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29)화 (129/130)

#129

칼릴은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 아덴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파살리아의 왕자가 아닌 두 남자가 마주 섰다. 멈춰 선 아덴의 시선이 칼릴의 어깨 너머, 식량을 싣고 있는 거대한 선박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얼룩졌다.

“무슨 일입니까?”

칼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덴이 칼릴을 바라보다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내 아우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굳이 그런 척할 필요 없습니다.”

칼릴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덴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나쁜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튼 도르센을 열고 식량을 원조해 준 것과 엘테아의 선박들을 빌려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얼마 뒤에야 칼릴은 입을 열었다.

“배가 곧 출발합니다.”

영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음에도 아덴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 번 칼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선착장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선원들이 줄을 잡아당겨 깃발을 올렸다. 수십 척의 선박에 일제히 선명한 깃발이 올랐다. 강의 흐름에 올라탄 배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선착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배들은 오브강의 지류를 타고 남진하여 파살리아로 향한다. 아덴은 군대를 이끌고 있었지만 유혈 사태가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국왕이 죽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귀족들은 파살리아에서 달아났으며 난민과 도적들이 텅 빈 도시를 약탈했다. 아덴이 그곳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파살리아가 갖는 실체 없는 상징뿐, 아니면 기껏해야 무너진 성벽의 벽돌 몇 장 정도겠지.

물론 아덴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아덴은 여태까지 로마 공회가 편들었던 그 어떤 선지자(先知者)와도 달랐다. 그는 아가멤논도, 스키피오도, 메흐메트 2세도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건 승리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건 평화였다. 따라서 그가 홀로 도르센 성벽 앞으로 말을 몰아 달려왔을 때 아리안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은하가 생긴 밤, 재앙이 사라지며 그가 창조했던 그림자 마수도 함께 사라졌다. 신의 피가 흘렀던 황무지를 물줄기가 가로질렀다. 빛나는 수면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어린 갈대 싹이 대지를 덮었다. 더는 싸울 이유가 없었다. 흰옷을 입고 스스로를 포로로 자처하는 왕자를 죽일 이유도 없었고.

칼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배들의 행렬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의 곁으로 닛사가 다가왔다.

“전하. 이제 귀환하시겠습니까? 마법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칼릴은 대답을 미뤘다.

이제 엘테아에서의 일은 끝났다. 남은 정리는 엘테아 사령관의 몫이었고 그에게는 이곳에서의 일보다 도르센에서의 일이 더 많았다.

“전하?”

대답 없는 칼릴을 닛사가 한 번 더 불렀다.

칼릴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마법사는 이번에는 재촉하는 대신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칼릴이 대답했다.

“그래.”

닛사의 마법 길을 따라 말을 모는 내내 칼릴은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사실 복잡하지 않았다.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수많은 상념들은 결국 한 가지로 이어졌다. 아리안. 칼릴은 도르센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신성 재판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아리안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안 본 건 아니었다.

아리안은 도르센에서 가장 좋은 방, 즉 대공의 방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 방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지만 칼릴은 그러지 못했다. 대신 그는 밤마다 아리안을 지켜보았다. 멀리서, 아리안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차원의 작은 틈으로 잠든 얼굴을 밤새 바라보았다. 아리안에 대한 보고는 매일매일 올라왔다. 아리안을 시중드는 몸종들, 방 앞을 지키는 기사들, 이따금씩 그의 말상대를 하는 부르조까지. 아리안이 잠시라도 말을 섞거나 얼굴을 본 모든 사람들의 보고가 정연하게 정리되어 그의 앞에 대령 되었다.

“저 버드나무를 돌면 길이 끝납니다.”

그때 닛사가 손가락을 뻗어 오솔길 끝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칼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말고삐를 쥔 그의 손등이 꿈틀거렸다.

곧 작은 버드나무를 도는 것과 함께 닛사의 마법 길이 끝났다. 버드나무 반대편으로 평지 위 웅장하게 펼쳐진 도르센 성벽이 솟아올랐다.

마법 길을 걷는 반나절은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닛사의 마법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칼릴은 성벽을 짧게 올려다보았다. 그들을 마중 나온 기사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닛사는 거침없이 말을 몰아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일이 많았다.

그는 순찰대장의 보고를 받은 뒤 기사들을 이끌고 성벽 밖으로 나갔다. 성벽 근교 불모의 가시 숲으로 이어지는 황무지에 새로운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물가에는 그림자 마수의 시체가 한 구 있었으나 죽은 지 오래되어 살점은 모두 썩고 갈빗대가 드러나 있었다. 칼릴은 소리 내며 흐르는 작은 물줄기 곁의 조약돌 틈에서 피어오른 수선화 봉오리를 발견했지만 못 본 척했다.

그 뒤에 그는 병영에서 시간을 끌었다.

해가 지는 것처럼 밤이 깊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누군가 문고리를 쿵쿵 두들겨 노크했다. 아까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온 몸종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방문자는 오스발이었다. 그가 안으로 불쑥 들어오자 칼릴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만 던졌다.

“오늘은 일이 많으니 여기서 자고 가겠다. 몸종에게 갈아입을 옷만 가져오라고 해.”

그러나 오스발은 그 명령에 따르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부르조 영감이 모처럼 직접 목욕 준비를 해 놨다는데 그러지 말고 성으로 돌아가시죠.”

그러더니 그가 칼릴이 앉은 바로 곁까지 다가와서 친근한 동작으로 어깨를 툭툭 쳤다. 그건 전장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우으로서의 특권이었다.

“자자. 일어나십쇼. 그 영감이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도통 성에 붙어 있질 않는다면서요. 엘테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병영에서 밤을 지내신 걸 알면 아마 내일쯤에는 전하 발에 매달려 울부짖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칼릴을 반 억지로 일으켰다. 황소처럼 기운이 셌다.

오스발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을 절었는데 신성 재판이 끝나고 나니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아리안의 짓이 분명했다.

칼릴이 잠시 아리안 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오스발은 그를 질질 끌어 문밖으로 끄집어냈다.

“전하께서 여기 죽치고 계시면 병사들도 불편해하지 않겠습니까.”

칼릴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꼴을 변호하는 거냐?”

“어차피 절반은 집으로 돌아갔고 절반만 남아 있습니다. 그나마도 최근 할 일이 없어서 놀고먹는 처지구요. 농삿일에라도 차출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놈들이 조만간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칠 겁니다.”

오스발의 말이 맞긴 했다. 도르센 병사들은 최근 무료함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고 그림자 마수는 자취를 감췄다. 막대한 규모의 군대는 졸지에 할 일을 잃었다.

“아무튼 그건 내일 생각하실 일입니다.”

오스발이 그렇게 지껄이면서 칼릴의 팔에 자기 팔을 끼워 질질 끌다시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부르조 노인이 아주 공들여 목욕 준비를 했다니 들어가시지요. 흠. 작부들을 몇 부를까요?”

칼릴의 눈이 사나워졌고, 오스발은 씩 웃었다.

“물론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꺼져.”

그사이에 그들은 성에 도착했다.

칼릴은 오스발의 정강이에 발길질을 했다. 목적을 달성한 충성스러운 기사는 킬킬거리면서 달아났다.

아무튼 오스발의 말이 맞았다. 욕탕이 정성껏 준비되어 있었다. 팔팔 끓여 조금 전 채운 듯한 물에서는 김이 뿌옇게 솟아올랐고 물 빛깔은 뿌연 유백색이었다. 이곳 요새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온천에서 길어 온 물이 분명했다. 커다란 욕조 옆 대리석 선반 위에는 다섯 종류의 향료와 비누가 놓여 있었고 기름, 면도칼, 수건, 새 옷 따위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튼 이런 목욕은 오랜만이었다.

칼릴은 짧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옷을 벗어 던졌다. 금방 나신이 된 그가 한 발을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욕조 턱에 출렁거리도록 넘치게 부은 물이 대리석 타일 바닥으로 쏟아졌다. 축축한 수증기가 그를 덮었다. 그는 남은 발도 욕조 안으로 넣고 물속으로 몸을 깊게 가라앉혔다.

평소와 달리 중간중간 문밖에서 몸종이 공손히 물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뜨거운 물을 더 부어 드릴까요, 몸을 닦아 드릴까요, 수건이 모자라지는 않으십니까, 등등.

이전 칼릴은 저주라고 믿었던 몸의 흉터와 그걸 가리기 위한 문신 탓에 목욕 시중을 받지 않았다. 그를 가까이서 시중드는 사람들은 모두 그걸 알았다. 몸종은 신참이거나 아니면 한 번도 칼릴의 근처에서 시중든 적이 없는 자가 분명했다.

목욕을 마치고 새 옷을 입는 와중, 밖에서 다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번째였다. 그리고 칼릴이 저 모자란 몸종이 뜨거운 물을 더 부어 드리겠다는 둥 수건을 가져다드리겠다는 둥 하는 소리를 한 번만 더 한다면 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이 탁 튀어나왔다.

아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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