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그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이 쏘아진 화살처럼 폭발적으로 튕겨 나갔다. 허공에 마치 비행운처럼 길고 반짝거리는 빛의 흔적이 남았다.
불을 뿜는 기수 무리는 아슬랭 군대의 남서쪽 완만한 구릉을 따라 진격해 오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망설임 없이 그 정면을 향해 돌진했다.
기수 무리가 달리는 궤적마다 불꽃과 연기가 뒤섞여 허공에서 너울거렸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는 말고삐를 왼쪽으로 잡아당겨 방향을 틀었다. 신마는 질퍽질퍽한 토사가 흘러내리는 반 늪지대 위를 날듯이 가로질렀다. 바닥에는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고 대신 아른거리는 빛 가루가 흩뿌려졌다.
그는 불길 자취를 남기며 달리는 기수 무리의 한중간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오른손이 쥔 그람이 마치 한 몸처럼 달리는 기수 무리의 허리를 베었다. 거대한 칼날이 빛으로 된 궤적을 남기며 횡으로 허공을 갈랐다. 두 기수의 몸뚱이가 갈라지며 상반신은 허공으로, 하반신은 그대로 달려 나가다가 밑으로 떨어졌다. 피는 없었다. 대신 거무튀튀한 연기가 갈라진 단면에서 피어오르며 습기찬 유황 냄새가 확 피어올랐다. 기름과 유황으로 만든 가짜 인형.
지크프리트의 미간에 얇은 주름이 졌다.
반으로 갈라진 기수 무리가 두 방향으로 나뉘어 달리기 시작했다.
“흥, 조잡한 짓거리를!”
혀를 한 번 찬 그가 말에 거듭 박차를 가했다. 동시의 그의 오른쪽 어깨 위로 빛 덩어리가 뭉치더니 앞뒤로 주욱 늘어났고, 지크프리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 빛의 기둥 한중간을 움켜잡아 달리는 기수들의 등을 향해 내리꽂았다.
빛의 기둥이 지면 위를 쇄도했다. 단번에 기수 셋이 기둥에 꿰뚫려 산화했다. 옆에서 달리던 둘도 사방으로 튄 빛 파편에 꿰뚫려 바닥을 구르다 갈기갈기 찢겨 사라졌다.
지크프리트는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돌려 날듯이 말을 달렸다. 남은 다섯도 순식간이었다.
마지막 하나가 말을 세웠다. 헐떡거리는 군마의 입에서 피 냄새 섞인 불꽃이 흘러 떨어졌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죠.”
지크프리트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던졌다.
“쪽팔리지도 않아요? 그쪽 정도 되는 작자가 이런 장난질이나….”
그때 지크프리트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그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넌….”
칼릴이 아닌, 인간이었다.
말과 기수를 두른 마법 껍데기가 벗겨지며 불꽃은 사그라들고 잿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빗줄기가 그 위로 쏟아졌다.
지크프리트의 눈에 번뜩 빛이 돌았다. 그가 번개같이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아슬랭 군대에서 꽤 멀리까지 떨어져 있었다. 으드득 어금니 사이로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처음부터 지크프리트를 인간의 군대에서 떨어트려 놓기 위한 수작질이었다. 그렇다면 칼릴은 어디에 있지?
지크프리트가 주위를 둘러본 순간, 지평선 아래에서부터 거대한 태양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찬란한 여명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그것은 달 표면에서 바라보는 떠오르는 지구 같았다. 지평선을 가득 채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함께 그 뒤를 이어 두번째 태양이 솟았다.
먼저 떠오른 첫 번째 태양이 지면 위를 미끄러지며 밑으로 강렬한 빛을 뿌렸다. 눈이 찢어질 듯한 빛줄기가 대지를 사각 없이 훑었다. 연이어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들이 줄지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지평선이 둥그스름하게 휘었다. 지축과 차원 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하늘이 밑으로 내려앉고 지크프리트가 딛고 선 바닥이 사방으로 끝없이 확장되며 공간 감각이 사라진다.
지크프리트는 이것을 잘 알았다.
공격이었다.
그는 칫, 하고 혀를 차며 재빨리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발굽 아래로 구름과 광휘가 같이 일었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일그러지며 그 사이로부터 빛줄기 같은 거대한 칼날이 먹구름을 찢고 낙하했다.
구구구구구궁! 빈틈없는 칼날들의 비가 쏟아졌다. 사방으로 빛을 뿌리는 예리한 칼날들이 지크프리트의 뒤를 아슬아슬하게 쫓았다. 칼날이 내리꽂히는 곳마다 차원이 찢겨 나갔다.
어느 순간 지크프리트는 쩌엉, 하고 거대한 유리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제길…!”
차원 마수의 발을 묶는 결계 표면이 쪼개지는 소리였다. 그극, 그그극, 유리를 긁는 듯한 불유쾌한 파열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터질 듯이 가득 메운 태양들이 일순간 강렬한 빛을 뿜었다.
지크프리트는 말고삐를 당겨 멈춰 섰다.
서서히 빛줄기가 사그라들었다. 마치 몇 배속으로 재생시키는 영상처럼 지평선 밑으로 태양들이 떨어졌다.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았다. 태양이 떨어진 곳에서부터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었다. 이제 주위는 빛 한 점 없는 암흑이었다.
소년 기사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악문 어금니 사이로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더 이상 그가 밟고 섰던 땅이 아니었으며 그 차원도 아니었다. 지금 그는 차원 마수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지크프리트는 소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으나 지크프리트는 그것이 거기 서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을 노리고 칼날이 튀어나왔다. 예리한 공격. 그러나 칼릴은 아니었다.
지크프리트가 머리를 옆으로 꺾어 그 공격을 피한 것과 동시에 상공에서 수백 개의 칼날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그람을 크게 휘둘러 그 칼날들을 어렵지 않게 되쳐 냈다. 칼날들이 부러지고 으스러지는 파열음이 어둠을 찢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람을 쥔 채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그람만이 빛나는 광채를 뿌리고 있었고 그것을 제외하면 사방은 바닥과 천장을 구분할 수 없게 어두웠으며 아무 소리도 없이 적막했다.
먼 곳에서 스윽 하고 희끄무레한 형체가 떠올랐다. 그것이 천천히 지크프리트를 향해 가까워졌다. 덩어리로 이루어진 형체감이 어느 정도 뚜렷해졌을 때 지크프리트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경장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 인간이었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괜한 짓 하지 말아요. 쓸데없이 여기 인간을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는 일단 경고했다. 인간과 싸우는 것은 그다지 흥미로운 일도, 바라는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여긴 차원 마수의 영역이었으므로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랐다.
대답 대신 눈앞의 기사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형체가 다시금 스르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허공 좌측에서 칼날이 떨어지듯이 찔러 내려왔다.
“칫!”
지크프리트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그람 손잡이로 그 공격을 받아쳤다. 칼날이 진동하며 우우우웅 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쉴 틈 없이 연격이 쏟아졌다. 동시에 마치 파도치듯이 바닥이 요동쳤다. 말발굽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신마가 휘청거리고 지크프리트의 몸이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좌우에서 소리도 형태도 없는 칼날이 동시에 찔러 들어왔다. 지크프리트는 몸이 기울어진 상태 그대로 말에서 뛰어내려 그것을 피하는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해 그람을 찔러 넣었다. 예리한 검 끝이 차원 틈을 파고들며 쩌저적 세상이 찢어졌다.
그걸 막으려는 듯이 인간 기사가 정확히 지크프리트의 미간을 노리고 칼을 찔러 왔다.
“쓸데없는 짓을!”
지크프리트가 이를 갈며 그것을 쳐 낸 순간 중력이 그의 한쪽 발을 낚아챘다. 왼발이 바닥 밑으로 움푹 파고들었다. 발밑이 바닥없는 늪이 되어 그를 잡아당겼다. 그와 함께 엄청난 압력이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공격이 날아왔고, 지크프리트는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칼날이 그의 뺨을 찢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지크프리트는 두 번째 공격을 피하는 대신 손을 뻗어 검을 움켜잡았다. 장갑을 낀 손바닥에서 피가 밑으로 흘러 떨어지며 수증기와 광채가 함께 피어오르고 갈라진 바닥 틈에서 맑은 물이 솟구쳤다. 수선화가 불쑥 머리를 들었고 그 위로 계속해서 피가 떨어졌다. 삽시간에 만개한 수선화 무리가 연달아 꽃봉오리를 터트리고 밑에서는 빛나는 물이 흐르며 개천을 만들었다.
“하…!”
움켜잡은 칼날 끝에서 경악에 찬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지크프리트는 칼을 움켜잡은 채로 그곳을 노려보았다.
“무익한 짓은 이제 관둬요. 이런 말은 싫어하지만… 감히 신에게 대적하고 있다는 거 압니까?”
맞은편의 숨소리가 점차 차분해졌다. 그러더니 멈췄다.
지크프리트가 움켜잡은 칼날이 뒤로 쑥 빠져나가더니 다시 강하게 찔러 왔다.
“큿!”
지크프리트는 그대로 상체를 뒤로 꺾어 공격을 피했다. 여전히 한쪽 발이 차원 틈에 끼어 있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여긴 차원 마수의 영역이었으므로 모든 것이 그에게 불리했다. 반면에 상대는 비록 인간이지만 칼릴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신도 피를 흘리는군.”
인간 기사가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쾌활했으나 크게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거기서 어떤 종류의 광신을 읽었다. 잠시의 침묵 뒤에 상대가 다시 말했다.
“하긴. 그때도 그랬지. 그땐 백합이었지만.”
백합이라고?
지크프리트가 의아함에 미간을 좁힌 순간, 숨 돌릴 틈도 없이 공격이 쏟아졌다.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고 공격을 쳐 내면서 오른발에 힘을 주어 바닥에 박힌 왼발을 천천히 빼냈다. 차원 틈이 쪼개져 나가면서 그 날카로운 단면에 걸린 발목에 다차원 상처가 남았다. 피가 서서히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반짝거리는 광채가 퍼져 나가면서 사방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콰직! 차원 경계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왼발이 쑥 뽑혀 나왔다. 동시에 그는 발바닥에 힘을 주어 위로 뛰어올랐다. 그람이 좌우로 커다랗게 허공을 베었다. 경계가 갈라지며 쪼개진 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차원이 다시 닫히며 그 빛은 금방 사라졌다.
적어도 칼릴이 이 근처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급조된 차원 결계는 충분히 견고하지 못하다.
지크프리트가 다시 그람을 휘두르려는 순간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 검이 찔러 들어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서 그 공격을 어슷하게 튕겨 막아 냈다. 그그그극 검날이 서로 스치면서 불똥이 튀고 그대로 칼자루를 쥔 주먹이 지크프리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머리가 돌아가면서 생소한 고통이 그의 두뇌를 강타했다. 코피가 발치로 주르르 흘러 떨어졌다. 머리를 든 수선화 새싹 위를 비틀거리는 발이 짓밟았다.
“감히….”
지크프리트의 눈이 분노로 번들거린 순간 머리 위에서 수천만 개의 칼날이 아래를 향해 낙하했다.
먼 어둠 속에서 마른번개가 쳤다. 꽃으로 된 파도가 물결치면서 그윽한 향기가 솟았다. 지면은 황금빛으로 번쩍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