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9> 그라티아
아리안은 작은 중정에 앉아 직사각형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가 무수한 별들 사이에서 새롭고 낯설게 빛나는 녹색 별무리를 찾았을 때였다.
중정 서쪽으로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주랑에서 털썩, 털썩,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안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흰 기둥 옆, 메데이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명확지 않았다.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다가, 아리안이 앉은 긴 우단 의자 바로 곁에 도착한 뒤에야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팔걸이에 손을 기대며 시선을 올려 아리안이 바라보는 쪽을 같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밤하늘을 더듬었다.
갑작스레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리안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리석처럼 희끄무레한 옆얼굴이 고요했다. 얼마간의 침묵 뒤 그녀가 고개를 내려 아리안을 마주 응시했다.
“아, 인사부터 할까? 안녕, 아리안? 우리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분이시여?”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아리안이 미간을 찌푸리자 메데이아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재앙을 별자리로 만든 걸 누구나 알아. 지금 시대에 그런 걸 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어?”
그녀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이제 어쩔 거야?”
아리안은 대답을 잠시 미루고 먼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 무리로 시선을 던졌다.
그다지 오랫동안은 아니었다. 망설일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재심을 청구해야지.”
그 대답에 메데이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포기 못 했어? 아니. 애초에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다구. 공회는 더 이상 명분이 없어. 결국 재앙을 불러일으킨 것도 로마 공회의 그 잘난 재판 탓이 아니었냔 말야. 게다가 너, 아리안.”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검지와 엄지를 가볍게 튕겨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금빛 연기가 피어올라 높은 의자의 형상을 만들었다.
“높은 자들 중 가장 높은 자. 네가 빛이 있으라면 있을 테지. 그런 널 상대로 제아무리 공회라 할지라도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아리안은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냐. 난… 그냥. 칼릴이 죄가 없었다고, 그 신성 재판의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걸 밝히고 싶어.”
“아하.”
메데이아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인위적인 감탄사를 올렸다.
“여전히 규칙을 따르시겠다. 대단한 위인 납셨어.”
아리안은 메데이아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메데이아가 옆으로 몇 발자국 정도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서 찬찬히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선의와 헌신, 질서와 선, 도덕, 희생. 로마 공회가 추구하는 가치들. 그리고 이 소년이야말로 로마 공회의 이상향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정작 이 소년으로 인해 로마 공회는 재앙과 성전의 책임에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성전은 끝났고 예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재앙의 왼쪽 어깨로 예언되었던 칼릴이 재앙을 살해했으며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아리안을 되살렸다.
로마 공회의 쓰디쓴 패배였다.
메데이아는 팔짱을 끼며 툭 질문을 던졌다.
“재심 청구에 필요한 동의표는 다 모았고?”
그 질문에 아리안이 멍청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가 다소 사납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나, 너까지 두 명은 있다 쳐도 나머지 하나는? 설마 지크프리트 녀석이 도와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걔가 미쳤다고 그러겠어? 이번에 차원 마수를 놓치고서는 제법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
그러나 사납던 목소리에는 점점 유쾌한 듯한 기색이 섞였다.
“흐흥. 그치만 그 녀석은 한 번쯤 된통 당해 봐야 했어. 난 그전부터 그 녀석 고까웠거든. 새파랗게 어린놈이 한 번쯤 운 좋게 어디서 되다만 차원 마수 찌끄레기 하나 콕 찔러 죽였다고 여기저기서 떠받들어 주는 꼴이 얼마나 눈꼴셨는데?”
청색 초거성 급 다차원 생물종을 살해한 것을 ‘운 좋게’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리안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당혹스럽게 눈동자만 굴렸다.
“다른 하나는… 어… 이제부터 찾아볼 거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참 나.”
메데이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멍청이. 농담이야. 그 녀석 설득은 나한테 맡겨. 그리고 그 녀석이 아니라도 네 편을 들 놈들 수두룩해.”
그녀가 손바닥을 위쪽으로 해서 살짝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가증스럽지만 상황이 예전하곤 다르잖아? 안 그래? 높은 자들 중 가장 높은 분.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말라구.”
그 뒤에 그녀는 시선을 슬쩍 돌려 어둠이 내려앉은 기둥 사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다른 손님이 온 것 같으니 난 여기까지. 그럼 재심 때 보자구.”
그녀가 휙 몸을 돌려 회랑 반대편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리안은 그녀를 붙잡으려다가 말았다. 대신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메데이아, 고마워.”
대답 대신 과장된 투덜거림이 되돌아왔다.
“아. 이 차원은 이제 지긋지긋해.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남긴 메데이아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곧 작은 등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사라진 뒤, 아리안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랑 기둥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닛사였다. 나이 든 마법사는 지치고 피로한 안색이었으며 눈 밑에는 나이를 읽기 힘든 고뇌가 겹겹이 주름져 있었다.
닛사는 아리안에게서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일단 오스발 경의 다리를 치료해 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마.”
그녀가 그렇게 운을 뗐다.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니었는데요, 뭘….”
허가 없이 이적을 일으키는 데에는 처벌이 따랐다. 몇 가지 이적은 더욱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앉은뱅이를 서게 하는 것, 장님을 눈 뜨게 하는 것, 물 위를 걷는 것 등이 거기 속했다. 하지만 오스발이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은 애초에 칼릴과 지크프리트로 인한 것이었으니 로마 공회도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리안의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닛사는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못내 불편해진 아리안이 손가락을 서로 꼬면서 꾸물거리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그녀가 돌처럼 굳어 있던 입술을 뗐다.
“너희들이 선택한 왕은 우리 주인이 아닌 것이냐?”
“아….”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마법사는 묵묵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는, 칼릴은, 도르센 대공은….”
아리안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짜 도르센 대공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는 것을, 칼릴은 그저 우연히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라는 것을, 4억 5천만 광년을 추락하는 과정에서 그가 다차원 생물종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잊고 그들의 주인처럼 행세했다는 것을.
닛사는 횡설수설하는 아리안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기어이 아리안이 입을 도로 다물었고, 닛사가 대신 입을 열었다.
“이곳 사람이 아니신 거로군. 너처럼.”
아리안은 바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닛사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전하께선… 도르센을 버리실까?”
이번에 아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간을, 그 혈통을, 그들의 대지를 사랑한 수많은 신들을 생각했다.
한참 뒤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닛사는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래, 하는 짧은 대답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아리안은 그녀의 발뒤꿈치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그림자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읽었다. 현명한 마법사. 쾌활한 기사. 수다스러운 약제사. 어린 소년병과 젊은 시녀들과 농사꾼들, 대장장이, 돼지치기, 푸주한, 신발 장수들부터 무기 상인들까지. 도르센을, 그리고 도르센의 주인을 흠모하는 수많은 사람들.
칼릴이 돌아오면 물어볼 것이 생겼다.
도르센을 사랑했냐고.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진심으로 아꼈냐고. 지금도 그러하냐고.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신성 재판에서 공회에게 할 말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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