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1℃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치고 박고 싸울 뻔한 두 사람이었지만, 브로마이드 때문에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조금씩 서로에게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꼴에 아이돌 팬임을 숨기고 ‘일코’ 중이라는 남우 때문에 404호 사람들을 피해 은밀한 논쟁을 벌이기를 여러 번, 연호는 마침내 남우가 무슨 짓을 해도 특정 멤버의 브로마이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글도 읽을 줄 모르냐며 열심히 깐죽거리던 남우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런 놈도 대학생인 걸 보면 수능도 한번 해 볼 만한 것 같았다. 이제 연호는 남우를 싫어하는 데 익숙해졌다.

“뭘 봐요?”

“계산이나 해요.”

…와, 저 싸가지. 남우가 다 들리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였다. 처음과 달리 남우는 연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몇 번인가 연호에게 시비를 걸다가 구겨진 브로마이드를 받게 된 이후로 암묵적인 갑을 관계가 구축된 두 사람이었다. 고객은 남우였지만 갑은 연호였다.

그 사실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남우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돈 없는데.”

되도 않는 갑질에 연호가 코웃음을 쳤다.

"돈도 없으면서 왜 시켜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꼴이 웃기지도 않았다.

“빨리 계산이나 하라고요.”

“돈 없어서 못 하겠는데요.”

“이런 걸로 장난치지 마요.”

“장난 아닌데. 진짠데.”

“오늘 남우 형 진짜 돈 없어요.”

남우와의 만남이 잦아진 만큼 연호는 404호 사람들과 어느 정도 얼굴을 트게 되었다. 남우만큼이나 자주 보아 온 남자가 장난스럽게 남우를 거들었다.

계산은 언제나 남우가 했다. 장난이라도 남우 대신 계산을 자처하는 사람은 없었고, 남우는 여전히 계산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어쩔 거냐는 듯 남우가 자신만만하게 연호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비슷한 두 사람이었기에 실제로 남우가 연호를 엄청나게 내려다본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랬다.

잠시 기다려 봤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사람들은 배달원에게 관심이 없었고, 남우는 살살 약을 올리기 바빴다.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연호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치킨 박스와 브로마이드를 챙겨 들었다. 먹기 좋게 활짝 젖혀져 있던 치킨 박스는 당연하게도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뚜껑이 자꾸만 벌어졌다.

“와, 돈 없다니까 얄짤 없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시켜 먹었는데 이 정도도 못 해 줘요?”

“네. 못 해 줘요.”

“단골 대우도 못해 주고 여기는 서비스가 영 별로네. 그래서 직원도 이 모양인가?”

“알았으면 이제 그만 좀 시켜요.”

아하하, 연호의 말에 주변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다름 아닌 치킨 배달원이 이들 중 가장 윗사람인 남우에게 면박을 준 것이다. 연호가 남우와 직접적인 상하 관계에 놓인 사람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에 두 사람은 배달원과 손님이라는 갑을 관계에 놓여 있었다.

“뭐야, 진짜 가? 브로마, 아니, 치킨 놓고 가야지!”

이 모든 게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듯 404호 사람들 중 누구도 연호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웃고 있었다. 남우야 웃든 말든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웃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연호뿐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만 해도 연호는 식당에 딸린 쪽방에서 살았다. 연호의 엄마는 식당 일을 했고, 연호가 집에 간다는 말은 곧 식당에 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연호는 많은 것을 보며 자랐다. 술에 취해 손찌검을 하는 사람, 음식으로 장난을 치는 사람, 반말과 하대가 일상인 사람, 엄마가 잠깐 딴짓을 하는 사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 등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이런 종류의 장난에는 빈말로도 어울려 주고 싶지 않았다. 연호가 엄마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연호는 절대로 진상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연호가 조금은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 돌린 그 순간.

누군가와 세게 부딪쳤다. 전에도 겪어 본 적 있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이번에도 피해는 없었다. 연호도, 상대방도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문제는 다치지만 않았다는 점이었다. 연호의 품 안에서 쏟아져 나온 치킨이 남자의 몸에 토사물처럼 펼쳐져 있었다. 불안정하게 겹쳐져 있던 치킨 박스들이 모조리 엎질러진 상황이었다. 난데없는 치킨 테러를 당한 남자에게서 치킨 냄새가 났다. 나다 못해 진동을 했다. 하필이면 양념 치킨이어서 더 그랬다.

투둑, 굳어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치킨 조각이 떨어졌다. 남자의 신발 위로 떨어진 치킨은 마치 남자가 치킨을 신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들었다. 이건 연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대로 남자에게 맞는다 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네?”

지금 내가 헛것을 들은 건가. 놀란 연호가 남자에게 되물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웃지 않았다. 온몸으로 치킨을 받아 낸 남자는 연호의 실수마저 받아 주려는 듯 다정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다치진 않았어요?”

설마 했는데 연호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지만 연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연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치킨을 뒤집어쓴 남자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연호는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났다.

“어떡해. 안 지워져요. 이게 웬 날벼락이야.”

“선배. 얼굴에는 안 묻었어요?”

방 안에 있던 모든 휴지가 총출동했다. 사람들은 병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자에게 묻은 치킨 양념을 닦아 냈다. 연호의 몸에도 양념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에게 나온 쓰레기는 방 안에 있던 봉투 두 개를 채우고도 모자랐다. 어느 정도 뒤처리가 일단락되었을 때 즈음, 연호가 쭈뼛쭈뼛 남자에게 다가갔다. 품에는 여전히 구겨진 치킨 박스를 들고 있는 채였다. 박스에 소스가 묻어 있어서 다른 데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남자는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었다. 남자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흰색 천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런데도 남자는 계속해서 손을 닦았다. 더 이상 물티슈에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데도 그랬다.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걸어 왔던 것 같은데, 정작 연호의 사과에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호가 괜히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남자가 입을 연 건 한참 후였다.

“다치진 않은 것 같네.”

“네. 괜찮….”

“그럼 계산부터 해 주세요.”

남자가 깨끗해진 손으로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었다. 이 사람이 왜? 연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연호가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랬더라. 연호가 멍하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냥 계속 봤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계산이요.”

“…….”

“저기요.”

“어…. 그, 계산, 입니다. 아니…. 계산 안 하셔도…. 되는데….”

“괜찮으니까 그냥 하세요.”

“…….”

“…저기요.”

“네!”

아, 미친. 깜짝이야! 연호의 우렁찬 대답에 누군가가 화음을 넣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남우였다. 뒤늦게 연호와 남자의 대치를 발견한 남우가 두 사람에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너 뭐 해! 네가 돈을 왜 내!”

“우리가 시킨 거잖아요. 계산은 해야죠.”

“지금 돈은 네가 받아야 되거든?”

남우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남자가 계산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계산이요.”

남자가 개의치 않고 카드를 내밀었다. 연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속삭이는 통에 연호가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남우가 기겁을 했다.

“천유진!”

천유진, 그게 남자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치킨 테러를 당하고도 다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고, 난데없이 팔꿈치로 가슴팍을 얻어맞고도 다른 사람을 먼저 걱정하던 남자의 이름이었다.

“형은….”

뜬금없는 호칭에 남자의 시선이 연호에게 향했다. 연호가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형은 이름도 예쁘네요.”

연호와 유진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쟤 지금 뭐라는 거냐?”

남우가 물었지만 유진이라고 해서 그 속을 알 리가 없었다. 연호는 아직도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진과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를 않았다.

“고마워요.”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이 연호와 눈을 맞춘 채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뻔뻔한 반응에 옆에서 지켜보던 남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름도 모르는, 그것도 동성의 시커먼 남자가 면전에 대고 예쁘다는데도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심지어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그만 계산이나 해 줬으면 좋겠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상황이 어쨌든 칭찬은 칭찬이었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유진이 다정하게 연호를 질책했다. 이를 눈치챌 리 없는 연호가 유진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계산은 됐으니까 형 번호나 알려 줘요.”

“…번호요?”

“네.”

연호의 앞뒤 없는 대화가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유진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상대방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유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휴대폰 번호요?”

“그럼 뭐겠어요.”

“저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연호의 즉답에 남우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유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유진이 말없이 연호를 지켜보는 가운데 연호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당연하게도 그 대상은 남우였다.

“시끄러우니까 가만히 좀 있어요.”

“…유진아. 쟤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냐?”

“눈치도 없고 돈도 없어서 어떡하려고 그래요.”

연호의 말에 남우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금거렸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형. 번호요.”

그러거나 말거나 연호가 당당하게 유진의 번호를 요구했다. 연호의 관심은 오직 유진에게 쏠려 있었다. 지난번에도 유진에게 도움을 받은 연호였다.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번호를 알려 달라는 것도 세탁비를 갚기 위해서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지만 유진을 향한 적나라한 호의가 다소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냈다.

어렸을 때부터 유진은 종종 성별에 대한 오해를 사곤 했다. 키가 자라고 골격이 커지면서 유진을 여자아이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없어졌지만, 생김새까지 변하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유진은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호감을 샀다.

연호도 마찬가지일 테다. 지금까지의 유진의 경험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유진이 감흥 없이 다시 카드를 집어넣었다. 연호가 돈을 받지 않는다면 더 이상 연호에게 볼일이 없었다.

“형. 저 먼저 갈게요.”

“어? 벌써?”

“이 꼴로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대화는 남우와 하고 있었지만 유진의 시선은 여전히 연호를 향해 있었다. 이건 연호를 무시 하는 것도, 무시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이로써 연호는 더 이상 유진을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다. 정확히 꼬집어서 말할 순 없었지만 마치 그러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아, 외마디 탄식과 함께 유진이 문 앞에 멈춰 섰다.

“다들 배고프진 않아요?”

“아,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요새 엄청 잘 먹었잖아.”

유진의 말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곳곳에서 비슷한 답변들이 터져 나왔다. 유진도 딱히 무언가를 해 줄 생각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는지, 그가 문고리를 마저 잡아 돌리며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하는 일 없이 배만 채워서 뭐해요.”

그렇지만 정작 유진의 말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404호는 언제나 푸짐한 저녁 식사를 사랑하는 VIP 손님으로, 매 끼니마다 최선을 다해 영양분을 섭취하고 있었다. 물론 연호의 매장 단골이 된 건 브로마이드를 향한 남우의 열정 때문인 탓이 컸지만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그럼 회의는 내일 오전에 다시 하는 걸로 해요.”

“아, 네.”

“이번에는 준비 똑바로 해 놓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유진이 유유히 404호를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연호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으나 지금 연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유진은 연호에게 잘못을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연호를 걱정해 주었다.

‘괜찮아요?’

유진은 이미 가고 없었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호가 멍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잔열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

“사려고?”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고 있나 했더니 연호는 드물게도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었다. 연호가 제품 사진을 보여 주며 묻자 친구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사. 당장 사.”

“그렇게 괜찮아?”

“어. 존나 구려.”

이 새끼가. 반쯤 엎드려 있던 연호가 기세 좋게 몸을 일으켰지만 친구가 한발 빨랐다. 연호를 깔아뭉갠 것도 모자라 여유롭게 휴대폰을 낚아채 가더니 마음대로 연호의 휴대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비키라고!”

연호가 악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연호는 여전히 친구 밑에 깔려 있었다.

“넌 밝은 색 안 어울려.”

한참 만에 돌려받은 휴대폰에는 연호가 보고 있던 것과 달리 색이 시커먼 니트 사진이 떠 있었다. 연호가 곧장 페이지를 뒤로 돌렸다.

“기껏 어울리는 걸로 찾아 줬더니 어디서 패션 테러리스트가 건방지게.”

“아, 진짜! 하지 말라고!”

“네가 웬일로 옷을 다 사냐. 데이트하냐?”

“뭐래. 내가 입을 거 아니거든.”

양념이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게 무서워질 정도로 밝고 깨끗한 색 니트. 유진이 입고 있던 옷이 이런 느낌이었다. 디자인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유진에게 잘 어울렸다는 인상만 남아 있었다.

“강연호 여자 생겼다고?”

“드디어 모쏠 탈출하는 거?”

“예쁘냐?”

무료하게 쉬는 시간을 죽이던 친구들이 재미있는 냄새를 맡고 단숨에 몰려들었다.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핸드폰을 뺏겼지만 딱히 들킬 만한 것도 없었다. 어차피 연호가 보고 있던 화면에는 남자 니트 사진이 전부였다. 이런 헛소동이 벌써 며칠째였다.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됐냐고 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연호가 팔꿈치로 유진을 가격했을 때처럼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뒤늦게 컴플레인이 걸려 오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지만, 연호의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유진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장도 관대하게 연호의 실수를 넘어가 주었다. 사고의 당사자인 유진이 괜찮다는데 화를 낼 일이 뭐가 있냐는 게 그 이유였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연호는 유진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세탁비를 요구하지 않는 것도, 연호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도 모두 다 이상했다. 난데없이 치킨을 뒤집어쓰고도 자신과 부딪친 연호를 걱정하던 모습도 그랬다. 유진은 연호의 팔꿈치에 가슴을 얻어맞고도 연호부터 챙기려 들었으며, 남우로부터 연호를 지켜 주기도 했다.

그날 이후 연호는 틈틈이 유진을 떠올리게 되었다. 연호의 일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연을 기대하게 되었다.

한 번 더 유진을 만나고 싶었다.

“xx대 본관 404호 주문 들어왔다.”

배달 박스를 접고 있던 연호가 용수철처럼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치킨 테러 사건 이후 처음 들어온 본관 404호의 주문 전화였다. 이번에도 주문 금액은 3만 원 이상으로, 누가 주문을 했는지는 보나마나 뻔했다. 다시는 주문을 하지 않을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남우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남우가 있어서 다행이라니, 이 대목에서 연호는 알 수 없는 패배감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감자튀김까지 던지고 오려고?”

함께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연호가 배달 나갈 준비를 했다. 서두른 탓인지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묘한 기대감 속에서 연호가 가볍게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브로마이드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꼴에 아직도 일코 중인 남우가 속삭이며 묻자 연호가 빈손을 내밀었다. 잠시 고민하던 남우가 조심스럽게 연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손과 손이 맞닿자 연호가 기겁을 했다.

“미쳤어요? 돈 달라고요!”

“…그럼 그렇게 얘기를 해야지 헷갈리잖아요!”

“돈 달라고 일일이 말을 해야 알아요? 초등학생이야?”

뇌를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직언에 남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또다시 시작된 연호와 남우의 공방전에 404호 사람들이 익숙한 듯 웃어 넘겼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인데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연호는 유진과 404호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를 끼친 판이었다. 그중에서도 유진에게 입힌 피해가 가장 컸다. 404호 사람들 모두가 유진의 지인인 만큼, 연호를 곱지 않게 바라본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지난번 일을 의식해서인지 남우가 순순히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 남우가 수상했는지 연호가 못미더운 얼굴로 남우를 훑어보았다. 그것도 모자라 카드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연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거 그쪽 카드 아니잖아요.”

“뭐?”

“여기 천유진이라고 적혀 있는데.”

남우가 건네준 카드에는 유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남우는 당당했다.

“그래서 뭐요. 훔치기라도 했을까 봐?”

“훔쳤어요?”

“…와, 누구를 도둑으로 아나. 이거 천유진이 준 거거든요!”

“본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졸지에 도둑 취급을 받게 된 남우가 억울한 듯 온몸으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 나섰지만 연호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연호에게 있어 남우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남우를 향한 연호의 절대적인 신뢰에 알아서 배달 온 음식을 세팅하던 404호 사람들이 남우를 거들고 나섰다.

“그거 유진 선배가 준 거 맞아요.”

“지금까지 다 그걸로 결제했는데.”

“맞아. 여태 잘만 됐잖아.”

브로마이드 때문인지 남우는 언제나 칼같이 3만 원에 맞춰서 주문을 했다. 주문 한 번에 최소 3만 원이라는 건 세 번만 시켜도 거의 10만 원이라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404호가 세 번만 주문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다 유진이 냈다고? 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난번도요?”

“그날은 유진 선배가 늦게 와서….”

“아, 그때 진짜…. 그냥 카드를 우리한테 주면 되지 그게 무슨 개고생이야. 꼭 근처에 있을 때만 빌려주고…. 서로 불편하게시리.”

누구인지 모를 불퉁한 목소리가 뒤따랐지만 그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연호를 제외한 누구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진이 형은 안 와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연호가 유진의 행방을 물었다.

유진이 형. 친근하기 짝이 없는 호칭에 남우가 다시금 연호를 훑어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시 봐도 연호가 맞았다. 그는 손님을 깔보듯이 쳐다보는 것도 모자라 서비스 정신도 부족한 사회성 없는 직원이었다. 연호에게서 느껴지는 유진에 대한 호의에 남우가 미심쩍게 물었다.

“천유진이랑 아는 사이예요?”

“네.”

남우보다는 조금 늦게 알게 되긴 했지만 연호와 유진은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남우가 물어본 건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이전에도 서로 안면이 있었는지를 물어본 거였다.

어쩐지. 둘이 아는 사이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지난번에 연호와 유진이 보여 준 기묘한 그림이 이해가 되었다. 남우가 알아서 연호의 대답을 해석했다.

“걔 한 시간은 있어야 올 텐데.”

“같이 안 먹어요?”

“어우, 내가 왜요?”

꺼림칙한 반응이었지만 남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대로 마냥 유진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못해 계산을 마친 연호가 사무적으로 브로마이드를 두 장 건넸다. 남우가 의아한 얼굴로 잽싸게 브로마이드를 받아 들었다. 브로마이드가 두 장이나 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주니 챙기고 보는 것 같았다. 남우다운 행동이었다.

“지난번에 못 드린 것까지 가져왔어요.”

원래대로라면 남우는 치킨 테러 사건 때도 브로마이드를 받아야 했다. 어쩌다 보니 계산을 하지 않았을 뿐, 주문을 한 건 맞았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뿐인데도 연호를 바라보는 남우의 두 눈이 감동에 젖어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했다. 도대체 연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남우에게는 이번 일이 굉장한 감동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이날 이후 연호를 향한 남우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는 변화였다.

“왔어요?”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정면으로 남우를 맞닥뜨린 연호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지만 남우는 개의치 않았다. 연호에게 확신이 생긴 탓이었다. 연호는 싸가지 없는 직원에서 표현이 서툰 의리남으로 승격되었다. 진짜 존나 싫었다.

“내가 오늘은.”

“5만 6천원입니다.”

“잠깐 들리라고 얘기 해 놨…. 아, 뭐야. 찢어졌잖아!”

찢어진 게 아니라 단순한 얼룩이었다. 그럼에도 연호는 굳이 사실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되도 않는 친한 척보다는 여느 때처럼 시비를 걸어 오는 게 훨씬 나았다.

남우는 이번에도 유진의 카드를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유진의 카드로 계산하고는 있지만 역시 찝찝했다.

“아씨, 박스에 이런 게 왜 묻어 있어? 조심 좀 하지 이런 것도 제대로 못 들고 와요?”

“카드나 잘 챙겨요. 자기 카드도 아니면서….”

“누가 보면 천유진 대변인인 줄 알겠네.”

“알면 조심 좀 하든가.”

슬쩍 방 안을 둘러봤지만 오늘도 유진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유진은 언제나 계산을 자처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는 않았다. 이래서야 주머니 속 봉투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연호가 멍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요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성 없는 발소리가 남우를 연상시켰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쫓아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호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딱 맞춰서 왔네.”

그 장대한 계획은 엘리베이터에서 유진이 내리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밖에 있다 온 건지 유진에게서 차가운 냄새가 났다. 치킨 테러 사건 이후 첫 만남이었다.

방금 전까지도 유진을 떠올리고 있었던 탓인지 막상 유진을 보자 마치 연예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기까지 했다. 덕분에 연호는 봉투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연호의 시선에 유진도 연호를 바라보았다. 브랜드 로고가 찍혀 있는 헬멧과 방한용 마스크, 손에 들린 배달 가방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유진은 어렵지 않게 연호를 기억해 냈다. 복도 한복판에서 남우와 싸움을 벌이던 것도 모자라 유진에게 치킨을 쏟은, 그 직원이었다. 유진이 노파심에 물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에요?”

“에이, 일은 무슨. 그땐 잠깐 오해할 뻔했는데,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사람이 의리가 있어!”

보기보다 괜찮다는 것도, 의리가 있다는 것도 모두 연호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놈의 브로마이드가 대체 뭐라고. 아주 지긋지긋했다.

“맞다. 유진아, 네가 설명 좀 해 줘라.”

“무슨 설명이요?”

“너랑 친한 사이인 건 알겠는데 계산할 때마다 네 카드 쓴다고 난리도 아니잖아.”

유진과 연호가 친하다니, 유진으로서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비록 연호가 헬멧과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지인으로 둔 적이 없었다.

“혹시 xx 고등학교 나왔어요?”

“아니요.”

“그럼 중학교랑 초등학교는?”

“○○ 중학교랑 △△ 초등학교 다녔는데요.”

이런 건 왜 물어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연호는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동창도 아니면서 나랑 언제 그렇게 친했다는 건지 모르겠네.”

물으나 마나 뻔한 결과였지만 역시나였다. 유진과 연호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아는 사이라며?!”

졸지에 없는 말을 지어 낸 꼴이 된 남우가 연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연호야말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나 기억 안 나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뭐 그런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연호가 보기에 유진은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유진이 누군가를 돕는다 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며칠 안 됐는데….”

그래도 조금 서운하긴 했다. 연호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다정함이 유진에게는 별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에요?”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모습이 정말로 서운해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조곤조곤 말투가 듣기 좋았다. 연호가 밝게 대답했다.

“아닌데. 저 대학 안 다녀요.”

졸업도 안 한 고등학생이 대학을 다닐 리가 없었지만, 유진은 연호의 나이조차 알지 못했다.

유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는 연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유진은 하루 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다가 남우의 성화에 못 이겨 잠깐 본관에 들른 참이었다. 겨우 이런 일로 사람을 불러 낸 거였다니, 유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우에게 향했다.

“…남우 형.”

“아니, 그, 들어봐. 나는 당연히 아는 사이인 줄 알고….”

“됐으니까 카드나 줘요.”

남우의 말대로였다. 유진은 정말로 사람들에게 카드를 빌려주고 있는 게 맞았다.

“형.”

이름을 동반하지 않은 불분명한 호칭에 남우와 유진이 동시에 연호를 돌아보았다. 연호는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지만 정답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연호는 시선이 오로지 유진을 향해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 시선을 맞닥뜨린 유진은 다수 중에서 자신이 가장 우선시되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형은 왜 사 주기만 하고 같이 안 먹어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404호를 방문했지만 연호는 유진이 무언가를 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연호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궁금했던 걸 물은 것뿐이었지만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이제는 관습처럼 굳어진 이 상황이 외부인에게는 충분히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유진은 아주 오랜만에 깨달았다.

알아봐 줬다는 생각과 들켰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무어라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확실한 건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 양념 치킨 얘기하는 거예요?”

유진이 연호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쳤다. 아주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아닌데. 오늘은 프라이드 시켰는데 얘기 못 들었어요?”

양념 치킨은 지난번 주문 메뉴로, 정작 유진은 오늘 어떤 메뉴를 시켰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연호가 불경한 것을 보듯 남우를 쳐다보았다. 마치 왕따 주모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우리 매장은 프라이드가 더 맛있는데. 앞으로는 프라이드 시켜요.”

“글쎄요. 당분간 뭐가 됐든 치킨은 좀….”

“와.”

연호에게서 정제되지 않은 감탄사가 나왔다. 다만, 치킨 테러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연호가 보여야 할 반응은 감탄이 아닌 미안함이어야 했다.

“치킨 싫어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일부러 이러는 건가? 겉보기와 전혀 다른 모습이 더욱 수상하게 느껴졌다. 유진은 도리어 연호를 경계했다.

“애가 좀 모자라 보여서 그렇지 의리는 있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남우는 아까부터 연호를 변호하려 들었다. 유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형은 치킨이 왜 싫어요?”

이대로 넘어가나 싶었더니 연호가 유진을 붙잡고 재차 확인을 해 왔다. 유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싫어하진 않아요.”

“그럼 햄버거랑 피자는요?”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싫어한다는 거네. 유진의 대답에 연호는 도리어 확신만 얻게 되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했겠지 저렇게 애매한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숨기지 않아도 티가 나는 법이니까. 연호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근데 왜 자꾸 우리 거 시켜요.”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걸 남우 때문에 시키고 있었다니 저 정도면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연호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냥 형 좋아하는 거 시키지….”

그 말에 유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를 쓰고 카드를 받아 가는 남우도, 이제는 당연하게 유진의 카드를 기다리는 선후배들도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진을 싫어해서는 아니었다. 굳이 인과관계를 따지자면 유진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예쁘게 웃는 얼굴로 돈까지 잘 쓰는 유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유진을 돈줄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지 못했으므로 유진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 동안에만 유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되었다.

원활한 조직 생활을 위한 유진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물론 그 대상에 연호는 없었다. 당연했다. 어쩌다 치킨 양념을 얻어맞은 것 말고는 생면부지인 사이였다. 유진은 연호에게 무엇을 해 준 적도, 노력한 적도 없었다. 연호는 유진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호는 자신에게 무엇 하나 해 준 적 없는 유진의 자금 사정을 걱정하고 있었다. 유진은 노력 없는 대가에 익숙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유진을 걱정해 오는 연호의 호의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저 사람은 나한테 뭘 바라고 저러는 거지? 유진이 기민하게 연호를 살폈다.

그동안 경험으로 봤을 때 유진이 모르는 사람이 유진에게 호의적인 경우는 보통 두 가지였다. 유진의 외모에 호감을 느꼈거나 혹은 형과 아는 사이거나. 첫 번째 경우라면 언제나처럼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형과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잘 보여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형을 아는 사람에게는 일말의 트집도 잡히고 싶지 않았다.

“네. 사장님. …지금요? 아니요, 네. 바로 갈게요. 네.”

과연 연호는 어느 쪽일까. 긴장한 유진을 놀리기라도 하듯 연호가 유진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 바로 매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같았다.

연호는 아쉬운 마음에 연호가 통화를 하면서도 계속 유진을 힐끔거렸다. 엘리베이터에 타기 직전까지도 그랬다. 덕분에 유진은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긴장과 별개로 유진에게 눈을 떼지 못하던 연호의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넌 어느 쪽인데?

유진이 확실하게 연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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