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린트부름이 아리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리안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린트부름이 한쪽 눈썹을 추어올리고서 미심쩍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날 살린 건 재앙이 아니야. 날 살린 건….”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안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털썩, 철퍽, 느릿하게 슬리퍼를 끄는 발소리. 메데이아였다.
아리안은 다급하게 다시 린트부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난 파살리아에 가야 해.”
“설마 나한테 도와 달라는 건 아니겠지?”
린트부름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은 순간, 거의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리안.”
메데이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모자 달린 녹색 우단 장의를 입고 한쪽 손에는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에 매달려 있었으며 눈은 차분한 빛깔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어서 이리 와.”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다가왔다.
“시간이 별로 없어.”
아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가 다가온 만큼 뒷걸음질 쳤다. 그걸 눈치챈 메데이아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녀가 피로한 듯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하아, 아리안. 곧 성전이 끝날 거야 그때 여기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돌아가자구.”
“돌아가다니, 어디로?”
“어디겠어?”
메데이아가 혀를 찼다.
아리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린트부름이 서 있던 창가는 텅 비어 있었다. 다시 메데이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메데이아는 피로와 짜증과 약간의 흥분이 모두 한데 엉킨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안은 그 얼굴을 보고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칼릴은 어쩌고?”
“아.”
메데이아가 기어이 눈을 내리깔았다. 팔짱을 낀 그녀의 흰 손가락이 팔뚝을 차례대로 천천히 두드렸다.
“칼릴. 칼릴. 칼릴. 정말 지긋지긋하군.”
그녀가 눈을 천천히 뜨면서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서 뭘 하든지 그딴 차원 마수 알 게 뭐야?”
그 후에 그녀는 얼굴에서 지친 기색을 지워 내고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아리안, 이제 거의 다 됐어.”
그녀의 숨이 약간 빨라졌다.
“이제 네가 완전히 되돌아 오는 것도, 권능도, 신격도, 전부 시간문제야. 우린 아주 가깝고, 이젠 마지막 한 발자국만 남았다구.”
마지막 한 발자국.
아리안은 불길함을 애써 억눌렀다.
“마지막 한 발자국이란 게 대체….”
“사랑이지.”
메데이아의 얼굴에 갸륵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사랑. 자, 이리 와.”
그녀가 아리안에게로 성큼 다가와 팔을 잡아당겼다. 아리안은 그녀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창틀이 등에 닿았다. 메데이아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아리안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쉽게 죽음에서 되돌아 올 수는 없다. 수많은 현명한 자들이 불사의 비법을 연구했고 그보다 더 현명한 자들은 필멸을 받아들였다. 어떤 자들은 절반쯤은 성공했으나 대부분은 사술이었고 그나마도 대가를 필요로 했다. 아주 막대한 대가를.
정신이 불안정하던 칼릴이 떠올랐다.
“…칼릴에게 뭘 시켰어?”
“사랑을 증명하게 했지. 물론 내 방식대로.”
메데이아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아리안의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메데이아, 난… 네 방식을 좋아한 적 없어.”
“알아. 하지만 효율적이라는 건 부정 못 할걸.”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야.”
“아… 그거 참 안타깝군.”
메데이아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네가 바라는 대로 된 게 뭐가 있어?”
불쌍한 아리안,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삶은 언제나 네 편이 아니었지. 하지만 난 네 편이야. 그러니까 내 방식대로 네게 은혜를 갚을 거야. 원수를 갚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메데이아, 널 믿어. 네가 나에게 해 준 일도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하지만.”
메데이아가 그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내 방식은 원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거겠지. 뭐어. 그래. 넌 칼릴을 사랑하니까.”
이제 아리안은 메데이아가 칼릴에게 뭘 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권능을 되찾으려면 칼릴을 찌르라던 그녀의 말. 그리고 그녀는 칼릴에게도 같은 것을 제안했으리라. 이번에는 반대로.
아리안은 슬픈 눈으로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아리안. 이리 와. 우린 이제 이 차원을 떠날 거야.”
메데이아가 강압적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메데이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리안!”
“린트부름!”
둘이 거의 동시에 소리 질렀다.
“날 파살리아로 데려다 줘!”
“안 돼! 씨발, 너, 지렁이 놈, 감히 그러기만….”
아리안의 등 뒤에 닿은 창문 벽이 반대편으로 서서히 기울어지면서 천장이 밑으로 떨어지고 대신 바닥이 올라왔다. 벽들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반대편 천장에서 린트부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이고. 높으신 분들 싸움에 끼는 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아리안은 창틀에 등을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이쪽이 이기는 것에 걸었다고 했지. 네가 이기도록 도와줄게.”
“흠.”
거꾸로 선 차원 마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거라면 안 도와줄 수 없지.”
먼 곳에서 메데이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트부름이 가볍게 양팔을 벌리면서 손가락을 쫙 폈다. 축과 축이 겹치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아리안이 기댄 창틀 벽이 끝없이 어디론가 떨어졌다.
눈앞에서 린트부름이 속삭였다.
“행운을 빌어, 헬레네.”
***
성 한가운데에는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황금으로 장식된 회랑 기둥 사이사이마다 비단 베일이 장식되어 있었으며 그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춤추는 그림자들이 빙글빙글 회전할 때마다 보석들이 달그락거리고 거기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번쩍거렸다.
여기저기서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신관이 왔어.”
“언제 돌아왔지?”
“파살리아를 버리지 않았어.”
“폐하를 뵈러 왔나?”
“그렇겠지.”
의미 없는 작은 속삭임들이 기둥 사이, 벽 뒤, 드리워진 비단 베일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리안은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복도를 나아갔다.
시선들이 데굴데굴 아리안의 걸음을 따라왔다.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양쪽 벽에 걸린 황금 램프가 하나씩 켜졌다가 다시 꺼지기를 반복했다. 긴 복도 끝에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 둘과 아름답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시녀 둘이 짝을 지어 서 있었고 그 가운데로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아리안이 다가오자 그들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시녀들이 아리안을 향해 눈웃음치면서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기사들이 입은 갑옷이 번쩍거렸다. 시녀들이 비단 장갑을 낀 손으로 알현실 안쪽을 가리켜 보였다.
문 너머는 어둑하게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안에서는 사향과 자작나무를 태우는 향기가 났고 비단 자락이 바닥을 쓰는 사각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낮게 웃는 소리, 술잔이나 그릇들이 조금씩 부딪치는 달그락대는 소리, 그런 것들이 한데 섞여서 흘러나왔다.
아리안은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들여놓았다.
동시에 등 뒤에서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아리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한 가운데, 바닥에는 향료를 태운 연기가 낮게 깔려 있었고 금박을 입힌 타일 벽 한쪽에는 커다란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둘러앉은 귀족들이 카드를 섞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공작새 꼬리를 머리에 매단 시종들이 돌아다니면서 술과 음식을 날랐으며 쿠션이 산더미처럼 쌓인 소파들 사이에서 옷을 반쯤 헐벗은 젊은 남녀가 뒤엉켜 있었다. 웃음소리와 신음 소리, 부드럽게 이어지는 달착지근한 음악소리.
발에 누군가의 옷이 걸렸다. 가면 쓴 시종들이 아리안 앞을 가로막으면서 술과 약을 권했다. 아리안은 그들을 밀었다. 사람들이 파도처럼 갈라졌다.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어둡고 넓은 홀 가운데 둥근 대리석 탁자가 놓여 있었다.
요한이 거기 있었다.
그는 가장 중앙 자리에 앉아 낄낄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카드를 돌리고 있었다. 그의 좌우로 뒤섞여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따금씩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난쟁이 광대가 그들 틈을 기웃거리면서 농담을 던지거나 또는 공을 던졌다. 술취한 여자 한 명이 술잔을 슬그머니 집어 가려는 광대를 향해 비둘기 다리를 던졌다. 와하하하하! 사람들이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이 손에 쥐고 있던 카드 패를 내던지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이게 누구야!”
뒤에서 광대가 요란스레 박수를 쳤다. 동시에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이 우레처럼 박수쳤다.
“우리 신관 아닌가!”
요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홀을 울렸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솟아올라 홀 전체를 뒤덮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쾅쾅쾅쾅 메아리쳤다.
“죽고 싶어서 여기까지 행차하셨나!”
갑작스레 아리안의 발밑이 불타올랐다. 어둠이 바닥을 가리고 그 위로 불길이 이글이글 솟았다.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발 구르는 소리, 박수 치는 소리, 그 사이로 요란스러운 나팔 소리가 이어졌다. 음악이 날카롭게 높아졌다.
암흑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 너머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신관의 목을 잘라!”
“팔다리를 묶어!”
“철의 소녀에 넣자!”
“불에 태워!”
아리안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건 전부 가짜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높은 곳에 선 요한이 비릿한 미소를 띠고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아리안을 가리켰다.
“신관을 잡아라!”
그와 아리안 사이에 갑자기 구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형틀이 솟아올랐다. 양옆으로 두건을 쓴 고문관들이 걸어 들어왔다. 사방이 끔찍한 고문 도구들로 가득했다. 처절한 비명이 홀을 메웠다. 살려 줘! 그만둬! 아파! 고통에 찬 애원과 신음이 이어졌다. 바닥에 질퍽거리는 핏물이 차오르고 그 위를 고문관들이 걸어와 아리안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들이 아리안을 질질 끌었다. 핏물은 점점 높게 차올라 이제 무릎까지 출렁였다.
눈앞에 거대한 철의 소녀가 나타났다. 무표정한 금속 얼굴 위, 소녀의 눈알이 희번덕 굴러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끼이익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빼곡하게 가시가 솟은 소녀의 뱃속이 드러났다. 고문관들이 아리안을 그 앞으로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