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17)화 (117/130)

#117

칼릴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 침착함을 칭송하던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이제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은 비인간적이었다.

닛사는 그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칼릴이 먼저 오스발에게서 자신의 완갑을 뺏어 들며 걸음을 성큼 옮겨 놓았다.

오스발이 그 뒤를 따랐다.

닛사는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서둘러 그들을 쫓아 나갔다.

마구종이 이미 칼릴의 군마를 가져다 놓은 뒤였다. 칼릴은 한쪽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훌쩍 말 위로 올랐다.

“성문을 열어라.”

“수행하겠습니다.”

오스발이 그를 따라가려 했으나 칼릴은 고개를 저었다. 닛사와 오스발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전하, 위험합니다.”

칼릴의 말 곁으로 바짝 달라붙으며 오스발이 빠르고 거친 쇳소리로 속삭였다. 칼릴은 무감흥한 얼굴로 충성스러운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저들은 마수가 아니다.”

칼릴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비웃음 같은 것이 완벽한 조형의 입술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저들도 내게 할 말이 있으니 여기까지 왔겠지.”

더 이상 설득의 여지는 없었다. 오스발이 뒤로 물러났다.

칼릴이 박차 달린 부츠로 말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잘 훈련된 군마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이 땀을 흘리며 성문의 도르래를 당겨 열고 있었다. 육중한 철문이 밑으로 내려가며 도개교가 깊은 해자 위를 가로질렀다. 칼릴은 망설임 없이 그 위를 달려 나갔다.

닛사는 불안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몸을 돌려 성벽 위로 달려 올라갔다. 오스발이 서둘러 그녀를 따라왔다.

***

칼릴은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군마가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방향을 꺾어 멈춰 섰다. 발굽 아래로 흙먼지가 부옇게 솟았다.

맞은편에서 전령이 속력을 천천히 줄이면서 가까워졌다.

둘 사이의 거리가 삼사 미터쯤 남아 한달음에 서로의 검이 닿을 정도의 위치에서 전령이 말을 멈췄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고상한 진줏빛 이마에 높은 콧날. 아직까지 소년의 빛이 남아 있는 앳된 외모. 그러나 보이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나이를 먹었고 그 위험성이야 말할 것도 없다.

차원을 가르는 검. 파프니르의 살해자.

“이렇게 또 만나네요.”

시큰둥한 표정을 한 지크프리트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바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소년 기사의 눈이 칼릴을 예리하게 훑었다.

“뭐. 그때보다는 나아 보이네.”

그가 낮게 혼잣말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그땐 제법 신세를 졌어요.”

“천만에.”

칼릴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며 서늘한 빛이 떠올랐다. 분위기가 예리해졌다. 일촉즉발. 파살리아의 지하에서와는 상황이 달랐다. 권능을 광휘처럼 두른 소년은 진짜 육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곧 파괴 신의 강림을 의미했다.

칼릴은 지크프리트의 어깨 너머 길고 희끄무레한 선처럼 보이는 아슬랭 군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공회는 날 여기까지 추방시키고서 뭘 더 바라지? 대답해 봐, 신전 기사단의 둘째 검. 그들을 대신해 여기 온 너라면 대답할 수 있겠지.”

허리에 찬 애검 손잡이를 툭 툭 건드리던 지크프리트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날렵한 눈매로 칼릴을 응시했다.

“뭘 당연한 걸 물으시나?”

그리고 그때 그들의 뒤 도르센 성벽에서 낮은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림자 마수의 출현을 나타내는 1단계 경보였다.

성벽에 올라선 나팔수가 다급하게 뿔 나팔을 불고 긴 성벽을 따라 일제히 기름 화로에 불이 붙었다. 궁병들이 성벽 위를 내달리는 발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지크프리트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욕보이고 있는 성자의 시체를 내놓고 지금 당장 성문을 열어 파살리아로 가는 길을 열어요.”

그 말에 칼릴이 마치 고민하듯이 한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반듯한 미간이 설핏 찌푸려지면서 깊은 고뇌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지크프리트는 믿지 않았다. 차원 마수들의 영악함이란.

“내가 그의 시체를 돌려주면? 너희가 그를 되살릴 수 있나?”

“하.”

지크프리트가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애초에 당신이 아니었음 아리안이 죽을 일도 없었어.”

칼릴은 대답하지 않았고, 지크프리트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필멸하는 그 누구도 죽음에서 되돌아 올 순 없어요. 아리안을 필멸로 만들 때 그 생각은 미처 못 했나 보죠?”

“그렇다면 내가 항복할 이유도 없겠군.”

칼릴은 차분히 대답했다.

소년 기사의 눈이 길게 찢어지며 거기로 분노와 살기가 함께 흘렀다.

대지가 뒤흔들리는 땅 울림이 그 사이를 갈랐다. 도르센 성벽으로부터 기수들이 달려 나오고 있었다.

“대공 전하! 그림자 마수의 침입입니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발악하듯 외치는 오스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여전히 칼릴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 순순히 항복할 거라고는 이쪽도 생각 안 했어요.”

지크프리트가 높은 도르센 성벽을 짧게 일견한 뒤 칼릴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이 성벽이 왕국의 서쪽 방벽이라지요?”

칼릴은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크프리트가 미미하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결국 예언이 맞았네요, 재앙의 왼쪽 어깨.”

칼릴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지크프리트가 말하는 의미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도르센은 파살리아에 웅크린 재앙의 좌익이고 그를 수호하는 칼릴이 곧 재앙의 왼쪽 어깨가 아니겠냐는 질문.

지크프리트가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꺾었다. 신마(神馬)가 여유롭게 말머리를 돌려 옆으로 서너 발자국 옮겨 놓았다. 이제 그들은 북쪽 지평선을 거뭇하게 메우며 밀려오는 그림자 마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먹구름이 밀려와 태양을 가리고 어둠이 삽시간에 대지를 뒤덮었다. 살의에 찬 울부짖음과 시체 썩는 냄새가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과거 신전기사단의 둘째 검으로 불렸던 소년 기사가 마수 무리를 향해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동시에 그의 오른쪽 위로 빛이 길쭉하게 솟아오르더니 허공에서 천천히 방향을 바꿔 대지에 평행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었다. 사방으로 찬란하게 광휘를 뿌리는 빛의 기둥. 신전기사단의 창.

지크프리트가 약간 고개를 돌려 칼릴을 돌아보았다.

“참. 이건 선전 포고예요.”

그와 함께 그가 허공에 길게 뻗은 거대한 빛의 창을 꽉 움켜잡았다.

“성전 말이에요. 로마 공회를 대신해서.”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두 마디를 덧붙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움켜쥔 손아귀 안에서 거대한 창이 요동쳤다. 솟구치는 빛은 점점 더 강해져서 이제는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생성된 고밀도체가 사방의 모든 질량 가진 것들을 빨아들이면서 거센 돌풍이 불었고 하늘의 먹구름마저 창을 향해 빨려 들어가며 상공에서 지면으로 내리꽂히는 용오름을 만들어 냈다. 갈라진 구름 틈으로 태양이 다시 언뜻 드러나 섬광이 내리쪼였다.

지크프리트가 오른쪽 어깨를 뒤로 살짝 젖혔다가 그 작은 반동을 이용해 창을 앞으로 가볍게 내던졌다.

빛의 창이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쇄도하는 빛줄기가 어둠을 가르고 대지를 다시 밝혔다.

번쩍, 아침이 찾아온 것처럼 창이 내리꽂힌 방향에서부터 찬란한 여명이 떠오르고 그것은 점점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그림자 마수를 포함한 모든 어둠을 집어삼켰다.

뿔 나팔 소리가 뚝 멎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양측의 병사들이 모두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닛사는 이전 자신이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비로소 찾았다.

그들의 주군은 열병 이전의 소년이 아니었고 이 전쟁 또한 단순한 내전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신화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

메데이아는 다시 도르센으로 돌아왔다.

이 거대한 요새 도시는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나 적어도 도시의 실용적인 설계만큼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도시에는 불필요한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정확하게 필요한 대로만, 필요한 위치에, 필요한 만큼만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짧은 회랑에서 칼릴을 만나기 위해 기다릴 때, 그녀는 자신이 선 회랑이 단순한 통로만의 용도는 아님을 알아차렸다. 회랑을 따라 이어진 육중한 돌기둥들은 침입자의 방향 감각과 거리 감각을 교란하기 위해 하나같이 같은 형태와 색깔을 띠고 있었으며 간격 또한 완벽하게 일치했다. 천정을 받치는 주축은 트러스 구조로 되어 있어 어지간한 충격에도 버틸 수 있도록 견고하게 설계되었으며 특정 축대를 파괴하면 그 부분이 내려앉도록 분리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건물을 부분적으로 무너트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였다.

기둥 사이에서는 그녀를 감시하는 예리한 눈이 느껴졌다. 수많은 적들이 이 회랑에서 목숨을 잃었으리라.

메데이아는 오래된 피와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물론 죽음도 피도 그녀에게 어떤 감흥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단지 그녀는 기다림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미약한 짜증을 느꼈다.

인내심과의 줄다리기가 극에 달했을 때, 안쪽에서 커다란 문이 열리고 젊은 기사가 걸어 나왔다. 가죽 갑옷을 입고 검을 찬 기사는 속내를 읽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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