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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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업종이 그러하듯 일을 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치는 순간이 있는데, 서비스업은 그 순간이 더욱 잦았다. 손님이 진상인 경우였다. 세상은 넓고 진상은 많았다.
“담배는.”
연호는 치킨 배달원이었다. 정확히는 치킨을 주력으로 하는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원에 불과했지,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의 담배 심부름꾼은 아니었다.
“담배가 뭐요?”
“오는 길에 사 오라고 했잖아.”
안 샀다. 아니, 살 수가 없었다. 오늘은 한 주 매출을 책임지는 금요일 밤이었다. 사장은 치킨을 튀겨야 했다. 주방 일에 매달리느라 진상 고객의 잔심부름을 할 틈이 없었다.
“못 사 간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담배 하나 사는 데 몇 분이나 걸린다고 유난이야? 말대꾸하지 말고 빨리 갔다 와.”
“저 담배 못 산다고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고했을 뿐인데 손님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여기에는 연호 탓이 컸다.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친절하고 부드럽게 얘기할 수도 있는 법인데 연호는 한 마디를 해도 툭툭 뱉어 내는 태도도 모자라 인상까지 사나웠다.
“이게 어디서 어른한테 그따위로!”
손님이 말하는 그따위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미루어 볼 때 원인은 둘 중 하나였다. 첫 번째는 눈빛이었다.
“그냥 쳐다본 건데요.”
“야, 됐고.”
그게 아니면 말투였다.
“안 사 오면 돈 못 받을 줄 알아.”
아니면 둘 다거나. 지금 손님은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꺼내 든 셈이었다. 이쯤 되면 연호도 눈치껏 손님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래서였다. 연호는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눈 밑까지 올려 쓴 마스크와 투박한 헬멧 때문에 눈만 보이는 주제에 그 자세 그대로 손님을 내려다보았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에 손님이 단번에 큰 소리를 냈다.
“이 새끼가!”
놀라울 거 없는 반응이었다. 손님은 연호가 배달을 왔을 때부터 일찌감치 화가 나 있었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마음에 화가 가득한 사람들이 많은 건지, 연호는 오늘도 고민해야 했다.
일방적인 화풀이였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묵묵히 욕설을 듣고 있던 연호가 대뜸 헬멧을 벗었다. 마스크도 떼어 냈다.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던 헬멧과 마스크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졌다. 맨얼굴을 드러낸 연호가 손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저 어려요.”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역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연호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미성년자라서 담배 못 산다고요.”
연호의 고백을 듣고도 손님은 말이 없었다.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아저씨?”
연호가 대답 없는 손님에게 다가가 맨얼굴을 들이밀었다. 시커먼 놈이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대자 놀랐는지 손님의 얼굴이 붉어졌다.
연호가 매장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몇 십 분이 흐른 뒤였다.
“무슨 일 있었니? 왜 이렇게 늦었어.”
마스크를 써도 얼굴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바깥과 달리, 사장에게는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튀김 기계 때문이었다.
“사장님. 저 어려 보여요?”
“사고라도 났었니? 다친 곳은 없고?”
기름에 절어 있던 사장이 걱정스레 연호를 살피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왜 대답 안 해 줘요.”
“아직도 그 소리니?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어리잖니.”
맞는 말이었다. 이런 걸 두고 우문현답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다만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는 말이 마치 연호가 노안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아 조금 찝찝하긴 했다.
역시 금요일 밤의 위력은 대단했다. 담배 손님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그새 주문이 밀려 있었다. 헬멧을 벗을 틈도 없었다. 연호가 또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고등학생이 뭐 하는 짓이냐, 부모님은 뭘 하시길래 이렇게 자식을 내버려 두냐, 공부는 잘하냐…. 연호가 미성년자임을 알게 된 담배 손님이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대로 도로 위에 모든 걸 쏟아 낼 참이었다. 연호가 오토바이 속력을 냈다.
근처 대학교에서 들어온 주문이었다. 늦은 시간에도 북적거리는 캠퍼스는 고등학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어려서부터 이 동네에 살았지만 연호는 캠퍼스에 들를 때마다 대학생들을 구경하곤 했다. 연호의 눈에 비친 대학생들은 완전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치킨 왔습니다.”
배달지는 본관 404호로, 처음 전표를 받았을 땐 숫자가 조금 재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멀뚱멀뚱 서 있는데 어째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치킨이 왔다는 소리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니,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치킨 왔습니다. 마치 주문 같은 말이었다. 이 한 마디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맨발로 달려 나오곤 했다. 진상은 있어도 푸대접을 받아 본 적은 없는 연호였기에 이런 무반응은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전표를 확인해 봤지만 다시 봐도 배달지는 본관 404호가 맞았다. 설마 장난 전화는 아니겠지. 대학생들이나 돼서 그럴 리가. 그러나 보장은 할 수 없었다.
“치킨이요!”
초조해진 연호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문이 열렸다.
“저희 치킨 안 시켰는데….”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장난 전화인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배달지를 착각했거나. 뭐가 됐든 귀찮기 짝이 없었다.
“여기 본관 404호 아니에요?”
“맞는데 저희 치킨 안 시켰어요. 혹시 치킨 시킨 사람 있어?”
웅성거리는 소리 너머로 북적이는 내부가 보였다.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치킨의 양을 봤을 때 방 안이 시끄러운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아니라니, 한두 마리도 아니고 이렇게 대량 주문이 장난 전화라면 질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주문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자 통화 중이라는 음성만 울려 퍼졌다. 매장으로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가게 사정이 급박한지 사장은 휴대폰 전화도 받지 않았다.
…장난 전화인가 봐. 404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어딘가 험악한 분위기의 연호를 경계하던 것도 잠시, 모두가 거대한 치킨 봉투를 들고 서 있는 연호를 측은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언제냐고요. 방금 전에 출발했다면서 왜 말을 못해요?”
한껏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남자 하나가 건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통화 중이었다.
“사장님, 요즘이 어떤 시대예요. 이제는 변명도 창의적으로 해야 하는 시대라 이거예요. 아시겠어요?”
저 새끼다. 누가 봐도 저 새끼였다. 연호가 성큼성큼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의 덩치가 실감이 났다. 키는 연호와 비슷했지만 너비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는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근육질이었다.
“4312 맞아요?”
“…아, 깜짝이야!”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헬멧과 마스크, 여기에 어두운 색 바람막이가 더해지자 형광등 불빛 아래에 선 연호는 사람보다는 검정색 물체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연호의 등장에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4312 맞냐고요.”
훗날 404호에 있던 사람들은 회상한다. 그날 연호와 남우의 첫 만남은 마치 국내의 모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고. 비록 둘 다 범죄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
아직 고등학생인 연호에게 아르바이트는 방과 후 일과로, 오전부터 오후까지는 학교에 가야 했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연호는 오늘도 간신히 지각을 면했다. 그 증거로 연호의 뺨에 베개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일어난 지 아직 30분도 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는 연호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특성화 고등학교는 인문계와 달리 무작위 배정을 따르지 않았다. 지원자에 한해서만 학생을 받다 보니 연호처럼 동네 주민이 입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벌써부터 출근길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연호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각을 면한 것까진 좋았는데 도저히 잠이 깰 틈이 없었다. 곧바로 아침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의 대부분은 졸거나 친구들과 딴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다행히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능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전반적으로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는 곧 연호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는 거 아니야?”
친구 입에서 자격증 이야기가 나오다니, 제 귀로 듣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연호가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차라리 기말고사 공부를 해라. 그게 더 현실성 있겠다.”
“내신으로는 이미 글렀으니까 그렇지.”
사실 수능이든 내신이든 어차피 연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연호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할 계획이었다.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 내년부터 고3 될 생각하니까 존나 심란하다.”
“평소에 공부도 안 하는 새끼가 뭐라는 거야. 강연호 넌 오토바이 언제 사냐?”
듣다 못한 친구 하나가 화제를 돌렸다. 오토바이는 연호가 가장 좋아하는 화제 중 하나였다. 연호가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죽기 전에?”
“아직도 돈 못 모았어?”
“네가 모아 보든가.”
그마저도 사장의 투철한 근로 방침 때문에 일반 아르바이트보다 더 근무 시간이 적은 참이었다. 형들 말에 의하면 새벽 배달이 제일 짭짤하다고 했지만, 연호의 사장은 새벽 영업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배달 사고가 새벽에 이루어진다는 통계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사장은 종종 조기 퇴근을 시켜 주곤 했다. 문제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연호의 취지와는 하나도 맞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아, 강연호 오토바이 언제 사. 나도 좀 타자.”
“미친놈아. 내 거 건들기만 해.”
“저 새끼는 사지도 않아 놓고 왜 벌써 지랄이야?”
있지도 않은 오토바이를 싸고돌자 친구가 잔뜩 비웃었다. 연호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오토바이 타고 싶으면 너도 배달 알바나 하든가.”
“그래 봤자 동네 돌아다니는 거밖에 더 되냐. 시시하게.”
“형들 뒤에 타는 거 재밌었는데….”
여기서 형들이라는 건 지금은 졸업한 학교 선배들로, 연호에게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알려 준 사람들이었다.
“그럼 뭐 하냐. 한 번 얻어 타려면 존나 비벼야 됐잖아. 지문 없어지는 줄.”
“나도 얻어 타는 건 싫어. 차라리 내가 사고 말지.”
연호의 말에 친구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야, 그래도 넌 형들이 예뻐했잖아. 부탁하면 못 탄 적 한 번도 없으면서…. 우리만 존나 찬밥이었지.”
“그게 예뻐하는 거냐.”
친구들에 비하면 연호가 특별 대우를 받는 건 맞았지만 그걸 예뻐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연호가 생각하는 예뻐한다는 감정은 상대를 위하는 부드럽고 다정한 형태의 애정이지, 흥미와 호기심으로 얼룩진 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오토바이가 아니었다면 그런 질 나쁜 형들과 어울리는 일도 없었을 테다. 처음 맛본 오토바이의 속도감은 연호로 하여금 형들의 모든 장난을 감내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매장이 존나 바빴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들 덕분에 오토바이의를 타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연호는 진심으로 형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딱 그거 한 가지만 그랬다.
“그런다고 시급 더 받겠냐.”
“오토바이는 계속 탈 수 있잖아.”
오토바이를 타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이따금씩 허전한 마음이 차오를 때마다 연호는 오토바이를 탔다. 오토바이도 타고 시간도 때우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점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는 일석삼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사장님도 좋은 사람이었다.
매장이 지금보다 바빠졌으면 좋겠다는 것도 진심이었지만 정말로 말이 씨가 될 줄은 몰랐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 가장 바쁜 하루였다. 연호는 쉴 새 없이 도로를 누벼야 했다.
오늘부터 실시된 이벤트 때문이었다. 치킨을 사면 경품을 끼워 준다는 흔한 상술이었다. 경품은 어느 아이돌 그룹의 한정판 브로마이드로, 3만 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 무작위로 증정되는 방식이었다. 멤버 수는 많았지만 브로마이드들은 전부 똑같은 상자에 밀봉되어 있어서 상자를 뜯어보지 않는 이상 내용물은 식별할 수 없었다.
그다지 인기 있는 그룹이 아니어서 연호도, 사장도 모두 방심하고 말았다. 주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건 아니었지만 각 시간대별로 연이어 주문이 들어오고 있었다. 즉, 엄청 바쁜 건 아니었으되 쉴 틈이 없었다. 그게 더 사람을 지치게 했다.
사장은 아예 매장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안에서는 기름 냄새와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연호가 헬멧을 벗으려 들자 사장이 안에서 소리쳤다.
“벗지 마!”
어째 어감이 좀 그랬다. 사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치킨 박스를 한 아름 짊어지고 나왔다. 불과 몇 십 분 만에 다시 마주한 사장은 그새 아까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사장님 부자 되겠네요.”
“그전에 늙어 죽겠어. 먹고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
그래도 무작정 동네 치킨집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프랜차이즈와 계약하여 오픈한 걸 보면 사장은 자본금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연호의 엄마도 처음부터 이름이 알려진 프랜차이즈 매장을 차렸다면 지금보다 고생도 적었을 테다. 그럴 돈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연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사장에게 치킨 박스를 넘겨받았다.
“이거 단체 주문이라 한 집만 들르면 되니까 이것만 끝내고 뭐 좀 먹자.”
“재료 남았어요?”
“뭘 그런 것까지 걱정하고 그러니.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는 살아야지. 운전 조심하고.”
안 그래도 계속되는 노동에 지쳐 가던 참이었다. 연호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배달지에 도착했다.
다녀오면 달콤한 간식이 기다리고 있을 마지막 배달지는 다름 아닌 본관 404호였다. 첫 주문 이후로 종종 단체 주문이 들어오는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주문 금액이 무려 7만 2천 원이나 되었다.
첫 만남부터 알아봤듯 404호는 역시 진상이었다. 정확히는 404호에 있는 한 사람이 문제인 거였지만 그가 늘 계산을 했으므로 연호에게 404호는 진상 그 자체였다.
제가 다른 데 있어 놓고 창의성을 운운하며 컴플레인을 걸던 그 이름은 한남우로, 404호 사람들 모두가 그를 형이나 오빠, 선배라고 불렀다. 그가 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모양이었다. 딱 봐도 그래 보였다.
“치킨 왔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연호를 반긴 건 다름 아닌 남우였다. 무시를 하면 무시를 했지 빈말로도 감사한다는 인사 한 번 한 적 없는 놈이었다. 이렇게 연호를 반겨 줄 놈이 아닌데. 뭔가 수상했다.
“이야, 이제 우리가 좀 편해졌나 봐요?”
뭔 소리야. 연호가 못마땅한 얼굴로 남우를 쳐다보았다.
“어째 점점 더 늦게 오는 게 우리를 참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 소리가 하고 싶어서 앞장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연호가 놀란 기색 없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하나도 안 늦었는데요.”
“그건 배달원이 아니라 소비자인 우리가 판단할 문제 아닌가?”
일종의 습관인 것 같았는데 남우는 말 한 마디를 해도 꼭 저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호에게는 항상 저랬다. 연호를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면 절대로 취할 수 없는 태도였다.
“7만 2천 원입니다.”
남우가 기다렸다는 듯 카드를 내밀었다. 한껏 폼을 잡고 있는 꼴이 꼭 말라비틀어진 치즈 같았다. 몸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얼굴이 그랬다. 치즈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허기가 몰려왔다. 빨리 가서 사장님이랑 간식 먹어야지. 연호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잠깐!”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복도를 울리는 성난 목소리에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연호도 함께 시선을 옮기자 씩씩거리며 달려오는 남우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또 저렇게 화가 난 걸까. 원래 진상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분노에 차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렌지잖아.”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남우의 손을 비롯해 연호 주변 그 어디에도 오렌지는 없었다.
“내가 분명히 베리로 달라고 했잖아요!”
“저희 매장에는 오렌지 치킨도, 베리 치킨도 없는데요.”
“아, 진짜. 무슨 소리예요.”
연호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다. 남우가 더는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브로마이드!”
연호는 남우의 답변에도 쉽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렌지와 베리가 브로마이드 모델인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임을 연호가 알 리 없었다.
“베리 브로마이드로 가지고 올 것.”
‘베리 브로마이드로 가지고 올 것’ 남우가 영수증 하단에 찍혀 있는 배송 시 요청 사항을 고스란히 따라 읽었다.
“한글 못 읽어요? 주문할 때 분명히 얘기했는데 이런 것도 똑바로 못해요?”
그런 데 원체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연호가 아는 건 딱 하나, 이벤트 방침이었다. 브로마이드는 일정 3만 원 이상 구매 고객 모두에게 무작위로 증정되었으며, 밀봉되어 있는 상자를 일일이 열어 보지 않는 이상 점주라고 해도 뭐가 들어 있는지 알기는 불가능했다.
“네. 못해요.”
“왜!”
남우는 아까부터 은근 슬쩍 반말을 해 왔다. 연호가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랜덤 증정인데 어떡하라고요.”
“그러니까 베리 것만 빼놨어야죠!”
“…제가 왜요?”
“와, 내가 그동안 여기서 시켜 먹은 게 얼마인데!”
진상들에게는 행동 지침이라도 있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다’ 남우는 덩치만 큰 줄 알았더니 목소리도 더럽게 컸다. 우기기는 또 어찌나 잘 하는지 연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벌써 몇 십 분 째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연호의 휴대폰이 울어 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장에게 오는 전화인가 싶어 휴대폰을 확인하려 하자 남우가 돌연 연호의 팔을 잡아챘다.
“예의 좀 지키지? 아직 얘기 안 끝났거든요.”
띠링. 거칠게 팔이 붙들리자 엘리베이터 도착 알림 음과 함께 연호의 이성이 탈출하는 소리가 났다. 연호는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있는 힘껏 남우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다 단단한 무언가에 그대로 팔꿈치가 부딪치고 말았다.
퍽! 꽤 큰 소리였다. 부딪친 쪽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지만 당장은 나의 고통이 우선이었다. 마치 팔꿈치가 쪼개질 것 같았다. 벌써 몇 십 분째 씨름을 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프기까지 하다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요?”
연호에게 부딪친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연호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화를 내면 화를 냈지 이런 상황에서 연호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식당을 어지럽히는 진상들에게 단단히 훈련된 결과였다.
“조심하세요.”
발이 꼬인 연호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자 누군가가 뒤에서 연호를 잡아 주었다. 남우에게 꼴사납게 넘어지는 모습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연호가 똑바로 바닥을 딛고 서자 연호를 잡아 주던 커다란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뒷사람은 연호에게 따지거나 화내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연호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도리어 남우가 호들갑을 떨었다.
“야! 괜찮아? 안 다쳤어?”
“괜찮아요.”
남우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보니 뒷사람은 남우의 일행인 것 같았다. 이로써 새로운 트집거리가 추가되었다.
“와, 이젠 사람을 막 치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그걸로 끝인가? 세상 참 편하게 사시네.”
“그런 거 아니라고요.”
“누구는 때릴 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아나.”
무슨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았다. 돌아오는 건 조롱과 비아냥거림이 전부였다.
“아씨, 진짜….”
연호가 짜증 섞인 한숨을 토해 냈다. 그 소리를 어떻게 오해해서 들은 건지 남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 씨발?”
남우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이 새끼가 돌았나.”
맞을지도 모른다. 연호가 본능적으로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힘으로 남우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남우에게 맞고 맨바닥을 나뒹굴고 싶지는 않았다.
“형, 왜 그래요.”
갑자기 끌어 안겼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백 허그까지는 아니었지만, 방금 전에도 느꼈던 커다란 손이 연호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우가 주먹질을 하면 곧바로 받아칠 생각만 하고 있던 연호였다. 연호는 지금 자신의 뒤에서 단단히 버티고 서 있는 타인의 존재가 조금 얼떨떨했다.
“야, 놔 봐. 내가 전부터 저 새끼 싸가지 고쳐 놓으려고 했어.”
“형. 소리가 너무 커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너무 시끄러운데.”
“방금 전에도 지가 실수해 놓고 끝까지 우기고 있었다고!”
“남우 형.”
남자가 나긋하게 남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뿐인데 돌연 남우가 입을 다물었다. 남우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주변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때 아닌 소란에 다른 호실에서 사람들이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똑바로 설 수 있어요?”
당황스러웠다. 학교 선생님 중에도, 지금까지 연호가 만나 온 사장님들 중에도, 친구들 중에도 이런 말투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연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조심스럽게 연호의 몸을 놓아주었다.
“무슨 일인데요.”
줄곧 연호 뒤에 있던 남자가 연호에게 등을 보이며 섰다. 정확히는 남우와 연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너비가 넓다고 생각했던 남우는 남자에게 완전히 가려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남우처럼 근육질 몸매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골격 자체가 큰 것 같았다.
“돈이라도 떼먹혔어요?”
“그건 아닌데 저 새끼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이 정도로 시끄럽게 굴었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남우가 대답을 망설였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 참된 진상이라 할 수 없었다. 연호가 적극적으로 남우를 대변하고 나섰다.
“브로마이드 바꿔 달라면서요.”
브로마이드…? 연호의 앞에 선 남자가 작게 중얼거리자 남우의 몸이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는 채였다. 안 그래도 치즈 같던 인간이 더 치즈 같았다.
“아, 아하하.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오해를 하셔도 단단히 하셨네.”
너비가 넓은 몸이 온 힘을 다해 친한 척을 해 오자 연호가 질색을 했다.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달려들 땐 언제고 엄청난 태세 전환이었다.
“아, 잠깐만. 잠깐만요. 좀.”
연호가 남우를 뿌리치려 들자 남우가 애절하게 매달려 왔다. 귓가에서 속삭이기까지 하는 바람에 연호는 남우를 더 싫어하게 되었다.
“바쁘실 텐데 너무 오래 계셨다. 그죠?”
“놔요. 아, 만지지 말라고요.”
“이야, 엘리베이터도 바로 와 있고! 이거 타시면 되겠네요.”
키는 비슷하지만 너비가 다른 두 사람이었다. 연호는 그대로 남우에게 떠밀려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어졌다. 연호를 엘리베이터에 처박아 넣는 데 성공한 남우가 연호만 들릴 정도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눈치가 그렇게 없어요? 나 일코 중이라고!”
일코는 또 뭐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남우에게서 벗어난 연호가 뒤늦게 외쳐 봤지만 어느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었다. 닫힘 버튼에 시뻘겋게 불이 들어와 있는 걸 보니 밖에서 남우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시야가 닫히는 그 짧은 순간에 누군가 연호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연호를 잡아 주었던, 그 남자였다. 이를 인지했을 때는 이미 엘리베이터가 닫힌 후였다.
얼굴을 자세히 볼 새도 없었다. 잠깐이나마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남자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다니, 말도 안 되었다.
잘못 봤겠지. 연호는 금세 남자에 대한 오해를 떨쳐 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저렇게 제대로 된 인간이 남우의 일행이라는 사실이었다. 놀랍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결국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고, 남우와 친해 보이는 저놈도 어딘가 이상할 확률이 높았지만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우 덕분인지도 몰랐다. 엄청난 대비 효과였다.
팔꿈치가 아직도 얼얼했다. 연호가 이 정도이니 상대방은 훨씬 아플 게 뻔했다. 부딪친 데는 괜찮은 건가. 뒤늦게 남자가 걱정되었지만 벌써 헤어진 이상 소용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호는 이따금 남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