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23)화 (123/130)

#123

재앙의 금단약조차 이제 이 죽은 거죽에 생명의 불꽃을 지피지 못했다. 피부 밑으로 살이 수분을 잃고 움푹해졌으며 얇은 가죽 아래는 뼈마디가 선명했다. 부패가 시작된 손발 끝은 보라색이었고 손톱 발톱은 떨어질 듯이 덜렁거렸다.

칼릴은 핏발 선 눈으로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시체의 얼굴. 우묵하게 패인 눈두덩이 아래 살가죽이 너덜거렸다. 입술은 안쪽으로 말려 쪼글거렸다. 칼릴은 그 입술에서 이전 아리안을 애써 겹쳤다. 생기 넘치던 눈동자를, 감히 입맞춤을 바라며 상기되었던 뺨을.

그는 아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 뼈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은 가죽 밑에 겨우 붙어 덜렁거렸다. 그는 온기를 되살리려는 듯이 그 앙상한 손을 한참 동안 문지르고 주물렀다. 물론 어떤 변화도 없었다.

어느 순간 칼릴은 벌떡 일어섰다. 혈관이 터진 눈동자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성큼성큼 방을 벗어났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혔다. 쿵, 쿵, 쿵, 쿵, 수만 개의 문이 차례대로 닫히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그 문소리가 뚝 끊어졌다. 칼릴은 이제 천장이 둥근 아치 형태로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홀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창가에 선 메데이아의 등이 보였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치 칼릴이 여기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나 당황스러움의 기색은 없었다.

“오, 안녕, 칼릴. 무슨 일이야? 이번 전투가 제법 힘겨웠다면서? 설마 도와 달라는 건 아닐 테고…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너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 정도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아?”

“뭘 꾸미는 거냐.”

칼릴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차원 마수의 얼굴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메데이아는 기쁜 듯이 그 얼굴을 훑어보았다.

“네가 오고부터 더 이상 약이 듣지 않아. 아리안이… 아리안의 시체가… 부패하고 있어. 무슨 짓을 했지?”

“이런. 지금 시체가 부패하는 이유를 나한테 묻는 거야? 사과가 떨어지듯 당연한 일에 무슨 설명을 바라는데? 과학 수업이라도 해 줄까?”

“말장난은 집어치워.”

메데이아가 낮게 킬킬거렸다.

“칼릴. 칼릴. 바보 같은 남자. 그건 껍데기에 불과해. 아리안은 이미 거기 없어. 재앙이 네게 무슨 약을 줬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미 신성을 잃은 지 오래된 겉가죽에 무슨 짓을 한들 그걸 부활시킬 수 있겠어? 뭐어. 작은 꼭두각시 주술이라면 모를까. 그런 거라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겠는데, 어때?”

“…….”

칼릴은 대답하지 않고 건조한 눈으로 메데이아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난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 껍데기에 불과하다면 넌 왜 여기에 있지?”

그 질문에 이번에는 메데이아가 입을 다물었다.

칼릴이 말을 이었다.

“널 알아, 콜키스의 마녀. 넌 결코 목적 없이 움직이지 않지. 뭘 원하나? 아리안의 복수?”

“하. 복수! 물론 내가 그걸 좋아하긴 하지.”

메데이아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틀렸어. 조금 더 생각해 봐.”

침묵이 둘 사이를 제법 오랫동안 흘렀다. 한참 뒤, 칼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아리안을 살릴 수 있군.”

메데이아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밑으로 떨어졌다.

“네가 언제 그 말을 하나 했어.”

그녀의 등 뒤, 창밖으로 마른번개가 밤하늘을 찢었다. 우레 소리가 지면을 뒤흔들었다. 툭, 툭, 툭, 굵은 빗방울이 창틀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방법을 말해.”

“뻔한 거야. 설마 약물 몇 방울로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겠지.”

메데이아가 생긋 웃었다.

“목숨에는 목숨이 필요해.”

두 번째로 번개가 쳤다. 번뜩, 창밖이 밝아졌다가 삽시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그림자가 메데이아의 얼굴 위로 드리워 표정을 감췄다.

“…아리안에게 널 찌르라고 했는데, 아리안은, 그러는 대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지다가 뚝 멎었다. 그녀가 헐떡이는 것처럼 빠르게 숨을 몰아쉬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번쩍거리는 두 눈동자가 칼릴을 쏘아 보았다.

“하지만 넌 할 수 있겠지. 그렇지?”

동시에 그녀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칼릴의 발치를 향해 내던졌다. 빙그르르 바닥에서 몇 바퀴 회전한 단검이 칼릴의 발끝에서 멈췄다. 칼릴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메데이아가 생긋 웃었다.

“아리안을 되살리는 방법은 하나야. 아리안이 자길 찔렀던 곳에서 이번엔 네가 널 찔러.”

빗소리가 거세졌다.

이 폭우는 성벽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 시체의 얼굴을 씻어 낼 것이다.

이제는 메데이아의 얼굴에도 표정이 없었다. 벽에 걸린 램프의 불빛이 파도처럼 요동치면서 그녀의 콧날 아래로 춤추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빛깔 없는 입술이 속삭이는 말은 저주에 가까웠다.

“아리안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칼릴? 널 원망한다던? 아니면 그 반대로 사랑한다고 했어? 후후… 난 답을 알 것 같은데.”

그녀의 음산한 실루엣이 옆으로 기우뚱 기울어지다가 멈췄다. 비척거리는 걸음이 서서히 칼릴에게서 멀어졌다. 털썩, 털썩, 그녀가 신은 슬리퍼 끝이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그 끝에서 이어진 그림자가 들썩거렸다.

메데이아가 떠난 뒤에도 칼릴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발치에 덩그러니 놓인 차가운 단검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이번에는 시선을 비스듬히 위쪽으로 던졌다.

창문 밖으로 빗줄기가 멀리 빗금처럼 보이는 도르센 성벽 위로 뿌옇게 부서지고 있었다. 성벽 뒤로는 그의 발을 묶는 봉인 마법진이 청록색 오로라처럼 지면에 깔려 있었다. 칼릴은 그 결계를 오랫동안 노려보았다.

메데이아의 질문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리안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그녀는 답을 알 것 같다고 말했고 칼릴도 마찬가지였다.

칼릴은 아리안의 마지막 한 단어를 천천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제.”

그 뒤에 올 말들은 비참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리안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설령 살아나지 않는다 해도… 뭐. 그렇다면 그때야말로 더 이상 무슨 상관이겠는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성 전체를 울리는 빗소리는 기세가 아까보다 더 사나웠다. 이제 램프의 불빛도 흐릿했다.

밖에서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전하.”

오래된 마법사의 목소리가 석상처럼 선 칼릴의 귀에 들려왔다. 칼릴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창백한 그림자 같은 닛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칼릴을 향해 다가와 몇 걸음을 남기고 멈춰 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과 고뇌가 함께 얼룩져 있었다. 나이든 입가와 눈썹은 고목처럼 굳어 있었으나 눈동자는 어떠한 열기로 번쩍거렸다.

“어찌하여 고뇌하고 계십니까?”

그녀가 물었다.

칼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들이 선택한 왕이 전하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닛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하십시오. 그걸 위해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서야 칼릴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너희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닐 텐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전하께서 바라시는 것이 곧 저희가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는 전하의 수족과도 같은 것이 아닙니까? 손발이 어찌 머리와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팍이 약간 부풀면서 노쇠한 마법사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전하께서 바라신다면 이 도르센조차 이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칼릴의 시선이 발치에 떨어진 단검으로 향했다가 다시 올라왔다. 마법사의 눈은 칼릴을 피하지 않았다. 칼릴은 단검을 주웠다.

***

여명 직전의 새벽, 도르센 성문이 열렸다.

쇠사슬이 사나운 기세로 풀려 나가며 문이 해자 위로 떨어졌다. 쿵! 그 위로 훅, 훅, 콧김을 뿜어 대는 군마들이 일렬로 달려 나왔다. 쇠편자를 박은 말발굽이 바닥을 박찼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군마와 기수들의 위로 쏟아지며 부옇게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말들의 입과 코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이 쏟아지고 투구 너머로는 기수들의 시퍼런 안광이 번뜩거렸다.

아슬랭의 나팔수가 기습을 알리는 나팔을 길게 불었다.

지크프리트는 그의 막사에 있었다. 막사는 일반 병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단출한 것이었다. 아덴은 그에게 지휘관용 막사를 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아무튼 그는 이 군대의 지휘관도 아니었으며 그의 목적은 단지 칼릴을 잡아 죽이고 아리안의 시체를 되찾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파살리아에 있다는 재앙까지 죽일 수 있으면 좋고.

그가 적침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허름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막사 천장을 때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막사는 파도 위의 나룻배처럼 흔들렸다. 나팔 소리와 함께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손이 침대 위에 놓아둔 그람을 움켜잡는 것도 거의 동시였다.

막사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지크프리트 경!”

아덴이 막사 출입문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빗줄기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불을 뿜는 말과 기수들이 성문을 열고 나왔어. 아무래도….”

거기까지 들었을 때 지크프리트는 곧장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의 눈이 어둠 속을 꿰뚫고 지면을 훑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대지 위를 군마 열두 필이 달리고 있었다. 말들의 눈과 입에서 불꽃이 흘러 떨어지며 비가 증발해 자욱한 수증기가 일었다.

저 중 누가 차원 마수일까.

‘상관없지.’

소년의 입가로 소리 없이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다 죽여 버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몸을 돌렸다. 아덴이 막사 출입구에 망연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를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군대를 움직이지 마세요. 이건 당신들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째서 상관이 없지?”

아덴이 되물었다.

지크프리트는 대답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대답 없이 그의 앞을 지나쳤다.

지크프리트의 걸음마다 그 곁에서 투명한 덩어리가 점점 솟구쳐 올랐다. 지면으로 떨어지던 빗줄기가 투명한 형태를 따라 미끄러졌다. 후욱, 후욱, 눈에 보이지 않는 짐승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부옇게 떨어지는 촘촘한 빗발 사이로 그 짐승의 형태가 점점 뚜렷해졌다. 이제 그것은 전신에서 빛 가루를 떨어트리는 한 필의 말이 되어 지크프리트의 곁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토사가 흘러내리는 길 끝, 지크프리트는 훌쩍 애마 위로 올라탔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긋지긋한 인간의 전쟁도 이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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