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20)화 (120/130)

#120

아리안은 가장 궁금한 한 가지를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예언이 이루어진 거야?”

“그래. 그걸 물어볼 줄 알았어. 단 한 가지 질문이라면 당연히 칼릴의 예언에 대해 물어보겠지.”

메데이아가 키득 키득 웃음을 흘렸다.

“아리안, 아리안. 내 친구. 너는 네 신체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에 아리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슬린 진흙 얼굴에 얼마만큼이나 불쾌함이 표시되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냐.”

“천만에. 이게 답이야. 아리안. 도르센에 떠도는 소문을 아직 몰라?”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지고 눈의 흰자가 번득거렸다.

“대공이 미쳤다지? 파살리아에서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고. 그 시체와 침식을 함께한다지 않아?”

그 순간 아리안은 간신히 숨을 삼켜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수척해진 칼릴의 얼굴과 피로와 고통을 짊어진 듯 늘어진 어깨가 떠올랐다.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고?

메데이아가 숨죽여 키득거렸다.

“예언이 이루어지고 공회가 성전을 선포했을 때… 난 처음부터 궁금하지도 않았어. 네 질문 말야.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냐고? 아리안. 네가 죽었으니까. 네가 죽어서 그 차원 마수는 미쳐 버렸어. 네 시체를 끌어안고 재앙에게 가서 널 살려 달라고 빌었지. 그리고 지금 이 꼴을 봐.”

파살리아에 웅크린 재앙의 좌익을 도르센에서 차원 마수가 수호하니 묵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졌도다. 그렇게 읊은 메데이아가 한 손을 가슴팍에 얹고 꿈꾸는 듯이 빛나는 눈으로 엄숙하게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아리안 너는 이제 여기 있지. 그러니 그 머저리가 허물에 불과한 네 시체를 붙들고 어떤 개짓거리를 한들 무슨 상관이겠어? 재앙도 차원 마수도 결코 그걸 되살리지는 못할 거야… 왜냐면 내가 그들보다 먼저 널 살렸으니까.”

***

아리안은 전보다 더 오래, 더 자주 깨어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눈을 떴을 때, 언제나와 똑같이 바구니 안에 누운 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쿠키 부스러기와 잼 덩어리의 달착지근한 냄새가 아니라 팔다리를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아리안은 눈을 껌뻑거렸다. 눈꺼풀이 팔랑거리면서 천장이 희어졌다가 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눈을 깜빡거린 뒤 눈동자를 부릅뜬 채 시선을 고정시키자 천장의 무늬가 천천히 시야에 들어왔다.

‘메데이아가 바구니 뚜껑을 안 닫아 놨던가?’

아리안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곧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작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몇 번 본 적 있는 메데이아의 침대였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아리안은 튕겨 오르듯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흰 손가락 열 개가 모두 붙어 있는 손.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어 한참 동안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다가 황급히 그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둥근 뺨, 이마, 콧날, 도톰하게 튀어나온 입술의 굴곡까지. 한참 이리저리 얼굴을 더듬던 아리안은 이번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티탄 신족의 물건처럼 거대하던 방은 이제 그의 몸에 알맞은 크기였다.

“어… 어떻게….”

거기서 아리안은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목소리마저 어색했다.

그는 한 손으로 목울대를 더듬거리다가 허둥지둥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거울, 거울을 봐야… 그러나 그 순간 바닥을 디딘 그의 발 위로 무릎이 휘청 무너져 내렸다.

“어… 어…?”

아리안은 어리둥절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바닥에 고꾸라진 채였다.

무릎에 힘이 없었다. 사실 무릎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그랬다. 아리안은 잠시 멍청히 눈을 끔뻑이다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팔꿈치가 부들거렸다. 온몸의 근육이 흐느적거리는 실타래가 된 것 같았다. 바닥에서 족히 5분은 낑낑거린 끝에야 침대에 팔을 걸치고 일어 설 수 있었다. 몸을 지탱한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아리안은 비틀거리면서 방을 가로질렀다. 간신히 서랍장 앞에 도착했다. 손을 뻗어 작은 거울을 끌어당겼다. 어두운 석영 거울 표면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

기어이 낮은 신음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거울 속에 아리안이 있었다.

아리안이 기억하는 아리안이.

눈, 코, 입,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아리안은 한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를 되살리겠다는 메데이아의 주술이 드디어 효력을 나타낸 것일까?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팔다리가 더 이상 2센티가 아닐 때 움직여야 했다.

아리안은 거울을 내팽개치고 몸을 돌렸다.

옷장을 열어젖히자 옷가지 몇 벌이 나왔다. 손에 잡히는 로브를 끄집어내 뒤집어썼다. 엉성하게 허리끈을 조여 매면서 방을 나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왔다. 긴 복도를 빠져나오자 바깥으로 통하는 회랑이 나타났다. 기둥들은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리안은 기둥 하나에 몸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멀리 도르센 방벽이 보였다. 성벽이 이어지는 긴 선 위로 붉은 석양이 내려앉아 있었으며 그 위로 금빛 아우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아리안은 작게 신음을 토해 냈다.

메데이아의 수호 마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신성을 잃은 아리안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인데…. 아리안은 성벽을 두른 금빛 방어막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메데이아는 왜 칼릴을 돕는 거지?’

그 의문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고…. 칼릴은 어째서 날 살려 달라고 한 거지. 재앙이 날 무슨 수로 살릴 수 있다는 거야. 내 시체는 어떻게 됐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물론 어느 것에도 답은 없었다.

아리안은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했다.

어차피 성전은 일어났으며 예언은 이루어졌다. 이제 아리안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칼릴에게 알려 줘야 해.’

내가 되살아났으니 너는 더 이상 시체를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그렇다면 칼릴이 재앙의 편을 들 일도 없을 것이며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성전도 끝나지 않겠는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었으나 어차피 아리안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물론 더 큰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는 발목에 힘을 주어 회랑의 무수한 기둥들이 이어지는 소실점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들여놓았다.

태양들이 줄지어 성벽 밑으로 떨어졌다.

아리안은 어둠을 틈타 칼릴의 방으로 스며들었다.

침실과 내실로 연결되는 복도는 비어 있었다. 벽에 불 꺼진 촛대만이 걸려 있었고 주위는 컴컴했다. 안쪽으로 이어진 통로에서 흐릿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통로까지의 몇 미터조차 고난의 한 걸음 한 걸음이었다. 온몸은 식은땀투성이였으며 신생아의 것이나 다름없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후들거렸다.

아리안은 간신히 불빛이 새어 나오는 통로 앞에 멈춰 섰다.

안쪽에 칼릴이 있었다. 그는 우단 의자에 불편한 자세로 걸터앉아 선잠에 든 채였다. 뺨이 수척하고 턱선이 전보다 날카로웠다.

메데이아의 말이 떠올랐다. 도르센에 떠도는 소문. 대공이 미쳤다고, 파살리아에서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고, 그 시체와 침식을 함께한다고. 그러나 칼릴은 이전보다 초췌해지긴 했으나 그런 미친 짓을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눈을 꾸욱 감아 미간에 얼핏 주름이 져 있었다. 숨은 얕았다. 불쾌한 듯 일그러진 눈썹 머리 덕에 그가 깊은 잠에 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리안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잠든 얼굴을 먼발치에서 훔쳐보았다.

이것은 그의 장갑을 주워 가져다주려다가 잠들어 있던 칼릴과 마주쳤던 파살리아에서의 과거를 상기시켰다.

발이 무의식적으로 안쪽을 향했다. 한 걸음만큼 칼릴에게 가까워졌다. 그 한 발자국.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아리안은 홀린 듯이 칼릴을 향해 비척비척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이제 불과 열 발자국이나 남았을까, 칼릴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뜨였다.

아리안은 힉, 하면서 단번에 제자리에 굳어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칼릴은 그저 아리안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가느다란 눈은 푸른 선처럼 보였고 눈빛을 읽기는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의 찌푸린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팔걸이에 걸쳐진 손등에 힘줄이 돋더니 커다란 손이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하.”

짧은 한숨, 또는 비웃음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런 걸 만들려고 하진 않았는데….”

그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나.”

그렇게 혼잣말한 그가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며 아리안을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은 무언가에 취한 듯이 몽롱했다.

“아리안.”

그가 낮게 아리안을 불렀다.

아리안은 가파르게 숨을 들이 삼켰다. 칼릴의 성대를 통해 나온 아리안의 이름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응. 나야.’

아리안은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목구멍에 마치 돌덩이가 틀어박힌 것처럼 꽉 막혔다.

‘아.’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리안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는 초조하게 손끝으로 목을 긁었다.

“우….”

간신히 튀어나온 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불쾌한 쇳소리에 불과했다. 스스로가 낸 소리에 깜짝 놀라 아리안은 입을 꽉 다물었다.

메데이아의 금제였다.

그렇다면 아직 완벽하게 그의 신격과 불멸이 부활한 것이 아닌 걸까?

그런 의문들은 다음 순간 눈 녹듯 사라졌다.

칼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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