
엄마가 식당 문을 닫는 시간은 연호의 퇴근 전으로, 연호가 집에 돌아오면 이미 불이 꺼져 있곤 했다. 엄마는 집에 오면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렇게 잠만 잤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웬일로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연호가 요란하게 집 안에 들어섰다.
“엄마!”
“왔어? 늦었네.”
평소에는 이것보다 더 늦게 오는 연호였지만 엄마는 그런 것까지 알지 못했다. 엄마는 부엌에서 팔다 남은 밑반찬을 정리하고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 오늘은 좀 일찍 닫았어.”
“왜? 또 어디 아파?”
“내일 단체 손님 있어서. 저녁은 먹었어?”
“먹었지. 엄마는 먹었어? 내가 짜장 라면 해 줄까? 아니다, 먹고 바로 잘 거면 죽이 낫지?”
엄마와 함께 일상을 주고받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오갈 데 없이 속에서 곪아 있던 애정이 물밀 듯이 터져 나왔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었다.
연호의 발악은 엄마가 반찬통에 밑반찬을 모두 옮겨 담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엄마가 피곤한 한숨을 내쉴 때까지도 그랬다.
“엄마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에 연호가 뒤늦게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엄마는 연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너무 피곤한데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어? 어, 어.”
“시험은 잘 봤고?”
“그냥, 뭐….”
시험이 끝난 것도 모자라 오늘 부로 겨울 방학을 맞이한 연호였다. 난데없는 성적 이야기에 대답을 얼버무리자 엄마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몸에 밴 고기 냄새를 씻어 버리려는 듯 오래도록 욕실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씻고 나온 엄마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연호도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꿨다.
사방이 고요했다. 어두웠다. 견디다 못한 연호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엄마가 깰까 봐 소리 죽여 휴대폰 게임을 하는 밤, 온라인에서는 크리스마스 특집 이벤트 소식이 나돌았다. 어디서든 그랬다. 텔레비전에서도 그랬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세상에 크리스마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정작 연호는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기억이 없는데도 그랬다.
크리스마스라…. 연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부터라도 특별하게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깨달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월급을 받은 연호였다. 연호가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엄마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당연한 일상 속에서 연호도 나갈 채비를 했다. 백화점에 도착한 후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상품 종류에 조금 헤매긴 했지만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산 건 거의 없는데도 쇼핑백은 화려했고 동시에 가벼웠다. 쇼핑백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편의점 앞에 널브러진 인영이 보였다.
낮술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연호가 최대한 남자와 떨어져 걸으려는데 문득 스쳐 지나간 얼굴이 익숙해도 너무 익숙했다.
“…치킨?”
연호만 남우를 알아본 게 아니었다. 연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치킨만 파는 거 아닌데요.”
“와, 맞네. 감기라도 걸렸냐? 요즘 애들은 왜 그렇게 마스크를 쓰고 다니냐?”
백화점에 다녀오는 길이었지만 연호는 사복 차림에 검정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연호의 학교에서는, 적어도 연호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광경이었다. 고등학생들 대부분이 검정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이유는 연호도 몰랐다.
“눈이 보이니까 확실히 좀 어려 보이네. 앞으로 헬멧 벗고 다녀.”
“설마 헬멧을 평소에도 쓰고 다니겠어요.”
“…저건 사람이 기껏 충고를 해 줘도 난리야. 쇼핑 갔다 왔냐? 고딩은 좋겠네. 너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고생 시작이야.”
“…….”
“왜. 뭐.”
“진짜 말 한 번….”
거기까지 말한 연호가 대답 대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너랑 말해 뭐 하겠냐는 무언의 표시였다. 유치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씩씩대던 남우가 괜한 걸로 시비를 걸었다.
“웬 화장품. 네 거냐?”
“여기 브랜드 알아요?”
“야, 당연하지. 그 정도야 상식이거든.”
국민 핸드크림으로 유명한 브랜드였다. 모르긴 몰라도 남우가 알 정도면 정말 유명한 제품이 맞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연호가 선물의 정체를 밝혔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여자 친구 있었냐? 너 게이 아니었어?”
어느 순간부터 남우는 연호를 볼 때마다 게이 타령을 했다. 특별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이 뭐라 하든 내가 아니면 그만이니까. 그냥 다른 것보다 남우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게 제일 싫었다.
“내가 여자 친구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당연하지. 너 천유진 빠돌이잖아.”
“그쪽이 여자 친구 없는 건 하나도 안 이상한데.”
“아, 저게 진짜. 형이라고 하랬지.”
연호는 같잖은 시선으로 남우를 내려다보고선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한쪽 손에 끼워진 쇼핑백이 경쾌하게 덜렁거렸다. 그 모습이 어째 평소보다 더 얄미워 보였다.
게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남우가 의아해하는 사이 유진이 편의점에서 나왔다. 유진은 오늘도 에너지 드링크를 구입한 참이었다.
“이거 마실래요?”
유진이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며 남우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기 마련이다. 냉큼 공짜 음료를 받아 들던 남우가 돌연 진저리를 쳤다.
“와, 존나 맛없어 보여!”
우엉과 연근으로 만들어진 모 회사의 희대의 역작은 평가가 좋지만은 않았다. 남우가 마실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유진이 곧장 병 음료를 버렸다. 사람한테 버리나 쓰레기통에 버리나 나에게 필요 없는 걸 버린다는 점에서는 그게 그거였다.
“야, 나 방금 고딩 만났거든.”
“형 미성년자 만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치킨 집 고딩 있잖아. 네 빠돌이.”
아…. 유진이 미묘하게 반응했다.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였다.
“걔 여친 있더라.”
“…그래요?”
“여자 친구 크리스마스 선물 사서 가던데. 그래. 아직 좋을 때지. 스무 살만 넘어 봐라. 그보다 걔 공부 존나 못할 것 같지 않냐?”
여자 친구가 있다니, 고등학생이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못 견디게 거슬리는 건 왜일까. 유진은 자연스럽게 연호를 생각했다.
그동안 연호가 보여 준 모습들을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연호는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행동들을 일삼아 왔다. 남우가 연호만 보면 게이 타령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남우가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묻는 게 잘했다는 게 아니라, 연호가 너무 숨기지를 않았다. 연호는 온몸으로 유진을 좋아한다 말하고 있었다. 자기 스스로도 주체를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제 멋대로 다가와서 민폐란 민폐는 다 끼쳐 놓고, 뭐? 여자 친구?
‘좋아하면 유진이 형한테 말해야지 내가 그걸 왜 너한테 말해요.’
사람들 앞에서 진심인 것처럼 떠들어 대던 연호의 목소리가 예민하게 달궈진 머릿속을 헤집었다. 연호는 귀찮고 성가신 것도 모자라 한결같이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머리가 아팠다. 적어도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유진이 마저 에너지 드링크를 삼켰다.
이렇게 죽어라 노력해도 유진은 절대로 형처럼 될 수 없을 테다. 알고 있었다. 알지만 그만둘 수도 없었다. 유진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
누가 뭐래도 크리스마스는 치킨 집 대목 중 하나였다. 사장이 프랜차이즈 매장을 차리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그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곧 대학교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시험 기간을 맞이한 캠퍼스는 어딘가 차분했고, 고요했다. 매일 같이 깐족대던 남우마저 보이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몰랐다.
당연하게도 연호가 유진과 만날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진의 미묘한 태도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지만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연호는 새삼 유진과의 거리를 실감했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결전의 날을 앞두고 연호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했다. 처음 맞이하는 대목에 대비하기 위한 사장의 특별 조치였다. 며칠 전부터 예고되었던 사항인지라 연호는 일찌감치 퇴근 후 일정을 정해 놓은 참이었다.
크리스마스는 고깃집에는 대단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연말은 달랐다. 사람들은 고깃집에서 송년회나 망년회를 하곤 했다. 술은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었고, 그만큼 사건사고도 많았다. 여자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도 많았다. 또 참지 못하고 엄마를 괴롭히는 손님과 싸울까 봐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연호가 걸음을 재촉했다.
주차된 자동차 위로 연호의 모습이 비쳤다. 추운 날씨 탓에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면 코끝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배달할 때 쓰고 다니는 방한용 마스크만큼은 아니었지만 검정색 면 마스크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연호는 창문을 거울 삼아 마스크를 고쳐 쓰다가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패딩과 바람막이가 전부인 평소에 비하면 훨씬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한쪽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연호가 쇼핑백을 덜렁거리며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동네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지름길 중 하나로, 교수회관 옆에 난 샛길을 이용하면 굳이 정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다. 샛길이라고는 하나 그 주변 역시 대학가인 건 마찬가지여서 식당을 비롯한 여러 매장들이 있었다. 회식이라도 했는지 어느 식당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래.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고?”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안 되지. 네가 잘해야 내가 선배님 볼 면이 선다.”
“…네. 잘하겠습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호탕한 목소리였다. 연호가 힐끗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누가 봐도 대학 교수처럼 보였다.
“얼마 전에 선배님이랑 유민이랑 같이 인터뷰한 거 봤다. 부자가 아주 멋있던데?”
“네.”
“너도 얼른 따라가야지. 네가 네 형처럼만 되면 선배님도 아무 걱정 없으실 거다.”
“네.”
“사내놈이 뭐 이렇게 패기가 없어? 유민이 그놈은 넉살까지 좋아서 시끄러웠는데 볼수록 다르네. 둘이 형제 맞아?”
일방적인 웃음소리 사이로 간간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와 마주 보고 있는 남자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남자는 교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유진은 변함없이 예뻤지만 동시에 위태로워 보였다. 확실히 평소보다 창백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닌가. 원래 저랬나? 연호가 멈춰 선 채 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진과 눈이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잠시 연호를 바라보던 유진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금 교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유진이 연호를 무시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연호는 건물 5층에 있지 않았다. 상대방의 표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리에서, 창백하게 질려 있는 유진의 얼굴이 한눈에 보이는 거리에서 유진에게 무시당한 것이다.
지금까지 연호는 유진을 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했다. 정작 유진은 연호의 이름조차 물어본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문득 바닥을 나뒹굴던 감자튀김이 생각났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그때 생각이 났다.
연호가 멍하게 유진을 바라보았다. 남우가 연호를 지나쳐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렇게 서 있을 뻔했다.
“교수님! 담배 사 왔습니다!”
연호가 지금까지 남우를 만난 횟수는 열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랐는데, 이렇게 예의 바르고 공손한 남우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심지어 상냥하기까지 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아닙니다. 이런 건 당연히 저희가 해야죠.”
“참 싹싹한 친구야. 요즘은 뭐만 하면 갑질이니 뭐니 떠들어 대서 숨도 마음 놓고 못 쉬겠다니까. 어디 학생 무서워서 교수하겠어?”
하하하, 교수가 웃자 몇몇 사람들이 과장스럽게 따라 웃었다. 연호도 저 사람이 교수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교수라는 걸 알게 되자 저런 말을 지껄이는데도 괜히 똑똑해 보였다. 교수와 함께 있는 남우도, 유진도 아까보다 대단히 훌륭한 사람처럼 보였다. 치킨을 배달해 줄 때는 몰랐던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 야! 치킨!”
어느새 교수들은 자기들끼리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교수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학생들끼리 모여 있던 남우였다. 그래도 그렇지 남우가 아는 척을 해 올 줄은 몰랐다. 연호가 단번에 싫은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다? 너 설마 유진이 여기 있는 거 알고 쫓아온 거냐?”
“…….”
“스토킹 쩌네.”
개소리에는 무시가 답이었다. 연호가 대답하지 않자 남우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너 치킨 집 고딩 아니야?”
“말이 말 같아야 대꾸를 하지. 치워요.”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건 연호가 확실했다. 그간 경험으로 봤을 때 말로는 연호를 이기지 못할 게 뻔했다. 남우가 연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쇼핑백이 구겨질까 봐 힘껏 반항할 수도 없었다. 몸을 허투루 키운 건 아닌지 힘은 더럽게 셌다.
“오, 좀 차려 입었는데. 데이트 가냐?”
“아, 좀!”
“이 시간에 여자 친구나 만나러 가고…. 까져가지고. 너 공부 못하지.”
또 다시 남우의 깐족거림이 시작되었다. 연호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자 남우가 보란 듯이 유진을 불렀다.
“야, 유진아. 여기 네 빠돌이 왔다.”
빠돌이? 괴상한 호칭에 사람들의 시선이 연호에게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 교수들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유진의 아버지와 형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유진은 그들을 이어 주는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괜한 소란으로 눈에 띄었다가는 또 다시 징검다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의 영웅담을 들어야 할 게 뻔했다.
“사람들 많은 거 안 보여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진짜야. 이것 봐. 맞잖아, 네 빠돌이.”
유진은 연호를 무시한 적이 없었다. 그저 몰랐던 것뿐이었다. 헬멧을 쓰지 않은 데다 사복 차림인 연호를 유진은 본 적이 없었다. 만년 감기 환자라도 되는지 연호는 밖에서도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헬멧을 벗자 그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빠돌이는 너고.”
“형이라고 부르랬지!”
두 사람은 통과 의례처럼 말다툼을 일삼고 있었다. 그마저도 연호가 남우에게 끌어 안겨 있는 바람에 한없이 친해 보이기만 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진이 남우의 두툼한 팔을 잡아당겼다. 그 사이로 연호의 머리통이 쏙 빠져나왔다. 열심히 정리해 놓은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아니라잖아요. 그만해요.”
연호가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이며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호의로 가득한 새카만 눈동자가 오롯이 유진을 향해 있었다.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이번에야말로 유진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유진의 인사에 연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엄청요!”
경쾌한 답변이 연호의 기분을 짐작케 했다. 그 꾸밈없는 모습에 남우가 지치지도 않고 투덜거렸다.
“…저게 어떻게 빠돌이가 아니냐?”
말투를 보아하니 조금 서운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연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남우의 가드가 헐렁해지자 연호가 잽싸게 남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꼴이 엉망일 게 뻔했지만 그보다는 쇼핑백의 안위가 먼저였다. 아무래도 모서리가 조금 구겨진 것 같았다.
“구겨졌잖아요!”
“와, 저거 여친 줄 선물 구겨졌다고 난리 치는 것 봐. 고등학생이 이렇게 늦게 다녀도 돼?”
“왜 자꾸 딴소리예요. 이거 어떻게 할 건데요.”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이 유치한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유진은 연호를 훑어보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워 입은 시커먼 패딩이 아닌 코트 차림에, 화장품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는 모서리가 구겨진 쇼핑백, 유진으로서는 처음 보는 동그란 머리통까지. 무엇 하나 익숙한 게 없었다. 연호는 여자 친구를 만날 때 이런 모습인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걸 보면 사이도 좋은 것 같았다.
여자 친구라…. 유진은 연호를 바라보며 연호를 생각했다.
분명 연호는 여자 친구에게 잘할 것이다. 유진에게도 이 정도이니 여자 친구에게는 그보다 훨씬 잘하겠지. 그것뿐일까, 연호라면 애정 문제를 놓고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존심은커녕 상대방이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할 게 뻔했다. 그리고는 애정과 신뢰가 전부인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겠지.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동안 유진이 보아 온 연호는 그랬다. 유진에게도 이 정도니까, 유진을 착각하게 만들 정도니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다.
“유진이 형.”
언제 다툼을 끝낸 건지 연호가 혼자서 유진의 앞에 서 있었다. 남우는 교수들 사이에서 사람 좋은 얼굴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유진이 없는 틈을 타 교수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비춰 두려는 속셈이었다.
“어디 아파요?”
“아니요.”
“아픈 것 같은데….”
…아닌가. 연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헬멧도 없는 데다 차림새가 달라서인지 사납다고 생각했던 두 눈이 평소보다 훨씬 나른해 보였다. 연호답지 않게 유진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통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식당 문을 열고 나왔다. 유진이 사람들을 피해 식당 쪽으로 몸을 붙였다. 연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향했다. 연호로서는 갈 일이 거의 없는 한식당이었다. 유진도 이곳에서 식사를 한 것 같았다.
“형. 한식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아요.”
“치킨보다?”
“치킨보다는….”
“그럼 오늘은 형도 잘 먹었겠네요.”
또다시 유진을 향한 맹목적인 호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유진이 그대로 입을 닫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탓이었다. 연호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유진이 말을 하지 않자 대화는 곧 끊기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진의 일행들은 아직도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지금이 올해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았다. 방학이 되면 유진은 학교에 올 일이 없을 거고, 다음번 만남은 내년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마저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운이 좋으면 내년에도 연호네 매장에서 주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에 불과했다.
아쉬웠다. 그게 그렇게 아쉬웠다. 연호의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평소보다 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연호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연호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익숙지 않은 모습에 연호가 부러 친숙한 화젯거리를 꺼냈다. 방금 전 의도치 않게 엿들은 대화의 영향이 컸다.
“맞다. 형, 위로 형 있다면서요. 무슨 최연소…. 그거라던데….”
연호는 유진의 형제 관계에 관심이 많았지만 유진의 형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형에 대한 걸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남우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다였다.
“좋겠다….”
그저 유진 같은 동생을 둔 그가 부러울 뿐. 연호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도 그때였다.
좋겠다니, 대체 뭐가?
평생을 유민이 동생으로 불려 왔다. ‘천유진’이라는 이름보다 ‘유민이 동생’으로 불려 온 날이 훨씬 많았다. 유진이 더 늦게 태어난 데다 초, 중, 고,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교를 함께 다녔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이 살면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이 형을 알고 있었다.
‘네가 유민이 동생이구나?’
‘유민이는 잘 지내니?’
‘쟤가 천유민 동생이래.’
‘이건 유민이 동생이 풀어 볼까?’
유민을 알고 있는 선생님의 한마디는 유민을 모르는 유진의 반 아이들에게 유민의 존재를 깊숙하게 새겨 놓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그 패턴은 대학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교수님이 되었고, 반 아이들이 학과 사람들이 되었다.
익숙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형이 대단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유진이라고 해서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유진은 분수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야? 알고 있기에 더 화가 났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으면 됐잖아. 연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동안 유진이 아픈 건 아니었는지를 묻고, 식사를 맛있게 했는지를 물었다.
이대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유진과 헤어지면 연호는 유진을 바라보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담으려할 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끝내 유진은 표정을 갈무리하는 데 실패했다.
“너 스토커야?”
“네?
뜻 모를 소리에 연호가 곧바로 반문했지만 소용없었다. 유진은 연호를 보면서도 연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면 진짜 게이라도 돼?”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날 선 음성에 영문도 모른 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남우에게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인데도 그랬다.
“아닌데 남의 뒷조사는 왜 하고 다녀.”
빠돌이. 처음 그런 말을 들었을 땐 그저 어이가 없었다. 약간 웃기기도 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냥 그렇게 웃어 넘겼다. 하필이면 그 말을 한 사람이 남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호는 남우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진은? 따져 보니 이상했다. 연호에게 있어 유진과 남우는 비교가 불가한 대상인데도 연호는 유진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이해 없이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호의, 일방적인 대화, 일방적인 관계. 사람들은 그런 걸 스토커라고 불렀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바닥을 나뒹굴던 감자튀김이, 어딘가 곤란해 보이는 미소가, 이따금씩 유진에게서 느껴지던 거리감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그걸 연호만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장 내가 유진에게 다가가고 싶으니까, 궁금하니까, 좋아하니까. 마냥 좋아하는 감정이 앞서서 상대방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호의가 전부니 당연히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심장은 제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빠르게 뛰다 못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른 심장이 호흡을 방해하고 있었다. 덕분에 가슴이 아니라 목 언저리가 아팠다. 명치가 콱콱 쑤셔지는 느낌이었다.
형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내가 진짜 스토커처럼 느껴졌으면 어떡하지? 내가 진짜 게이면 어떡하지? 이대로 영영 형을 못 보게 되면 어떡하지? 내가 진짜 그런 의미로 형을 좋아하는 거면 어떡하지?
강제로 현실을 마주하게 된 연호가 그동안 외면해 온 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유진아! 자리 옮긴대.”
그런 연호를 기다리는 듯, 유진은 이름이 불리고도 여전히 연호의 앞에 서 있었다. 고개 떨군 연호의 시야에 주인을 닮은 단정한 로퍼가 보였다.
유진의 신발을 보고 있자니 일전에 연호가 유진에게 치킨을 엎질렀던 일이 생각났다. 그 엄청난 실수에도 유진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과 부딪친 연호의 걱정을 해 주었다. 그런 유진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미 유진은 연호를….
“천유진!”
재촉하는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어느새 유진의 신발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안 돼.
지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이대로 유진이 영영 연호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연호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형! 잠, 악!”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연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순 코에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아니,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유리문에 정통으로 얼굴을 부딪친 여파는 생각보다 셌다.
“저기요. 괜찮아요?”
식당에서 나오던 손님들이 잔뜩 당황한 채 연호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어지러웠다. 방금 전까지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어서 그런지 몸이 흔들리자 구역질이 났다. 연호가 기침인지 구역질인지 모를 헛숨을 토해 냈다. 기다렸다는 듯 콧속에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흔들지 말아요.”
남우의 품에 갇혀 있을 때처럼 누군가 다가와 연호를 잡아 흔드는 손길을 떼어 주었다. 연호가 간신히 구역질을 멈췄다.
“눈은 괜찮아요? 지금 나 보여?”
또, 유진이었다. 유진은 늘 그랬다. 유진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다정함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유진이 놀라웠다. 신기했다. 그 단순한 감정이 호감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연호는 유진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만 해도 유진은 결국 연호를 내버려 두지 못했다. 역시 유진은 착했다. 연호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훌쩍, 연호가 코에서 흐르는 액체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흔들지 말고 말로 해요. 눈 괜찮은 거 맞아요?”
“으, 네….”
“머리는 안 어지러워요?”
“네….”
“천천히 고개 들어 봐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진이 빠르게 연호를 훑어보았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후우…. 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연호가 괜찮다는 걸 알게 된 손님이 살짝 짜증을 냈다.
“문 바로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킁, 연호가 손님에게 사과를 하다 말고 코를 훌쩍거렸다. 액체를 들이마시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유진이 그대로 멈춰 섰다.
“마스크 벗어 봐요.”
“네?”
“벗으라고.”
연호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유진이 멋대로 연호의 마스크를 벗겨 버렸다. 주르륵, 마스크가 벗겨지면서 질척한 액체가 입술 위로 흘러내렸다. 다행히 침은 아니었다.
“…코피 나잖아요.”
피였다. 콧대 부근이 얼얼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부러지거나 금이 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연호가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괜찮아요. 금방 멎어요.”
“…….”
“형?”
그 덕에 코 주변이 얼룩덜룩했다. 흰 피부 위에 낙인처럼 찍혀 있는 붉은 핏자국에 자꾸만 눈이 갔다. 정작 연호는 이제 별로 아프지 않은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유진을 향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사람만 바라볼 것 같은 흔들림 없는 두 눈이 온전히 유진을 담고 있었다.
연호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 때문인지 유진은 속이 다 울렁거렸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연호는 이런 표정을 짓고 있던 거였다. 이런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고 있던 거였다.
이런 얼굴을 하고서 여자한테 간다고?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진의 얼굴 위로 드리운 불쾌감에 연호의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죄송, 해요….”
코피가 잦아들고 있었다. 상처라는 게 그랬다. 언젠가는 결국 괜찮아졌다.
“스토커처럼 굴어서…. 진짜 죄송해요.”
피가 엉겨들자 콧속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그런 것 같았다. 자꾸만 목이 멨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스스로가 한심했다. 동시에 겁이 났다.
살면서 한 번쯤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조우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겪는 일이었다. 언젠가 겪어야 한다면 당장 지금이라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호는 알지 못했다.
“형 뒷조사를 한 게 아니라….”
“천유진! 거기서 뭐 해! 안 와?”
오늘도 남우는 우렁찼다. 유진이 무어라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어서 주변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탓이었다.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처럼 연호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전에, 들었거든요. 아까도 들었고. 이것도 엿들은 거라면 엿들은 건데….”
역시 연호는 유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머리 뒤로 젖히지 말고 입으로 숨 쉬어요. 코도 그만 마시고.”
처음에는 유진의 신발이 보이더니 다음에는 얼굴이 보였는데 이제는 다리였다. 하필이면 마지막이 다리였다. 유진은 끝내 연호에게 등을 돌렸다. 차마 붙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때 연호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난 그냥…. 형 같은 동생이 있는 게 부러워서….”
유진이 그대로 멈춰 섰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유진은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다. 평생을 유민의 동생으로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얘기였다.
어쩌면 연호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유진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달콤한 환상일지도 몰랐다. 확인하고 싶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니면 어떡하지. 이번에도 내가 착각하는 거면 어떡하지.
킁, 등 뒤로 연호가 또 다시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말도 더럽게 안 들었다. 훌쩍이는 소리에 유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느 틈에 거기까지 간 건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연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쇼핑백은 식당 앞에 내버려 둔 채였다.
모서리가 조금 구겨진 걸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던 연호였다.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이니 그럴 만도 했다. 유진은 연호를 부르는 대신 말없이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마침 식당 흡연실이 비어 있었다. 유진이 쓰레기통에 억지로 쇼핑백을 구겨 넣었다. 빳빳한 쇼핑백이 녹이 슨 쓰레기통 입구에 짓이겨지면서 점점 우그러졌다. 유진은 쇼핑백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으며 연호를 떠올렸다. 피 묻은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던 그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에 맴돌았다.
또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쯤 다른 사람 옆에 있을 연호를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자각도 하기 전에 찾아온 치졸한 감정이 유진을 갉아먹고 있었다.
연호가 쇼핑백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된 건 엄마의 식당에 도착해서였다. 심지어 식당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시간이 배로 걸렸다. 쇼핑백을 되찾으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무서웠다. 이미 떠나고 없을 유진의 싸늘한 얼굴이 생각나서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연호가 다시 유진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먹고사는 게 최우선인 집안 분위기 아래에서 연호가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을 챙겨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물이라고 해 봤자 겨우 핸드크림 하나가 전부였지만 멍청하게도 그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급하게 선물을 다시 사 왔지만 엄마의 반응은 차가웠다.
“너….”
딱히 무언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설마 싫어할 줄은 몰랐다.
“누가 이렇게 쓸데없는 데 돈 쓰래.”
겨우 핸드크림 주제에 몇 만 원이나 하긴 했지만 뛰어난 보습 효과와 끈적임 없는 제형을 자랑하는 제품이었다. 엄마의 생각처럼 마냥 쓸데없는 물건이 아니었다.
“아닌데. 쓸데 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잔뜩 주눅이 든 연호가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일한 돈 다 이런 데다 썼니?”
“그게 아니라….”
“어디서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엄마 속상하게 이럴 거야? 엄마는 너 하나만 보고 사는데 왜…!”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고깃집은 바빴고, 그만큼 진상 손님도 늘어났다. 엄마는 하루 종일 고기 냄새와 손님들의 투정에 시달리다 돌아온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연호 잘못도, 엄마 잘못도 아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연호는 그렇게 믿었다. 연호의 선물은 다시 백화점의 품으로 돌아갔다.
메리 크리스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