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 눈은 건조했으며 검은 동공 안쪽으로 광기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 눈동자 속에서 고요한 아사(餓死)를 읽었다. 그는 칼릴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칼릴의 눈동자에 드리운 절망도 또렷해졌다.
‘칼릴.’
아리안은 드디어 칼릴 앞에 섰다.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여전히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칼릴은 뚫어져라 아리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리안은 그의 메마른 사막 같은 눈과 말라 핼쑥해진 뺨을 내려다보았다. 무심결에 손이 나갔다. 찌푸려진 눈썹 머리에 검지 끝이 닿았다.
아리안은 그대로 정지했다.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칼릴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메마른 광기만이 그대로였다.
그 순간 칼릴이 아리안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불에 덴 듯이 아리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날 원망해?”
아니야. 아리안은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원망하는 것은 메데이아의 금제였다.
“당연히 날 원망하겠지.”
칼릴이 냉소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리안은 고개를 저어 어떻게든 그렇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의 발바닥이 닿은 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벽이 갈라지고 천장이 밑으로 내려앉았다. 시간 축이 구부러지면서 그 틈으로 기억의 단면이 얼핏 드러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리안 자신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 아리안의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시체였다. 아리안이 남겨 둔 허물. 그리고 칼릴이 그 발치에 꿇어앉아 있었다. 석상처럼 덤덤한 얼굴을 한 차원 마수가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두 손이 침대에 누운 시체를 쓰다듬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손발을 문질러 온기를 나누고, 몸을 씻기고 머리카락을 빗기는 일련의 행동이 이어졌다. 마지막, 칼릴이 아리안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그의 손에 들린 유리병이 함께 기울어졌다. 물약 한 방울이 느리게 밑으로 떨어져 시체의 입술 사이로 굴러 들어갔다. 차가운 안색에 꽃이 피듯 온기가 되살아났다. 아리안, 칼릴이 그렇게 속삭이면서 얼굴을 더 기울였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저 물약.
이 순간 아리안은 어째서 칼릴이 재앙의 편을 들었는지, 어째서 예언이 이루어졌는지 깨달았다.
‘아니야!’
아리안은 칼릴을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야, 칼릴! 난 여기 있어… 네가 만든 환영이 아니야. 여기 있는 내가 진짜야, 네가 붙잡고 있는 건 내가 남긴 허물에 불과해!’
모든 외침은 목구멍 안쪽에서 허무하게 스러졌다.
칼릴의 공허한 눈이 아리안을 마주 보았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아리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사로잡힌 듯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칼릴의 시선은 메말랐으나 집요했으며 아리안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은 진득했다. 숨만 몰아쉬던 아리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글이라도 써서 알려야 해.’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칼릴이 앉은 의자 뒤로 벽이 파도처럼 느리게 물결치고 있었다. 바닥은 요람처럼 흔들렸고 벽은 무한대의 선으로 미분되어 울렁이는 매직 아이의 표면처럼 보였다. 그 가느다란 선들 사이로 기억의 장면 장면이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침대에 다소곳이 누운 아리안. 칼릴의 품에 미동 없이 안긴 아리안. 칼날을 향해 달려드는 아리안.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씨근덕거리는 아리안. 칼릴을 향해 입술을 들이미는 아리안. 울먹이는, 또는 웃는, 음식을 먹거나 도롱도롱 소리를 내며 잠든, 그 모든 얼굴들. 전부 아리안 본인이었다.
‘아….’
아리안은 칼릴을 부르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금제에 가로막혔다.
“아리안.”
칼릴이 대신 그를 불렀다.
산 채로 메말라 죽어 가는 차원 마수가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안았다. 아리안은 이제 그의 허벅다리 위에 올라앉은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입술이 다가왔다. 가슴팍은 뜨거웠고 두 다리는 단단했다.
머리가 울렁거렸다. 토할 것 같이 배 속이 파도쳤다. 두통이 아리안을 덮쳤다.
‘칼릴, 칼릴, 칼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술 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의 이름뿐이었다. 아리안은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쳐 와락 움켜쥐었다.
‘나를 만져 봐, 난 환상이 아니야. 난 여기에 있어.’
칼릴의 손이 닿아 왔다.
그리고 차원이 일그러졌다.
아리안은 바닥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어두운 천장이 그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은 발소리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천장을 등 뒤로 하고, 메데이아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곧 그녀가 생긋 눈을 접어 미소 지었다.
“꽤 가까웠어. 잘했어.”
“뭐…?”
“가까웠다고. 네 옛 신체에 말야.”
그렇게 대답하면서 메데이아가 웃는 눈으로 아리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리안은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것을 마주 잡고 일어섰다.
“아직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제법 애썼겠어. 그래도 적절하게 금제가 발동한 탓에 돌아오는 건 쉬웠지?”
아리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의문을 읽었는지 그녀가 쓴웃음을 가장했다.
“아, 이런, 아리안. 아직 부활은 완전하지 않아.”
그녀가 마치 타이르듯 속삭였다.
“네 몸을 봐. 진흙으로 빚었지. 아직 완전히 피와 살이 돌지 않아서 연약하단다.”
“그, 그, 그럼, 칼릴이, 그, 그, 몸은, 내 몸이….”
멍청이처럼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충격 탓인지 그도 아니면 금제 탓인지 이가 딱딱 맞부딪치고 몸이 떨리면서 횡설수설 두서없는 말이 튀어 나갔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아리안의 질문을 알아들었다.
“그건 네 허물이야. 과거엔 네 육신이었지만 이제는 껍데기에 불과하지.”
그녀가 그렇게 속삭이면서 아리안의 두 팔을 꽉 움켜잡았다.
“여기 있는 게 이제 진짜 네 거야. 네 권능, 눈물, 숨결을 불어넣은 신체. 단지 우리에게 부족한 건 시간이야.”
“시, 시간….”
“그래. 시간.”
그녀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재앙이 사술을 써서 네 신성의 파편을 네가 남긴 허물에 묶었어. 불쌍하게도 그 차원 마수는 그걸 너라고 생각해 애지중지 물고 빠는 모양이지만….”
빙긋 미소가 그녀의 입가로 떠올랐다.
“네가 여기 있는 이상 언젠가 네 남은 흔적도 모조리 이쪽으로 옮겨 올 테고 그 허물은 부서지겠지. 그때가 되면 아리안 너도 다시 우리 곁에 앉게 될 테고.”
메데이아의 두 눈이 가느스름하게 길어지며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물론 말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아. 말했던 것처럼 시간이 필요하지, 의지도 필요하고. 아! 물론 사랑도 필요해.”
“…사랑이라고?”
“그래, 아리안. 사랑. 네가 좋아하는 거 말이야.”
아리안이 의아하게 눈만 깜빡거리자 메데이아는 꺄르륵 소리 내서 웃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아리안?”
“무슨 소릴….”
“잘 생각해 봐.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거야.”
메데이아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린 그 사랑이 필요해.”
***
신의 일은 신에게.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인간의 전쟁은 인간의 것이었으므로 전쟁은 트로이 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지루한 공방이 깨진 것은 아슬랭의 공성 기계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50미터 높이의 탑에는 바퀴가 달려 있었고 안에서는 화포가 불을 뿜었다. 성벽 안쪽으로 떨어진 화약은 살아 있는 병사들에게 꺼지지 않는 불을 붙였다. 도르센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산 채로 불타는 사이에 아슬랭 군대는 성벽을 기어올랐다.
“공성 기계를 쓰러트려!”
“저걸 쓰러트려어억!”
“문을 열어! 성문을 열어!”
병사가 불붙은 두 팔을 허우적대며 성벽 밖으로 추락했다. 그 사이로 침입자들이 갈고리 달린 사슬을 석궁에 겨눠 성벽 위를 향해 쏘아 올렸다. 누군가는 사슬을 타고 기어올랐고 누군가는 밑으로 떨어졌다. 드디어 피아가 뒤섞였다.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은 아슬랭 요정 기사들이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그 위로 화살이 쏟아졌다. 한 무리의 갑옷 군단이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투구를 뒤집어쓴 소년병이 성문을 고정하는 도르래를 쇠망치로 내리쳤다. 쾅, 쾅, 쾅, 쾅! 말을 몰아 달려 나온 중갑 차림의 도르센 기사가 소년병의 등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동시에 망치가 도르래를 후려갈기며 쇠사슬이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성문이 밑으로 떨어졌다.
“아, 안 돼! 문을 막아라!”
“돌진해! 문을 밀어!”
양측의 지휘관이 상반된 고함을 질렀다. 쓰러진 성문 사이로 안과 밖에서 병사들이 맞부딪쳤다.
전투는 격렬했다.
구름이 희미한 샛별을 가릴 때쯤이 되어서야 전투가 소강되었다. 기어이 성문을 돌파하지 못한 아슬랭 군이 어둠 속에서 후퇴했고 도르센 군은 무너진 성문에 사슬을 달아 끌어 올렸다. 무너진 성벽과 해자 사이에 구겨진 종이처럼 뭉쳐진 시체들만 남았다.
칼릴은 피로 젖은 성벽 계단을 올랐다. 부상자들의 신음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망루에 올라선 그가 걸음을 멈추고 어둠에 잠긴 황야로 시선을 던졌다. 오스발이 화살에 유황과 기름을 묻혀 허공을 향해 쏘아 올렸다. 빛나는 화살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어둠 자락이 내려앉은 아슬랭 군대를 얼핏 비추었다. 칼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어둠 너머에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청록색 오로라를 보았다. 지평선을 따라 요새를 에워싼 광대한 봉인 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