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19)화 (119/130)

#119

아리안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휑한 방이었다.

침대, 서랍장, 탁자 따위의 가구 몇 개가 갖춰져 있었으나 모두 소박했다. 생활의 흔적이 적어 마치 초라한 모텔 방 같았다. 한쪽 벽에는 단출한 붉은색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는데 별다른 무늬는 없었다.

커튼이 닫혀 있어 방은 어두웠다. 그나마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빛줄기가 방을 미미하게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아리안은 탁자를 뒤뚱뒤뚱 가로질러 가장자리로 향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탁자는 고작 메데이아의 허리 정도 높이였으나 아리안에게는 사가르마타 정상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릎이 절로 후들거렸다.

아리안은 탁자 곁에 붙어 있는 서랍장을 향해 기어올랐다. 그러곤 서랍장의 선반 손잡이를 타고 간신히 밑으로 내려왔다.

진흙 신체에는 땀은 흐르지 않았으나 온몸에 힘이 빠지고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대로 다시 의지와는 다르게 잠들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일순간 들었으나 다행히 졸음 대신 알 수 없는 활력이 샘솟았다.

아리안은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으나 창문은 열려 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성 복도 한가운데의 진저맨보다는 정원에 떨어져 있는 진저맨이 눈에 조금 덜 띌 것이다.

‘정 안 되면 진짜 쿠키인 척해도 되고….’

물론 창문을 빠져나오는 것은 탁자에서 내려오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된 노력과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간신히 딱딱한 바깥 바닥을 밟았을 때 아리안은 완전한 녹초였다. 지면에 가깝게 기울어진 태양 다섯 개가 비스듬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공기에서는 건조한 흙과 모래 냄새가 났으며 거기에 희미한 쇠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리안은 주위를 주의 깊게 살피며 천천히 발을 옮겨 놓았다. 그는 익숙한 석제 기둥과 장식 없는 쓸쓸한 회랑으로 금세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아차렸다. 그린 듯이 도르센 성의 지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든 길은 여전히 아리안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칼릴에게 가야겠어.’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고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칼릴의 집무실과 침실까지 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가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의 아리안이 가진 다리 두 개가 고작 2센티미터에 불과할 뿐이다.

아리안은 최대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뒤뚱거리는 진저맨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빨리.

‘칼릴을 만나서….’

아리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물어봐야 할 것인가. 메데이아의 속셈, 재앙, 성전…. 아무튼 그런 것은 전부 두 번째 고민이었다. 일단은 칼릴을 만나야 했다.

여름의 낮은 길었으나 아리안의 속도는 느렸다.

태양들이 점점 지면에 가까워졌다. 멀리 보이는 성벽 끝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아리안은 칼릴의 개인실이 보이는 작은 중정에 다다랐다. 이 작은 안뜰은 도르센에서 유일하게 장식적인 목적으로 꾸며진 곳이었으며 요새의 주인만을 위한 사치였다. 정원에는 흰 장미와 오렌지색 수국이 만발해 있었고 그 가운데 작은 대리석 분수가 설치되어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는 평온했다.

아리안은 정원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앞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 뒤에 혹시 물에 닿은 진흙 몸이 녹아내릴까 봐 분수를 멀찍이 빙 돌아 칼릴의 방 창문으로 향했다. 벽에는 덩굴장미가 붙어 있어서 덩굴을 붙잡고 기어오를 수 있었다. 물론 아리안에게는 손가락이 없었으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행운이 따라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창틀로 올라섰을 때, 아리안은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열린 틈으로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창문 반대편에 긴 우단 의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칼릴이 앉아 있었다. 칼릴은 창문을 절반쯤 등지고 앉아 있어서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아리안의 숨이 짧게 멎었다. 마치 수 세기 만에 재회한 것처럼 그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칼릴은 이전보다 야위었다. 턱은 더 날렵해졌으며 광대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뺨의 선이 가팔랐다. 어슴푸레한 빛에 잠긴 그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랫배 앞에서 양손을 모아 느슨하게 깍지를 끼고 있었는데 어깨는 아래쪽을 향해 떨어져 있었고 두 발은 아무렇게나 바닥을 딛고 있었다. 장검이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으나 손이 한 번에 닿는 거리는 아니었다. 그는 피로하고 지친 것처럼 보였다. 전쟁이 그를 마모시켰을까?

아리안은 있는 힘껏 팔다리를 움직여 그를 향해 뒤뚱뒤뚱 다가갔다. 울퉁불퉁한 창틀 위를 기어 열려 있는 창문 틈으로 몸을 끼워 넣었다.

‘칼릴.’

아리안은 그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칼릴!’

애써 쥐어짜 봐도 목구멍 안쪽에서 걸린 것처럼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뻐끔거렸다.

거기다 점점 팔다리는 무거워지고 누군가 위에서 누르는 것처럼 몸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머리가 멍해지며 졸음이 밀려왔다. 의식이 점점 가늘어졌다.

‘안 돼, 안 돼! 지금은 안 돼!’

아리안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려 칼릴을 향해 기어갔다. 그러나 몇 센티미터 나가지 못하고 움직임이 멈추었다.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칼릴의 옆얼굴이 흐릿해졌다. 그의 창백한 뺨, 지친 어깨, 무언가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이 깊게 가라앉은 눈.

아리안은 있는 힘껏 그의 이름을 외쳤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곧 의식이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깨어났을 때는 다시 바구니 안이었다.

뚜껑은 열려 있었고 어둑한 주홍색 불빛이 일렁거리는 천장이 보였다. 벽에는 촛불 그림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세발 촛대 곁에 메데이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콧잔등에 안경을 걸치고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아. 깼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리안은 바구니에서 기어 나왔다. 시선이 메데이아의 손에 들린 두툼한 양피 책에 닿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메데이아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책을 약간 기울여 안쪽을 보여 주었다.

“이쪽 행성의 역사야. 야사지만. 제법 흥미진진해. 뭐, 원래 야사가 제일 흥미진진한 법이지만서도.”

그녀가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리며 말했다.

“칼릴의 정원에서 널 발견했어. 자칫 위험할 뻔했지. 과자로 착각 당해서 누구 배 속에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부탁이니까 나한테 애꿎은 사람 배를 가르게 하지 말아 줘.”

아리안은 대답 대신 메데이아를 노려보았다.

메데이아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라스테스의 전쟁 얘길 읽고 있었지. 신전의 쇠락, 초월자들이 몰락하고 사람들이 신(神)적인 모든 것과 멀어지게 된 계기. 뻔하다면 뻔한 일들이긴 한데 몇 가지 재미있는 지점들도 있어. 첫째로는 그림자 마수의 존재야. 둘째는 정화술이라는 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재앙이지.”

그녀가 책장을 넘겼다.

“이곳 차원에 떨어진 재앙이 그림자 마수를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낫겠어. 만일 그렇다면 애초에 이곳 차원의 불행도 우리들의 책임이 되는 셈이지.”

책장이 몇 장 더 넘어갔다.

“정화술의 존재는 흥미로워. 암흑물질에 대항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야. 그리고 오라스테스의 전쟁은 인위적인 멸종을 위한 재앙의 개입이고.”

그녀가 드디어 책을 덮었다. 안경을 벗어 책 위에 내려놓은 그녀가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뭐 할 말 있어?”

“…나한테 뭘 했어?”

“뭘 했다니? 당연히 많은 걸 했지. 네 몸을 봐. 그 진흙 인형. 누가 그 몸으로 널 되살렸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야.”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아까 칼릴을 봤어. 그리고 그에게 가려고 했는데… 부자연스럽게 의식이 멀어지면서….”

“아, 그거.”

메데이아가 아리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바보 아냐, 아리안? 내가 미쳤다고 널 칼릴하고 만나게 놔두겠어? 일을 또 망칠 텐데?”

“일을 망치다니?”

“그래. 널 되살리는 거 말이야.”

그녀가 사근사근하게 유치원 선생님처럼 설명했다.

“네가 쓸데없는 소릴 칼릴에게 지껄이지 않도록 작은 금제를 걸어 놨어. 대단한 건 아니야. 너한테 해가 되지도 않고. 그냥. 칼릴 앞에서 널 조용히 만드는 작은 주술이지.”

아리안의 입이 벌어졌다. 금제라니? 도대체 뭘 위해서?

“그럴 거면 대체 날 왜 도르센으로 데려온 건데?”

“오. 그것도 다 큰 계획의 일환이란다.”

그리고 메데이아는 낮게 깔깔거렸다.

아리안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나한테 뭘 숨기는 거야?”

“결과는 숨기지 않았어. 널 되살리겠다고 했잖아? 물론 그 과정을 너한테 시시콜콜 말해 주진 않았지.”

그 뒤에 그녀는 양손을 벌리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아리안, 네가 정 궁금하다면 한 가지 질문에는 대답해 줄게. 물어봐.”

왜 한 가지냐고 캐묻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메데이아는 뛰어난 모사였고 그녀와 입씨름을 하는 것은 완전히 쓸모없는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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