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27)화 (127/130)

#127

“어때. 그립지 않아?”

요한이 등 뒤에서 속삭였다. 그의 팔이 아리안의 어깨를 안았다.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 입술에서는 비린 피 냄새가 풍겼다.

“네겐 익숙한 물건 아냐? 응?”

아리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요한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그가 아리안의 등을 와락 밀었다. 아리안은 철의 소녀 안으로 떨어졌다. 가시가 그의 몸을 찌르고 뚜껑이 쿵 닫혔다. 그러나 고통은 없었다. 수천 개의 가시도, 그의 몸을 덮은 강철 관뚜껑도,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도 전부 가짜였다.

아리안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는 슬픈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문 도구도, 바닥에 차오른 피도, 비명 지르는 사람들도, 고문관도. 공작새 깃털을 꽂은 시종들도, 광대도, 악단도.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거기엔 재앙이 있었다.

내려앉고 부서진 바닥 틈에 요한이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몸은 오래된 석고 조각상처럼 부스러지고 갈라져 있었으며 몸의 쪼개진 금으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말라붙은 채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힌 단 하나의 기둥이 그의 목 뒤에서부터 아랫배를 거쳐 그를 관통하여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리안은 저것이 누구의 짓인지 알 수 있었다.

칼릴이 한발 빨랐던 것이다.

홀은 황량했으며 폐허에 가까웠다.

틀이 뜯겨 나간 커다란 창문으로부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바닥의 먼지를 굴렸다. 무너진 기둥 사이에는 조각상의 얼굴과 팔이 따로따로 나뒹굴었으며 금간 대리석 바닥은 찌그러진 지층처럼 울퉁불퉁했다.

요한이 낮게 킬킬거렸다.

“뭐야아. 왜 그런 표정이지? 제법 재미있지 않았어? 널 맞이해서 나름 신경 써 봤는데.”

아리안은 대답하는 대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누가 봐도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요한이 몇 번 기침했다. 쿨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가에서 피가 쏟아지고 그를 관통한 기둥이 들썩거렸다.

“흐흐, 흐흣….”

그가 웃음을 흘리면서 아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뭘 또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이제 네 앞엔 해피 엔딩만 남은 거 아니었나? 응?”

요한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너덜거리는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연인의 사랑으로 죽음에서 부활하고 악은 처단당했노라.”

그가 엄숙하게 읊었다.

찢겨 뼈가 드러난 팔이 덜걱거리고 반대편 텅 빈 비단 소매가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팔이 곧 밑으로 툭 떨어졌다.

“재미없어. 정말 재미없군. 후우….”

요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핏줄기가 새롭게 턱으로 흘렀다.

아리안은 무너져 가는 재앙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형태. 가짜 몸. 저 시체조차 가짜. 무엇도 남기지 못하는 가짜 삶.

그러나 저 가짜 육신이 무너지는 순간, 껍질을 잃은 초고밀도 정신이 붕괴하며 이 행성에, 어쩌면 이 차원 전체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한 점으로 응축된 막대한 질량을 중심으로 모든 질량체들이 빨려 들어가고 그 질량이 무거워질수록 중력은 강해져 결국은 이 차원 축마저 구부러트려 빨아들일 정도의 강력한 블랙홀을 만들 것이다.

재앙.

“내가 너희의 재앙은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곳의 재앙은 될 수 있었으니 예언이 아주 틀린 건 아닌 셈이군.”

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더 이상 웃음기가 없었다.

“가 버려, 꺼져.”

그가 피로한 듯이 툭 내뱉었다.

“내 최후를, 아니 이 차원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둘이 키스라도 하라구. 참 꼴리기도 하겠다. 안 그래?”

아리안은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요한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두어 발자국을 떼어 놓기도 전에 발끝이 요한이 흘린 피 웅덩이에 닿았다. 타일 바닥 위로 얇게 말라붙은 피딱지 위로 다시 새롭게 피가 흘러 고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나오는 피와 함께 육신의 생명도 꺼져 가고 있었다. 부패와 풍화가 동시에 진행되며 피부는 썩어 문드러지고 뼈는 메말라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아리안은 그 볼품없는 신체를 서글픈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묵시록이 예언한 재앙이었다. 아직 온 적 없는 재앙이자 오로지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재앙이었다. 예언이 요한을 만들었고 예언이 칼릴을 이곳으로 보냈으며, 결국 예언이 이 재앙을 불러왔다. 예언의 희생자.

동시에 그는 이 차원에 어두운 그림자를 불러온 장본인이었다. 대지를 불모로 만들고 문명의 싹을 잘랐다. 이 땅에 꽃필 수 있었던 모든 찬란한 것들은 시들었으며 사람들은 야만의 그늘 밑에 남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는가.

예언도, 신성 재판도, 공회의 판결도, 아리안이 칼릴을 구하고자 이곳으로 달려온 것까지, 결국 모든 것이 테베의 비극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했던 것을.

아리안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요한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부서져 가는 뺨에 닿았다.

요한이 그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리안은 끝없는 두 공동(空洞) 속에서 두려움과 고통과 피로를 읽었다.

“괜찮아.”

아리안은 조용히 속삭였다.

요한의 눈이 커졌다.

손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반짝이는 빛이 일었다. 거대한 정신체를 이루던 오염된 입자가 그 중심핵에서 부스러지듯 떨어지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요한이 엉겁결에 아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리안은 그 손을 피하지 않고 마주 잡아 주었다. 요한의 눈이 커졌다.

“너, 설마, 권능이….”

맞잡은 손가락이 천천히 흐트러졌다.

정신체를 구성하던 암흑물질이 정화되며 산산이 분해된 쿼크가 위로 솟아올랐다.

“아리안.”

그가 불안한 듯이 아리안을 불렀다. 아리안은 그 부름에 답하듯 분해되는 손가락 사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 강하게 움켜잡았다. 요한의 눈이 흔들렸다. 그 눈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며 마지막이었다.

아리안은 그를 향해 속삭였다.

“이제 넌 가짜가 아닌 진짜를 갖게 될 거야.”

네 이름으로 된 성단을, 빛나는 별들로 이루어진 별자리를.

동시에 폭발하듯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파살리아 전체를 뒤덮고, 이 대륙, 이 행성, 이 은하, 어쩌면 이 차원 밖에서까지도 관측될 초신성 폭발이었다.

빛이 잦아들었을 때 그곳에는 이제 반짝거리는 빛 가루만이 허공에 남아 부유하고 있었다.

아리안은 잠시 그 궤적을 눈으로 좇다가 시선을 돌렸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홀 반대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핏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치형 천장을 가진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를 나아갈수록 핏자국은 조금씩 줄어들어 점점이 떨어진 흔적만이 남았다. 통로는 여러 번 꺾인 끝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바뀌었다.

계단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리안은 계단 첫 단에 멈춰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 계단을 알았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칼릴이 그를 구했고, 그가 다시 칼릴을 위해 스스로를 찔렀던, 바로 그 석실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아리안은 천천히 계단 밑으로 한 발자국 내려놓았다.

그의 발이 닿은 곳에서부터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그가 남긴 발자취가 환하게 반짝거렸다. 낡은 돌 타일 틈으로 새싹이 움터 올랐다. 푸른 잎사귀가 솟구치고 삽시간에 꽃망울이 터졌다.

아리안의 손끝에서부터 진흙 껍데기가 조금씩 부스러져 떨어지고 찬란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본능적인 깨달음이 떠올랐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필멸도, 이 진흙 신체도.

걸음이 점점 빨라져 어느 순간 그는 달음박질쳐 계단을 뛰쳐 내려가고 있었다. 더 이상 계단은 어둡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솟아오른 광휘가 사방을 눈부시게 밝혔다.

활짝 열린 석실 문이 보였다. 아리안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칼릴이 있었다.

내가 왔어, 아리안은 그렇게 말하려고 하였으나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히 목이 메어서인지 아니면 메데이아의 금제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석실 한가운데,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칼릴의 등은 미동 없이 꿋꿋하기만 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아리안의 몸에서 진흙 껍질이 떨어져 내렸다. 껍질이 떨어져 나간 피부에서 찬란한 빛이 떠오르고 발뒤꿈치로 빛의 궤적이 길게 남았다.

마침내 아리안은 칼릴 앞에 도달했다.

그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를 살리고자 스스로의 심장을 찌른 차원 마수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칼릴의 얼굴은 평소처럼 고요했다. 검이 그의 심장을 찌를 때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의 손은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으며 그 칼날은 그의 가슴팍을 깊숙하게 찌르고 있었다.

아리안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칼릴의 가슴팍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칼릴의 손에 닿았다. 손가락에 힘을 와락 주어 그 차가운 손등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칼자루를 세게 부여잡았다.

“괜찮아.”

아리안은 칼릴이 듣기를 바라면서 속삭였다.

“내가 구해 줄게.”

이번에야말로.

칼날이 서서히 거꾸로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아리안의 몸에서 허물이 떨어지듯 남은 진흙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허물은 회오리치는 빛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삽시간에 스러졌다. 바닥에서 백합이 피어오르고 황금빛 휘광이 석실을 휘몰아쳤다.

상처 틈으로 뽑혀 나오는 칼날이 빠르게 분해되며 허공으로 흐트러져 갔다. 그 마지막 일 센티미터가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자루만 남은 단검이 밑으로 쿵 떨어졌다.

이제 그들은 휘몰아치는 백합 꽃잎과 빛 가루 소용돌이의 가운데에 있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한데 뒤섞여 흩날리고 거기에 꽃잎이 뒤섞였다. 온 사방이 부서지고 흔들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리안은 손가락으로 차원 마수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반듯한 미간과 눈꺼풀, 콧날과 입술 아래까지. 부드럽게 떨리는 아름다운 금빛 속눈썹을.

그 아래로 푸른 눈이 드러났다.

아리안은 그 눈을 바라보았다.

예언, 심판, 재앙, 여러 가지 해야 하는 말이 있었는데 이 순간 아리안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이제….”

그는 칼릴을 내려다보면서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마지막 말을 고백했다.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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