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칼릴!”
흥분되어 높아진 목소리가 빠르게 다다다다 말을 쏟아 부었다.
“나도 알아, 목욕 중에 난입하다니 날 아주 돼먹지 못한 놈이라고 생각하겠지. 그치만 그동안 넌 여기 코빼기도 안 비치고 닛사 경이 네가 여기 있다고 가 보라고 했단 말야!”
아리안이 칼릴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실 그냥 다가왔지만 칼릴에게는 달려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흰 두 손이 칼릴의 양팔을 덥석 움켜잡았다.
“재판 전에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어. 칼릴. 도르센을 사랑했어? 로물루스가 일곱 개의 언덕을 사랑했듯이?”
폭풍 같았다.
아리안은 칼릴을 향해 몸을 약간 기울인 채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눈은 녹색이었고 약간 젖어서 반들거렸다. 두 뺨은 상기되어 있었으며 욕탕 안에 자욱한 수증기 탓에 입술이 젖은 것처럼 보였다.
칼릴은 어지러운 머리를 한 번 저었다. 질문의 의도는 완전한 미스테리였다.
“도르센은 내 의무였어.”
칼릴은 굳어진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짧은 7년, 도르센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버림받은 왕자였던 그 시간 동안 그에게는 도르센만이 전부였다.
숨도 쉬지 못하고 대답을 기다리던 아리안에게서 하아, 하고 막혔던 숨이 토해져 나왔다.
“난 당신이… 재판 결과에 실망했을까 봐.”
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했어. 미리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그러니까, 재판 전에 검사가 나한테 왔었어. 신성 재판에 대해서 내 의견을 물어보더라구.”
아리안은 약간 횡설수설했고 그러는 와중에 상체는 점점 더 칼릴을 향해 기울어져 이제 둘의 가슴팍이 아슬아슬하게 맞닿기 직전이었다. 생각이 끊어졌다. 칼릴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다.
서론, 본론, 결론이 명확하지 않던 아리안의 말이 어느 순간 멎었다. 이제 칼릴에게는 아리안의 빨간 정수리만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아리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리안은 숨 쉬고 있었다. 상기된 뺨은 붉었고 통통하게 살이 붙은 입술에는 윤기가 흘렀다. 머리카락은 반드르르했으며 피부에서는 빛이 났다. 정말로 살아 있는 아리안이었다. 쾰른에서 그가 구했던, 시베닉에서 그를 구했던, 웃고 울었고 키스했던, 그 아리안이었다.
그것은 비현실적이었다.
이 차원, 이곳 도르센, 그리고 바로 여기 칼릴 앞에 아리안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
그제야 칼릴은 자신이 왜 도르센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아리안이 더 이상 이곳에 없을까 봐 두려웠다.
아리안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신성 재판은 끝났으며 판결은 내려졌다. 오십 년의 금고형은 칼릴을 이곳 차원에 묶어 두었으나 아리안은 아니었다. 아리안의 자리는 이제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의 희생이 그의 신성을 더욱 빛나게 했으며 선의와 헌신으로 뭉친 이 작은 소년을 가장 거룩한 자로 만들었다.
“너는….”
“나?”
“넌….”
아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칼릴을 올려다보았다.
칼릴은 자신이 이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그것은 입 밖으로 튀어 나간 뒤였다.
“왜 아직 여기에 남았지?”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녹색 눈에 반지르르한 물기가 돌았다. 충격받은 듯이 벌어진 입술이 달싹거렸다.
“무, 무슨 소리야. 난… 내가… 그건 거짓말이라고 했잖아.”
아리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서러운 듯한 울음이 묻어 나왔다.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이라고 했는데….”
그 순간 강렬한 충동이 칼릴을 덮쳤다. 칼릴은 그 충동에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절반만 패배했다.
“알아.”
그는 아리안을 으깨지도록 끌어안고 싶은 욕심을 간신히 참아 냈다. 차원 마수가 낮게 쉰 음성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고백했다.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지.”
아리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 속이 투명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두 뺨은 붉었다.
“맞아. 거짓말이었어….”
아리안의 목소리는 안도한 것처럼 말꼬리가 느릿했다.
“닛사 경에게 들었어. 네가. 당신이… 아덴을 데려다주고 왔는데… 아무튼 바빴다고. 그래도 오늘은 여기서 쉴 거라고 하잖아. 오랜만에 만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엘테아에서 살아 있는 가재를 가져왔다고 말이야. 요리사가 그걸 요리할 거라면서….”
말이 꼬이는지 화제가 두서없었다. 아리안 자신조차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칼릴은 그의 말에서 두 가지만을 알아들었다.
오스발이 칼릴을 여기로 집어넣었고 닛사가 아리안을 여기까지 데려왔다. 칼릴은 자신이 그들의 작당에 화가 나는지 아니면 기쁜지도 알 수 없었다. 그걸 판단하기 전에 아리안이 몸을 더 바짝 붙였다. 이제 둘의 가슴팍은 맞닿아 있었다. 아리안의 손은 칼릴의 양 팔뚝을 꽉 움켜잡아 거의 끌어안다시피 몸을 기댄 채였다.
“있잖아. 부르조가 좋은 향료를 가져왔는데 향기가 엄청 좋아….”
아리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까?
칼릴은 손도 못 쓰고 욕탕에서 끌려 나왔다. 젖은 맨발이 타일 위를 가로질렀다. 그의 침대는 비단 휘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침대 곁에 못 보던 길쭉한 청동 향로가 놓여 있었고 거기서 향기가 흘러나왔다.
아리안이 상기된 얼굴로 칼릴을 올려다보았다. 게슴츠레하게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 밑으로 눈동자는 몽롱했다. 발뒤꿈치가 점점 들리면서 입술이 가까워졌다. 칼릴은 그 입술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감히 그가 입맞춤을 바랄 수 있을까?
그러나 자학적인 의문과 달리 그의 몸은 저항의 의지를 잃었다. 아리안이 다가왔을 때 그는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몸이 뒤로 밀렸다. 오금에 침대가 닿았다. 잠시 뒤에 그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아리안이 그의 다리 위로 올라오듯이 몸을 기댄 채 입술을 붙였다.
칼릴은 꼼짝도 못 하고 굳어졌다.
아리안이 부끄러운 척 배시시 웃더니 다시 한번 입술을 들이밀었다.
칼릴은 그 모든 폭거에 무력했다.
침대와 아리안의 피부에서는 부르조가 가져왔다는 향료의 향기가 났다. 그의 침대와 아리안에게서 같은 향기가 풍긴다는 사실은 고문에 가까웠다. 아리안이 흥분으로 숨을 몰아쉬면서 그의 위에서 한참 몸을 비비적거리다가 마침내 버들가지처럼 부들거리는 사지를 쭉 뻗고 잠에 빠져들었을 때까지도 그 고문은 끝나지 않았다.
칼릴은 자신의 가슴팍에 볼을 기대고 잠든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으음.”
아리안이 잠꼬대를 흘리면서 팔다리로 칼릴을 넝쿨처럼 꽉 휘어 감았다. 칼릴은 저항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력감과 함께 오랜만에 깊은, 아주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
그는 손을 뻗었다. 미지근하게 덥혀진 시트가 손끝에 닿았다. 동시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품은 비어 있었다. 베개와 시트는 미지근했으며 침대에는 그뿐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칼릴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양손으로 휘장을 잡아 뜯듯이 걷어 내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손이 벌벌 경련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 그의 둥지 가장 깊은 곳에 아리안이 차가운 얼굴로 누워 있는 끔찍한 환각. 홀쭉하게 여윈 뺨과 부패가 시작되어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파리한 입술이 생생하게 그의 앞에 삼차원의 형상을 갖고 떠올랐다. 죽은 아리안과 살아 있는 아리안. 그는 어느 것이 꿈인지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경련하는 손으로 간신히 침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자, 복도를 정리하던 몸종이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리안은.”
그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신관은 어딨지?”
“전하. 신관님께선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사람을 보내 불러오리까?”
몸종이 놀란 듯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릴은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실패했다.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고 반대편 손을 몸종을 향해 한 번 내젓고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아리안은 성벽 북서쪽 벌판에 서 있었다. 조랑말 한 마리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갈대 싹을 먹고 있었다.
칼릴은 그제야 막혔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아리안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바람이 불어와 식은땀으로 축축한 뒷덜미가 서늘했다.
아리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곧 그 얼굴에 스르르 웃음이 떠올랐다.
“여긴 적어도 천 년은 풍요로울 거야.”
그러면서 아리안은 평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물줄기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메말랐던 동토에 물이 흐르고 싹이 돋으며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부스러지던 모래밭 위를 물길이 싣고 온 기름진 황토가 덮었고 그 위로 갈대와 이끼가 빼곡하게 돋아났다. 바위와 모래 대신 어린 갈댓잎의 녹색 파도가 드넓은 대지 위에 물결쳤다.
칼릴은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허리 높이만큼 웃자란 갈대 싹을 손끝으로 가지고 놀던 아리안이 흘기듯이 그를 곁눈질했다.
“천년을 이어질 대제국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번영을 예언한 건 너지 내가 아냐.”
“오십 년이나 시간이 있는데도 힘들어?”
“더없이 삼차원적 표현이군.”
그 말에 아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약간 퉁명스레 대꾸했다.
“어차피 그 뒤에도 시간이 많잖아.”
칼릴은 입을 다물었다.
그 뒤.
오십 년 뒤로도 영원히.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언제나처럼 아리안의 말이 맞았다. 그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었다.
물론 ‘영원’은 절대적인 개념이므로 어느 차원에서든, 어느 시간 축에서든 동일하다.
***
왕국의 번영에 대해 설명하려면 오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론 이는 이쪽 시간으로 오십 년을 이야기한다. (저쪽 시간, 즉 그레고리력으로는 약 8년에 해당한다.)
파살리아의 늙은 왕과 그 딸과 세 아들들. 재앙의 그림자. 기사들. 신관들. 마법사들. 호수 반대편에서 건너온 신들. 그리고 무상의 사랑, 은총에 대하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