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25)화 (125/130)

#125

“하아, 하아, 하아….”

거친 호흡이 이어질 때마다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러넘쳤다. 지크프리트의 전신을 칼날이 빼곡하게 꿰뚫고 있었다. 몇 자루는 그의 폐와 가슴을 뚫었고 몇몇은 버티어 선 그의 허벅다리를, 그리고 팔과 어깨를 꿰뚫어 바닥에 꽂아 놓은 상태였다.

피로 흠뻑 젖은 대지에서는 맑은 물이 흘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수선화 파도가 물결쳤다.

지크프리트는 한쪽 팔을 천천히 움직였다. 팔꿈치와 팔뚝 정중앙을 꿰뚫은 칼날이 바닥에서 우지끈 흔들리며 빠져 나왔다. 그는 그 손으로 반대편 어깨와 팔에 꽂힌 칼을 느리게 잡아 뽑았다. 근육과 뼈를 가른 칼날이 뽑혀 나가며 피가 왈칵 쏟아졌다.

사방이 점점 밝아졌다.

마지막으로 목을 절반쯤 가른 칼날을 양손으로 단번에 뽑았다. 쨍강, 뽑아낸 칼날이 밑으로 떨어졌다. 갈라진 살과 뼈가 으적으적 달라붙으면서 지크프리트의 전신을 번뜩이는 광채가 휘감았다.

“하아, 하아, 하, 하아, 하아….”

고통과 분노에 찬 호흡이 간헐적으로 이어지면서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깟… 조잡한… 차원에….”

쩌적쩌적 마치 껍데기가 갈라지듯이 어두운 천체에 금이 가고 그 부스러기가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갈라진 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쪼개진 유리 조각 같은 성간물질 파편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리고 모든것이 산산히 부서져 흐트러졌다.

새파란 하늘이 밑에서 위로 솟아올랐다. 정연히 줄지어 선 태양이 드러났다. 이른 오전의 뜨거운 햇살이 지면을 훑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핏발 선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무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멀리 굳건히 이어진 도르센 성벽이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반대편에는 아슬랭 군대가 보였다. 하늘은 청명했으며 비구름 조각 몇 가닥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핏방울이 느리게 흘렀다. 손등을 흐른 핏방울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메마른 지면이 축축하게 젖어 들며 맑은 물이 부글부글 솟다가 잠잠해졌다.

지크프리트는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그의 곁에 마찬가지로 피에 젖은 신마가 천천히 흐릿한 형태를 드러냈다. 그는 신마 위로 올라탔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상공을 덮고 있던 결계는 이제 흔적도 없었으며 그것은 더 이상 차원 마수의 발을 이곳에 묶어 두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건조한 시선이 지면을 한 번 훑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쓰러진 인간 기사가 보였다.

지크프리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인간을 방패로 삼아서까지 도르센을 빠져나간 차원 마수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뻔한 질문이었다.

아슬랭 진영으로 돌아오자 아덴이 허겁지겁 그를 향해 달려왔다. 모두가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보고 말문을 잃었다.

“어, 어떻게….”

지크프리트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이젠 당신들 싸움입니다.”

그는 아덴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차원 마수가 여기 없으니 나도 더는 싸울 이유가 없죠.”

누군가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외쳤다. 그러나 아덴은 도리어 아무 말도 없었다. 지크프리트는 아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이 예언한 이 차원의 영웅.

“태초에 재앙이 이 땅에 그림자를 불러들였고 모든 것을 불모로 만들었습니다. 당신들이 이룩할 수 있었던 모든 찬란한 것들은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었고 오로지 야만만이 남았죠.”

아덴의 눈은 지크프리트를 바라보는 대신 밑으로 내려가 그의 발치에 피가 떨어지고 그 핏방울 위로 피어오르는 수선화를 바라보았다.

“신의 일은 신에게,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마수를 놓친 건 내 실책이지만 다른 건 당신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 말을 남긴 지크프리트는 말을 몰아 아덴을 지나쳤다.

***

아리안은 차원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낮은 곳에서 번개가 쳤고 천둥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길게 이어진 성벽이 보였다. 요새는 고요했다. 하늘은 푸르렀으나 사방은 기이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성벽 너머 황무지, 3차원 시야로는 볼 수 없는 차원의 갈라진 틈이 더욱 벌어지며 성간물질이 그 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르릉, 쿠웅, 무언가가 강제로 차원 축을 비틀어 찢는 소리. 인간의 것이 아닌 전쟁의 소리였다.

아리안은 창틀을 꽉 움켜쥐었다.

‘칼릴.’

불길함과 초조함이 그를 에워쌌다. 아리안은 곧장 몸을 돌려 칼릴의 방으로 향했다. 그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요새는 고요했다.

칼릴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턱 끝까지 숨이 차 헐떡거리고 있었다.

문 안쪽은 요새의 다른 곳처럼 조용했다. 아리안은 주위를 살피다가 잽싸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비어 있었다. 짧은 복도와 집무실, 안쪽 침실과 내실 전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리안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칼릴이 남겼을, 또는 남겼을지도 모르는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뒤 그는 망연자실하게 멈춰 섰다.

이 방은 오랫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침대마저 사용한 흔적이 없었고 시트에는 주름 하나 남아 있지 않았으며 약간의 먼지만이 베갯잇 사이에 내려앉아 있었다.

설마 아직 병영에 머물고 있을까?

며칠 전 격렬한 전투에서 칼릴이 입었던 상처를 생각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리안이 몸을 휙 돌려 밖으로 뛰쳐 나가려던 순간,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호들갑 떨듯이 요란스러운 목소리였다. 아리안의 발이 멎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호사스러운 차림을 한 땅딸막한 남자가 창가, 아리안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다.

남자는 허리에 에메랄드와 황금으로 장식된 홀을 찼고 양손의 손가락에는 퉁퉁하게 살이 올라 있었으며 금강석이 박힌 허리띠를 둘렀다. 이곳 도르센에서는 어색하게마저 느껴지는 호화로운 차림이었다.

‘누구지?’

모르는 자였다.

아리안의 얼굴에 떠오른 경계를 알아차렸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아리안을 향해 싱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양팔을 벌렸다.

“안녕, 헬레네. 그렇잖아도 만나 보고 싶었어.”

아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어.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 드릴까? 높은 분이시여. 어떤 이름을 선호하시는지?”

그러면서 그가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그제야 아리안은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 자는 칼릴과 같은 차원 마수였다. 다차원 생물종. 세상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축(軸)을 뛰어넘어 다니는 위험천만한 짐승.

남자가 구부렸던 허리를 빠르게 폈다.

“우리 초면이지? 자기소개부터 할까? 물론 난 널 잘 알지만….”

“린트부름.”

아리안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자의 눈꺼풀이 약간 들려 올라갔다.

“오… 아니. 너희 높은 자들에게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꽤 오랜만인데….”

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다가 어깨를 한 번 쑥 올렸다 내렸다.

“물론 그 이름을 싫어한다는 건 아냐. 오히려 그쪽이 낫지. 그냥 의외였을 뿐이야. 뭐, 알다시피 너흰 내 이름에 벌레를 넣어 부르는 걸 더 좋아하니까….”

그 뒤에 그는 부산스러운 동작으로 아리안에게 다가왔다. 발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고서는 얼굴을 쑥 들이밀어 아리안을 향해 씩 미소 지어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높은 분이시여. 칼릴이 널 되살리려고 온갖 개지랄을 떨었는데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걸 봐서 정말 기뻐.”

그 후에 그가 뒤로 휙 몸을 돌렸다.

“칼릴은 그래서 파살리아로 간 거야? 널 되살렸으니 이제 놈하고 끝장을 보려고?”

아리안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파살리아에 갔다고?’

그 와중에 린트부름은 양팔을 느슨하게 벌리고서는 떠벌떠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네가 칼릴에게 말 좀 잘해 봐. 정신 좀 차리라고 해. 전쟁은 아직 안 끝났잖아. 난 이쪽이 이기는 편에 걸었단 말이지.”

그가 한쪽 발을 들고 반대편 발로 춤을 추듯 유연하게 빙그르르 돌아 아리안을 향했다. 딱, 굽이 붙은 그의 신발이 타일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이번에는 이겨야지. 또 트로이 꼴 나는 건 우습잖아. 응?”

날개 없는 용이 히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도 공회랑 척지고 여기 온 거 아냐?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잘해 보자구. 물론… 난… 너희 같은 사람들하고 별로 안 친하긴 하지만 말야.”

솔로몬, 키르케, 메데이아… 린트부름이 이름을 줄줄 읊었다.

“아무튼. 공회 놈들이 이제 와서 널 봐줄 것 같아? 끽해야 팔 부러져라 영원히 접시나 들고 칼릴 얼굴에 떨어지는 독이나 받는 처지1)가 되겠지. 안 그래?”

린트부름이 혀를 내밀면서 우웩,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리안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칼릴이 파살리아에 갔어?”

그 순간 린트부름의 표정이 변했다. 남자의 얼굴에 찔끔한 표정이 떠올랐다. 두 눈동자가 사방으로 구르면서 흰자가 번들대더니 시선이 슬그머니 옆으로 향했다.

“아니. 뭐어. 백 퍼센트 확실하게 파살리아에 갔다는 건 아니고. 간 것 같다고. 도르센에서 안 보이길래. 그냥 내 추측이야, 추측. 알지?”

두 눈동자가 슬금슬금 창밖을 향했다.

“결계를 깼길래 난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구. 생각해 보면 네가 여기 있는데 그 녀석이 자리를 비울 리가 없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그나저나 엄청 멀쩡해 보이네.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칼릴이 널 되살리려고 꽤나 이것저것 신경을 쓴 것 같던데… 무슨 비법을 썼는지는 말 안 해 주겠지, 당연히?”

명백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눈치였다. 불길함이 더 강해졌다.

아리안은 가슴팍의 옷깃을 손으로 꽉 움켜 쥐어짜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비법이라면….”

“아.”

린트부름의 얼굴도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가 관자놀이에 흥건하게 솟은 식은땀을 소맷자락으로 연신 훔쳐 내면서 주절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넌, 넌 죽었었잖아.”

아이고! 말해 버렸네! 그가 혀를 깨물면서 제자리에서 펄떡펄떡 뛰었다.

“제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하진 말아 주라! 제발!”

“아냐. 그렇진 않아. 그건 알고 있었어. 단지, 칼릴이 파살리아에 간 건 파살리아에….”

“어, 뭐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아는 ‘그게’ 있지.”

린트부름이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예언에도 나온 그거 말야. A로 시작하는 그거….”

그 순간 메데이아가 했던 말이 아리안의 뇌리에 떠올랐다.

‘네가 죽어서 그 차원 마수는 미쳐 버렸어. 네 시체를 끌어안고 재앙에게 가서 널 살려 달라고 빌었지.’

“아니야.”

아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각주]

1) 유럽 신화 속 신 로키는 영원히 뱀 두 마리의 독액이 얼굴로 떨어지는 형벌을 받는데, 그의 아내 시긴이 그릇을 들고 남편의 얼굴에 떨어지는 뱀의 독을 받아낸다. 하지만 그릇이 꽉 차 버리러 갈 때마다 독액이 로키의 얼굴로 떨어져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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