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고등학교 2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크리스마스와 겨울 방학을 앞두고 모두가 잔뜩 들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커플이 된 친구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존나 예쁘지.”
얼마 전에 여자 친구가 생긴 친구가 연호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아까부터 다른 애들이 뭘 그렇게 돌려 보나 했더니 여자 친구 사진인 모양이었다. 친구는 연호에게도 여자 친구를 자랑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의 기대와 달리 연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예쁘겠지.”
“아, 그러지 말고 봐. 진짜 존나 예쁘다니까? 너도 인정할걸.”
“내 여자 친구도 아닌데 내가 봐서 뭐 하냐.”
그래 봤자 남의 여자 친구였다. 연호의 심드렁한 반응에 친구가 기를 쓰고 사진을 보여 주려 들었다.
“야, 내비 둬. 강연호 웬만하면 예쁘다고 안 해.”
“쟤가 예쁘다는 얼굴은 딱 하나야. 청순한 거.”
“맞아. 저 새끼 존나 소나무임.”
…내가 청순한 스타일을 좋아하나.
연호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연호가 막연하게 청순한 여성을 떠올려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청순한 ‘여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만 생각났다. 연호가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나 얼마 전에 진짜 예쁜 사람 봤다.”
“헐. 누군데? xx여고?”
“고등학생 아닌데.”
연호의 대답에 교실 안이 술렁거렸다.
“설마 대학생?”
“어. 알바하면서 봤는데 진짜 존나 예뻐. 그렇게 생긴 사람 처음 봤어.”
눈 높기로 소문 난 연호의 극찬에 남고생들이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같은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 누나라니, 이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 같았다.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관계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정작 연호가 가리킨 사람은 대학생 누나가 아니라 대학생 ‘형’이었지만, 아름다움을 논하는 데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진은 연호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었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도 예뻤다. 아니, 마음이 더 예뻤다. 어디 하나 안 예쁜 구석이 없었다.
“키도 진짜 크고 그냥 딱 보면 모델 같아.”
“몇인데?”
“나보다 커. 근데….”
연호의 키는 177cm로, 연호의 대답에 순식간에 등급이 나뉘어졌다. 연호보다 작은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흥미를 잃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연호의 곁에 남아 있는 녀석은 단 몇 명에 불과했다.
“근데 뭐?”
성격 급한 친구가 채근하자 연호가 머뭇거리며 얼마 전 PC방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쌩 까고 그냥 갔다고?”
연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기에 친구들에게는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연호를 무시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속 알맹이야 알고 보면 맹탕도 그런 맹탕이 없었지만 연호의 껍데기만큼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오해 아닌 오해를 많이 받곤 했는데, 그 예로 연호는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전혀 인기가 없었다. 너무 잘 놀게 생긴 데다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진실과 상관없이 겉모습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학생 누나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야, 들이대.”
앞뒤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다. 연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네가 존나 허당이라는 걸 보여 주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일단 왜 쌩 깠는지부터 물어봐.”
…그런 걸 왜 보여 줘야 되지? 연호는 자신이 허당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대신 다른 의문을 품었다.
“…진짜 물어보고 싶다.”
분명히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유진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했다.
“물어보라니까?”
“진짜 그러고 싶다….”
“아, 존나 답답하네, 진짜. 물어보면 되지.”
물어보고 싶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연호는 하루 빨리 유진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못 한다고 생각하니 더 하고 싶어졌다. 유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유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유진을 생각하면 자꾸만 감정이 앞섰다. 자각조차 하지 못한 서투른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
“뭐 그런 새끼가 다 있어요?”
배달을 마치고 매장에 들어서자 함께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호를 발견한 형이 화살을 연호에게 돌렸다.
“너 여태까지 그 새끼 어떻게 참았냐? 그걸 그냥 뒀어?”
“누구요?”
“xx대 본관 404호!”
연호가 배달을 나간 사이 404호에서 주문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안 봐도 뻔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연호는 어렵지 않게 남우의 추태를 예상할 수 있었다.
“미친놈이 계속 깐족거리잖아!”
알지, 알지. 연호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대 치지 그랬어요.”
연호는 남우를 이길 수 없었지만 형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연호가 못내 진심을 담아 형을 부추겼다.
“진짜 한 대 치고 싶었는데 옆에서 죄송하다고 노래를 불러 대서 참았다.”
남우가 그랬을 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이 대신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연호가 알기로는 404호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요?”
“우락부락하고….”
“걔 말고 대신 사과했다는 사람.”
당연히 나지. 형이 단숨에 대답했다.
“존나 신기하더라. 여자 같은 건 아닌데…. 남자가 그렇게 생긴 건 처음 봤어.”
역시 남우 대신 사과한 사람은 유진이 맞았다. 역시, 유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연호가 치킨을 엎질렀을 때에도 너그럽게 넘어갈 줄 아는 관대한 사람이었다. 남우의 잘못에 대신 허리를 숙이는 것 정도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연호를 무시했다. 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동안 모른 척해 오던 불편한 진실이 떠올랐다.
겉모습이나 말투는 그 사람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아니면 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어도 훌훌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연호만의 생각이었다면? 과연 유진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럼 형도 나를 싫어하나?
나쁜 짓을 저지른 아이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어 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진에게는 아무런 오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강연호? 야,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연호를 잡아 흔드는 형의 손길에 심장이 덜컹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무서웠다. 무서웠지만 마냥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연호가 곧장 헬멧을 썼다. 방한용 마스크도 고쳐 썼다.
“사장님, 저 잠깐 나갔다 와도 돼요?”
별로 바쁘지는 않았으므로 사장이 얼떨결에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연호가 잽싸게 매장을 나섰다.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데도 잡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형들에게 오토바이를 배우게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를 자각할 틈도 없이 연호는 평소보다 빠르게 캠퍼스에 도착했다.
본관 앞에 대충 주차를 해 놓고는 그대로 계단을 올려가려다 혹시나 싶은 생각에 잠시 멈춰 섰다. 배달이 오는 걸 알면서도 유진은 404호에서 음식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 유진을 마주친 건 늘 밖에서였다. 연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중앙 도서관이 보였다.
“찾았다!”
오랜 속앓이 끝에 유진을 만나게 된 연호였지만 그 사정을 유진이 알 리가 없었다. 유진은 이번에도 짧게나마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연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유진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은 벌써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내년에 총학생회 일을 병행하게 되면 성적에 지장이 갈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라도 이번 학기는 다른 때보다 훨씬 성적을 잘 받아 둬야 했다. 컨디션 난조를 증명하듯 유진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했지만 어두운 탓에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사실 밝은 곳에 있다 해도 연호는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연호에게 중요한 건 유진에 대한 연호의 감정이지 유진의 안위가 아니었다. 유진이 물었다.
“또 남우 형이 컴플레인 걸었어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남우의 만행을 묻는 유진의 태도가 지나치게 덤덤했다. 연호가 질색을 했다.
“한남우 컴플레인도 걸고 다녀요? 미친 거 아니야?”
“안 걸었으면 다행이고.”
“그게 뭐가 다행이야. 형, 한남우 너무 받아 주지 말아요. 형이 무슨 뒤처리 담당이야, 뭐야.”
말하는 이가 잔뜩 분노하고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연호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서 윙윙 울려 댔다. 잠이 부족한 머리도 함께 울어 댔다. 시험부터 선거까지,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그냥 다 쉬고 싶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만만해서 그래요.”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유진이 불쑥 불편한 진실을 알려 주었다.
“내가요?”
언젠가는 연호가 유진에게 실망할 거라면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유진도 더 이상 연호가 만들어 낸 착각 속에 빠져 있지 않아도 될 테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너 같은 애들이.”
잠꼬대를 하듯 몽롱한 목소리로, 유진은 다른 때보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 애들 있잖아요. 나보다 못 배우고, 나보다 없어 보이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애들. 남우 형도 사람 봐 가면서 그러는 거예요.”
남우는 주로 가게 점원들을 타겟으로 삼았다. 손님은 왕이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기 이전에 손님이기만 하면 되는 그 일방적인 갑을 관계 속에서 남우는 안심하고 화풀이를 했다. 제 속의 열등감을 마음껏 풀어냈다.
“와…. 형은 왜 그런 쓰레기랑 친해요?”
“친한 건 아닌데.”
“중학생 때부터 알았잖아요.”
“오래됐다고 다 친한 건 아니니까요.”
“친하지도 않은데 왜 대신 사과했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연호가 단호하게 유진의 행동을 지적하고 나섰다. 유진이 뿜어낸 담배 연기를 나무라던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설마 이것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연호를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 유진도 그 정도는 알았다. 비록 의중을 완전히 파악해 내지는 못했지만 연호가 자신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자꾸 착각하게 되잖아. 유진은 연호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하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랑 닮아서요.”
드물게도 유진이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연호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기겁했다.
“한남우가 그래요? 어디서 그딴 개소리를….”
유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연호가 듣기에는 그저 개소리에 불과했다.
“둘이 하나도 안 닮았어요. 아, 닮은 거 있다. 눈, 코, 입 있는 거.”
“…….”
“비교할 걸 비교하라고 그래요.”
유진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유진과 남우는 닮았다. 불과 며칠 전에도 유진은 남우와 같은 짓을 했다. 연호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형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섯 살이나 어린 애한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결과적으로 연호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지만 그렇다고 유진이 한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유진이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연호에게 미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유진은 똑같이 행동할 테다. 결국 유진은 연호가 말하는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연호야말로 착각하는 거였다.
그럼 직접 사실을 밝히면 되잖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유진의 시선이 연호에게 향했다. 처음부터 줄곧 유진을 보고 있던 연호와 눈이 마주쳤다. 연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유진은 생각했다.
내가 왜?
유진은 절대로 연호의 생각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진이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면 친형제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었을 테다. 연호에게도 그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충분한 숙면을 취하지 못한 머리가 유진을 한계로 내몰았다. 유진은 이번에도 연호의 의중을 읽어 내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만 가증되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유진은 앞으로 연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만약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유진은 이번에도 자신의 형을 떠올렸다.
형, 천유민. 정답을 구하듯 형을 떠올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유진은 이번에도 감히 실수를 했다.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니,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애초에 형이라면 이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유진은 형이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유진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잦아들었던 편두통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 연호는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점점 아파 왔다. 유진이 혼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다는데 왜 네가 난리예요.”
“그야 말이 안 되니….”
“시끄러워요. 머리 울려.”
돌연 연호가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말을 하지 않는데도 연호가 여전히 시끄럽다는 점이었다. 마치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호의 불만 어린 시선이 뚫어지게 유진을 응시했다. 아니, 노려봤다. 보다 못한 유진이 물었다.
“…뭐 해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담배를 비벼 끈 유진이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연호가 급하게 유진을 잡아 세웠다.
“어디 가요.”
타인의 체온이 원래 이랬던가. 연호에게 붙들린 손목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특별히 세게 잡힌 것도 아닌데, 유진은 순순히 손목을 내어 준 채 그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다가 붙잡힌 것 같은 꼴이었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분명하게 날을 세웠다.
“…손 치워요.”
“손 놔도 안 갈 거예요?”
“치우….”
유진이 연호의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잔뜩 풀이 죽은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유진을 착각하게 만드는, 그 눈이었다. 유진의 망설임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연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머리 안 울려요? 나 말해도 돼요?”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유진이 웃었다. 웃겨서가 아니었다. 헛웃음이었다.
내가 지금 고등학생이랑 뭐 하는 거지. 스치듯 불어온 겨울바람에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요 근래 확실히 잠이 부족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유진을 휘두를 수 있는 건 형이 유일했다. 바꿔 말하면, 유진에게 있어 형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연호의 존재 역시 유진에게 아무것도 아닐 테다. 유진을 뒤흔드는 존재가 두 명이나 있다는 건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혔다. 유진이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말해요.”
유진의 허락에 연호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연호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형 왜 저번에 나 모른 척했어요?”
“…앞뒤 설명 좀 하고 말해요. 저번이 언제인데.”
“며칠 전에 열두 시 안 돼서 횡단보도 앞 사거리에서.”
시간과 장소가 구체적인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유진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거리에서 누군가 유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했다.
“못 봤어요.”
“나랑 눈도 마주쳤는데.”
“어디 있었는데요.”
“5층 PC방에요.”
그걸 알아볼 리가. 알아보는 게 더 이상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연호는 평소에도 귀신 같이 유진을 찾아내곤 했다. 연호라면 충분히 5층에서도 유진을 발견할 만했다.
중요한 건 연호가 그 상황에서 굳이 유진에게 아는 척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유진에게 무시당하자 기어코 유진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유진은 연호가 이럴 때마다 자신이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요?”
연호가 대답 없는 유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닌데….”
“…….”
“어…. 말이 좀 이상한데, 그러니까…. …그냥 내가 형한테 잘못한 거 있으면 알려 줘요. 형한테는 이상한 오해 받기 싫어요.”
유진은 받기만 해서 몰랐다. 사실은 유진도 남들처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연호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유진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연호는 여전히 두 눈 가득 유진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왜? 유진은 연호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연호의 의중이 궁금했다. 잠이 부족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여전히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은 그 눈이 꼭 진짜 같아서, 애정은 언제나 달콤하니까, 믿고 싶어져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랑받는 데서 오는 치졸한 우월감이었다. 처음 맛보는 감각에 경직되어 있던 유진의 눈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연호가 말하려던 것도 잊고 멍하게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이 예의 그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화났어요?”
“화난 건 아닌데….”
“화난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그냥, 좀…. 서운해서….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는 게 어색한 연호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유진의 눈치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유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유진은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반은 잠에 취해 있었으니 실제로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에요.”
연호가 얼떨결에 유진이 건네는 병 음료를 받아 들었다. 유진의 손에 들려 있는 편의점 봉투는 보기만 해도 묵직해 보였다. 언뜻 비치는 봉투 사이로 에너지 드링크들이 보였다. 표면에 맺혀 있는 물방울을 발견하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보기만 해도 추웠다.
다행히 연호가 받은 병 음료는 그렇지 않았다. 같이 들어 있던 에너지 드링크 때문인지 조금 식어 있긴 했지만 차가운 겨울 공기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그럼 조심히 가요.”
장난스럽게 받아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유진의 인사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손 위에서 느껴지는 온기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연호는 특별히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울은 오토바이를 타기에 적합한 계절이 아니었다. 그저 딱 하나, 유일하게 장점이 있다면 바로 바람이었다. 오토바이 위에서 마주하는 겨울바람은 복잡한 머릿속을 씻겨 주곤 했다. 그 맛에 오토바이를 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연호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제대로 바람을 느끼려면 이 정도 속도로는 택도 없었다. 알면서도 그게 잘 안 되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유진이 준 병 음료가 만져졌다. 주머니가 뜨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평소라면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억지로 늦춰 가느라 찬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지만 연호는 저속 주행을 계속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틈틈이 병 음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킁, 끝내 연호가 콧물을 훌쩍거렸다. 속도를 올릴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끝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유진이 조심히 가라고 했으니까. 연호가 또 다시 콧물을 훌쩍이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