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그의 시선이 메데이아의 손에 들린 왕골 바구니로 향했다.
“열어 보십시오.”
그가 명령했다. 메데이아는 짜증 내지 않고 사근사근 웃는 얼굴로 그것을 열어 보였다.
안에는 흰 리넨 보자기가 깔려 있었고 몇 종류의 형편없는 쿠키가 놓여 있었다.
“대공 전하께 바칠 겁니까?”
그 질문에 메데이아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으나 참았다.
“그럴 리가요. 이런 것을 어찌 대공 전하께 드리겠습니까?”
그녀는 완벽하게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사는 더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녀는 안쪽 알현실로 들어갔다. 이미 한 번 왔던 곳이었으나 여전히 밑에서 칼릴을 올려다보는 것은 썩 유쾌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높은 의자에 앉은 칼릴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긴 무슨 일이지? 로마 공회의 전언을 전하러 왔나?”
칼릴이 그렇게 물었을 때 메데이아는 또 참지 못하고 웃을 뻔했다.
“설마. 내가 걔네 말을 왜 전해?”
“넌 로마 공회의 일원이고 날 증오하고 있을 테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칼릴, 말했잖아. 난 그치들 안 좋아한다고. 그리고 여기 온 건 널 돕기 위해서야.”
그녀의 말에 칼릴이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짧은 조소는 금방 사라지고 조각상 같은 얼굴에는 그린 듯한 무표정이 남았다.
“독사의 혀. 네 말은 믿지 않아.”
“아, 물론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긴 했어. 아리안에게도. 그런데 그 거짓말은 아리안을 위한 거였지. 내가 네가 뭐가 이쁘다고 너 좋은 말을 해 주겠니?”
메데이아는 눈꺼풀을 게슴츠레 내리깔아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뭐어. 이제 와서는 내 거짓말이 무슨 의미겠어. 다 망했는걸.”
칼릴은 침묵했고, 메데이아만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널 위해 여기 왔다는 건 이번엔 진짜야. 난 이 성전에서 널 편들 생각이거든.”
“네가?”
칼릴의 비웃음 섞인 반문에 메데이아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래. 날 곁에 둬서 나쁠 건 없을 거야. 한 명이라도 네 편이 필요하지 않겠어? 트로이 전쟁도 이 정도로 전세가 밀리지는 않았다구.”
칼릴이 메데이아를 내려다보았다.
냉혹한 마수의 다차원 시선이 마녀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했다. 메데이아는 속내를 내보이지 않기 위해 짐짓 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나긴 몇 초 뒤, 칼릴이 시선을 돌렸다. 그가 의자 팔걸이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그녀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건? 네 마법 물건들인가?”
“비슷해. 왜? 보여 줘?”
메데이아의 빈정거리는 반문에 칼릴은 낮게 피식 웃었다.
“필요 없어. 그래 봐야 하잘것없는 주술이겠지.”
“그 말 후회할걸.”
메데이아는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비웃었다.
“성에 머무를 수 있도록 방을 내주지. 쓸데없는 분란은 일으키지 마라.”
칼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칼릴이 먼저 알현실을 떠났고, 얼마 안 있어 옥좌 뒤편의 푸른 커튼이 내려온 벽 안쪽에서 노인이 나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메데이아는 노인을 따라 알현실을 나왔다.
사각사각 바구니 안에서 벽을 긁는 소리가 났다. 아리안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노인이 메데이아를 힐끔거렸다. 메데이아는 모르는 척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안내된 방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좋지도 않았다.
메데이아는 바구니를 방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두었다. 창가에서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방 코너의 탁자 위였다.
그리고 바구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안쪽에서 아리안이 탁 튀어 올랐다. 물론 벽에 부딪쳐서 다시 밑으로 주르르 미끄러졌고 부드러운 리넨 보자기 주름과 형편없는 쿠키들(이번에는 진짜 쿠키들) 사이를 굴렀다.
메데이아가 낄낄대자 바닥에 쭈그러진 아리안이 붉은 털실 같은 머리카락이 붙은 손톱만 한 머리통을 이리저리 흔들더니 몸을 일으켰다. 녹색 보석 부스러기를 박아 넣어 만든 눈이 메데이아를 노려보았다.
“뭘 노리는 거야?”
“말했잖아. 널 되살리겠다고.”
메데이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겸사겸사 칼릴도 조금 도와주고. 성전 말이야.”
“무슨 방법으로? 그리고 왜 칼릴을 돕는 건데? 너, 넌 칼릴을 싫어하잖아!”
“물론 싫어해. 하지만 이건 다 널 위해서야, 아리안.”
그리고 콜키스의 마녀는 빙긋 웃었다.
“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거든. 너도 알겠지만 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도가 텄단 말이지. 뭘 뺏거나 되찾는 거 말이야. 주로 왕위였지만, 뭐, 네 권능을 되찾는 것도 맡겨 두라고.”
“대체 무슨 수로… 필멸을….”
아리안의 목소리가 천천히 느려졌다. 두 팔이 밑으로 떨어지고 두 알의 보석 부스러기가 졸린 소처럼 깜빡거렸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한 게 아니야.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지. 그 신체는 아직 허술하니까. 아직은.”
메데이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푹 쉬어. 여긴 좋은 자리야. 햇빛도 잘 들고 통풍도 잘되고.”
“난… 화분이… 아니야.”
“물론. 지금의 넌 식물보다는 쿠키에 가까운걸.”
거기까지였다.
메데이아는 바구니 뚜껑을 닫았다.
***
아리안의 기억은 명확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물에 잠긴 것처럼 부옜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가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깨어나는 것은 대부분 메데이아가 곁에 있을 때였다. 아리안이 눈을 뜨면 메데이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바구니의 뚜껑을 열어 주곤 했다.
아리안은 그녀와의 대화에서 몇 가지를 알아차렸다. 일단, 그들은 도르센에 와 있었다. 둘째, 아리안이 깨어나는 주기는 일정하지 못하다. 마지막, 그 주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아마도 열세 번째로 깨어났을 때, 아리안은 여느 때와 달리 메데이아가 뚜껑을 열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둑한 바구니 구석에서 들척지근한 설탕 냄새를 풍기는 쿠키 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몇 종류의 쿠키는 이전과 바뀌어 있었다. 아리안은 가운데에 딸기잼을 바른 다쿠아즈를 약간 갉아 먹은 뒤에 손(그것을 손이라 불러도 된다면)에 묻은 잼을 핥았다.
당이 기력을 북돋웠다. 그는 딱딱한 쇼트브레드와 버터 쿠키를 차곡차곡 쌓은 뒤 오레오 블럭을 겹쳐 발판을 만들었고 꾸덕꾸덕한 브라우니를 밑에 깔아 떨어질 때의 충격을 최소화했다. 이 노동에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도 아직 메데이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안은 오레오 블록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쇼트브레드가 덜컥거렸으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두 번의 실패를 거쳐(이 실패 끝에 아리안은 브라우니를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 간신히 꼭대기에 도달하고서는 양팔로 뚜껑을 힘껏 밀어젖혔다.
왕골 뚜껑은 아리안에게는 무쇠 판처럼 느껴졌다.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준 끝에야 간신히 뚜껑을 위쪽으로 들추고 그 틈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발끝을 허공에서 서너 번 버둥거리자 아리안의 몸이 뚜껑이 살짝 열린 틈으로 쑥 빠져나왔다. 그것과 동시에 뚜껑이 쾅 밑으로 떨어졌다. 1초만 늦었어도 발이 잘리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진짜 발은 아니겠지만…. 간담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