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22)화 (122/130)

#122

다차원 생물종은 죽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었고, 그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발을 묶는 것이 더 쉽다. 저 봉인 결계는 그 방법 중 하나였다.

결계의 크기를 보아하건대 칼릴의 발을 묶기 위해 공회에서 제법 힘을 쓴 모양이었다. 칼릴은 짧게 조소했다. 그들 또한 그 멍청한 예언이 테베의 비극을 불러오고야 말았다는 걸 지금쯤 깨달은 모양이지. 저 봉인 결계에서는 예언과 재앙, 그 두 실수를 이 성전으로 묻어 버리고자 하는 공회의 충만한 의지가 엿보였다.

“피해가 큽니다.”

그때 오스발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눈 밑에는 숨기지 못한 침통함이 묻어 있었으며 장궁을 움켜쥔 손에는 우악스레 힘이 들어간 채였다.

칼릴은 대답 대신 그저 어둠 속을 묵묵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내성에 위치한 그의 침실로 가는 대신 성벽의 병영으로 향했다. 이곳은 그에게 성안의 침실보다 더 친숙했다. 장식이나 태피스트리 없이 그대로 드러난 석벽에서는 냉기가 맴돌았다. 병영 안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으나 온전히 모든 곳을 밝히기에는 부족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곳마다 부상자들의 신음이 흘렀다.

오스발은 칼릴에게 성으로 돌아가자고 권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짧게 말했다.

“적어도 오늘 밤에는 다시 습격은 없을 겁니다. 저들의 피해가 더 큽니다. 게다가 결국 성문을 넘지는 못했으니까요.”

“우리에겐 다행이지.”

병영의 지휘관용 방으로 들어가면서 칼릴이 어깨에 매달린 망토를 잡아떼 냈다. 오스발이 그것을 받으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칼릴이 망토를 내던졌다.

오스발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이면서 잠시 칼릴을 바라보았다. 그는 망설이던 질문을 결국 내뱉었다.

“저들의 신관은 어째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걸까요?”

그림자 마수를 단번에 몰살시켰던 그 위력적인 공격을 어째서 더는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신관들의 정화술은 오로지 그림자 마수에게만….”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칼릴이 오스발의 말을 가로막았다. 흐릿한 조소가 비틀린 한쪽 입꼬리에 걸려 있었다.

“신의 일은 신에게 두어야 하는 법이지. 저들도 그걸 알 거다.”

오스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만일 그렇다면 잘된 일입니다. 놈들은 결코 우리 성벽을 넘지 못할 겁니다. 설령 신이라도.”

그렇게 단번에 내뱉은 그가 칼릴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쉬십시오. 일이 생기면 저나 닛사 경이 알리겠습니다.”

오스발이 떠났다.

칼릴은 잠시 동안 오스발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랜 가신의 미간에 드리워진 맹목적인 충성의 그림자를 돌이키다가 몸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완갑부터 벗었다. 어깨를 가린 철판을 떼어 냈을 때 그와 함께 판금 사이에 고여 있던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난전 중에 부러진 창칼이 갑옷 틈을 파고들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칼릴은 표정 변화 없이 갑옷을 마저 벗고 방 한구석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 밖으로 늘어트린 팔을 타고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몇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타일 틈으로 흘러들었다.

뚝, 뚝, 뚝.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 환청 같은 소리에 뒤섞인 작은 발소리를 들었다. 아리안이었다. 칼릴을 위해 불멸을, 신성을, 그리고 남은 생명마저 희생한 소년이 슬픈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이 환상은 종종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칼릴이 꿈에서라도 살아 움직이는 아리안을 보고 싶다고 바란 것과 달리 이 환상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이 흐릿한 환상은 웃지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슬픈 얼굴로 칼릴을 바라볼 뿐이었다.

‘최악이로군.’

칼릴은 피가 흐르는 팔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그가 다시 팔을 내렸을 때도 아리안은 사라지지 않고 거기 있었다. 아니, 조금 전보다 더 가까웠다. 우울한 얼굴을 한 아리안이 천천히 칼릴의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탁자에 놓인 램프 불빛 탓에 그 실루엣은 안개처럼 아른아른 흔들렸다.

아리안은 이제 칼릴의 곁에 서 있었다. 침대 곁에서 그가 무릎을 구부려 바닥에 대고 칼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칼릴은 사라질까 봐 차마 그를 만지지 못했다.

그때 아리안이 머리를 기울였다. 시선이 칼릴의 어깨에 가 있었다. 칼릴은 그가 자신의 상처를 발견했음을 알아차렸다. 녹색 눈이 일그러졌다. 제법 진짜 같은 환상이었다.

병영에는 간단한 응급 처치 도구가 모두 있었다. 칼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주로 부르조였으나 치열한 전투 중에는 스스로 상처를 돌봐야 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아리안이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왔을 때 칼릴은 짧은 착각에 빠졌다. 그들은 시베닉의 낡은 농가에 있었고, 아리안은 소파에 누운 칼릴의 상처에서 세심하게 실밥을 풀었다. 아니. 칼릴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구식 기름 램프가 걸린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다. 여긴 시베닉이 아니다. 그는 아직 이 미발달한 차원, 도르센에 갇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아리안은 환상이었다. 아리안이 달군 바늘과 명주실로 그의 상처를 꿰매고 있는 이 상황도….

하지만 이게 전부 그의 능력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면 어째서 아리안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인가. 칼릴이 아리안을 만든다면… 좀 더 정교하게… 좀 더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

칼릴은 종달새처럼 쫑알거리던 아리안을 생각했다. 키스를 바라며 들이밀던 그 발칙한 입술을. 그러나 지금 아리안은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 서글픈 표정도 칼릴의 죄책감이 만들어 낸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아리안은 그 마지막 순간에조차 다행이라는 듯이… 거기서 깨질 듯한 두통이 칼릴을 덮쳤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칼릴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리안이 뒤로 비틀거리면서 물러섰다.

“왜 말을 안 하지? 응?”

칼릴은 팔을 뻗어 아리안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건 놀랍게도 손에 잡히는 실체를 갖고 있었다. 정말 정교한 형태였다.

“아무 말이나 해 봐.”

칼릴은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춰 달래듯이 속삭였다.

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눈꼬리 끝에 눈물이 매달려 검은자위가 촉촉했다.

“무슨 말이든….”

칼릴의 어깨에 아직 매달린 바늘이 허공에서 대롱댔다.

동시에 칼릴의 손아귀 아래에서 아리안의 몸이 마치 썩어 문드러지는 과실처럼 뭉개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냐… 안 돼! 제기랄, 이게 내 환상이라면 왜 사라지는 거야!”

칼릴은 욕설을 내뱉으면서 흐물텅거리는 아리안의 몸뚱이를 어떻게든 움켜잡으려고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아리안의 슬픈 눈은 햇볕 아래의 눈 인형처럼 녹아 떨어졌고 곧 눈물 한 방울만을 남긴 채 찾아볼 수도 없이 사라졌다.

“하아, 하아, 하아….”

칼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납게 희번덕거리는 눈이 사방을 훑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말도 안….”

칼릴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그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고, 탁 터지듯이 그가 문을 향해 튀어 나갔다. 동시에 벽이 밑으로 떨어지고 문이 위로 올라갔다. 피묻은 손이 허공에 뜬 문고리를 더듬어 당겼다. 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안쪽은 검은 복도였다. 칼릴은 헐떡이면서 그 복도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물리적인 단위로 잴 수 없는 길이의 복도 끝, 문이 있었다. 차원 마수의 둥지 가장 깊은 곳이 그 문 안쪽에 있었다. 칼릴이 부들부들 경련하는 양손으로 문을 더듬었다. 잠금 장치가 풀리면서 문이 열렸다.

계절이 바뀐 것처럼 미풍이 문 안쪽에서 불어왔다. 밝은 빛이 칼릴을 비추었다.

그의 발뒤꿈치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칼릴은 천천히 그림자에서 발을 떼 안으로 성큼 몸을 들여놓았다.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방은 장미 향기를 품은 따사로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침대에 드리워진 흰 비단 휘장을 천천히 흔들었다. 칼릴은 휘청거리면서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바람에 느릿하게 나부끼는 휘장이 그의 피 묻은 뺨을 스쳤다.

“하….”

침대 안쪽을 내려다본 순간 칼릴은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리안이 거기 있었다.

석상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채.

“아리안.”

두 무릎을 바닥에 댄 칼릴이 상체를 기울여 아리안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숨소리가, 아주 작은 숨소리라도 들리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파르스름한 뺨은 차가웠으며 입술은 보랏빛이었다. 핼쑥하게 광대가 드러난 얼굴에서는 죽음 말고 그 무엇도 찾아볼수 없었고 장미 향기도 죽음의 냄새를 가릴 수는 없었다.

“아리안.”

칼릴은 아리안의 차가운 뺨을 어루만졌다. 피가 옮겨 묻었다.

“아리안.”

칼릴은 아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려 밑으로 떨어졌다. 툭, 툭, 툭, 아리안의 파르라니 식은 이마 위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칼릴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어깨가 들썩이고 흉곽이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오르내렸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고요하던 방을 가득 채웠다.

“아니야. 살릴 수 있어. 살릴 수 있다고 했어….”

칼릴은 경련하는 손을 옷깃 안쪽으로 집어넣어 작은 병을 꺼냈다. 병마개를 뽑아 신중하게 밑으로 기울였다. 남은 액체가 병 안쪽에서 흘러내렸다. 점성 있는 액체 한 방울이 밑으로 뚝 떨어져 아리안의 입술 위에서 굴렀다. 뼈에 가죽을 씌워 놓은 듯한 홀쭉한 뺨 밑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생기가 차오르더니 짧은 순간 다시 흐려졌다.

그는 병을 더 기울였다. 뚝, 뚝, 뚝, 약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지다가 종내에는 왈칵 밑으로 쏟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