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복도에서 닛사의 걸음이 멎었다. 후우, 하고 그녀에게서 긴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부르조가 함께 멈춰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닛사는 대답 대신 갑갑하다는 듯이 오른손을 주먹 쥐어 가슴팍을 짧게 두드렸다. 부르조의 눈이 흐릿해졌다.
“하긴. 괜찮을 리가 없지요.”
노인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르조.”
닛사가 그를 불렀다.
“주군께서… 주군께서 이러시는 건 처음이지요?”
부르조는 닛사보다 더 오랫동안 대공을 섬겼다. 닛사와 달리 부르조는 대를 이어 도르센에서 살아온 토박이였고 대공이 도르센으로 온 그 순간부터 대공을 섬긴 유일한 가신이었다. 닛사가 대공을 모신 것은 전장에서였으나 부르조는 대공이 아직 칼도 들지 못하는 병약한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를 섬겼다.
부르조는 닛사가 원하는 대답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해 주는 대신 짧게 고개를 저었다.
“고통은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닛사 경. 우리 주군께서도 예외는 아니지요. 어쩌면 이게 대공 전하의 두 번째 열병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으나 닛사는 그걸 들었다.
“두 번째 열병?”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대공이 십육 세에 큰 열병을 앓고 난 이후로 사람이 바뀐 듯이 변모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항상 침대에 누워 우울증에 시달리던 병약한 소년은 전장의 선두에서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사춘기의 소년 소녀는 종종 어릴 적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변모하지 않던가.
그러나 칼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소년이 갑옷을 입고 군마 위에서 전장을 내달렸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가 정말 없었던가?
닛사는 이전의 대공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마법사로서의 직감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군은 정말로 그 전과 동일 인물인가?
***
칼릴은 파살리아를 방문 중이었다.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병적인 얼굴의 요한이 앉아 있었다. 그가 앉은 곳은 옥좌였으나 알현실에는 그와 칼릴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하긴. 무슨 의미겠는가. 어차피 이 성의 모두가 요한인 것을.
“아슬랭 군대가 도르센 서쪽 방벽에 도착했다지?”
요한이 입을 열었다. 칼릴로서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화제였다.
아슬랭은 왕국의 최북단 수정 호수에 접한 요정의 영토였다. 그 땅은 불모지였고 왕국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광활한 수정 호수를 건너야만 했으므로 아슬랭은 여태까지는 왕국 내정에 간섭하지 못했다. 바꿔 말하면, 수정 호수를 건너지 않고 북부 동토를 가로지른다면 빠르게 왕국의 서쪽 방벽 도르센까지 도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신관들이 함께한다는데… 몹시 흥미로워.”
요한이 남은 오른쪽 손으로 턱을 괴며 히죽거렸다.
“그도 그럴 게… 오라스테스의 전쟁에서 그 같잖은 치들을 다 죽여 버렸다고 생각했거든.”
왕국의 탄생부터 함께해 온 재앙의 그림자가 그렇게 속삭였다.
옥좌 양옆에 놓인 거대한 촛불이 높게 타올랐다.
“뭐, 진짜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냥 놔둘 수는 없겠지. 안 그런가 아우여.”
아우라는 가식적인 부름에도 칼릴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치가 진짜 신관들을 데리고 있다면 그 목을, 아니라면 아덴을 산 채로 데려와. 마수의 땅을 통과할 수 있었던 비법이나 물어보자구.”
그제야 칼릴의 얼굴에 반응이랄 만한 것이 나타났다.
서늘한 푸른 눈이 요한을 향했다. 동시에 바닥에 검푸른 파도처럼 요동쳤다. 칼릴과 요한 사이에는 열다섯 걸음 정도가 떨어져 있었으나 그것은 어차피 물리적 거리가 아니었다.
칼릴이 조용히 말했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 네 부하가 된 게 아니야.”
“아, 그래?”
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른 식으로 말하지. 강력한 존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희생이 필요해.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사제들이라면… 뭐, 아주 격이 맞는다고는 못해도 비벼라도 볼 수 있지 않겠어?”
그의 목소리가 좁은 동굴에서 외친 것처럼 웅웅거렸다.
그와 함께 천장이 천천히 바닥과 가까워졌다. 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바닥은 기울어지고 벽은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요한의 얼굴이 함께 일그러졌다.
창백한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래. 날 언제든 죽여 버리실 수 있으시다?”
그가 히죽대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왼쪽 어깨 밑으로 텅 빈 소맷자락이 펄럭거렸다.
“아주 고상하신 협박 방법이야. 그런데 어쩌나. 날 죽여 버리면 불쌍한 아리안은 어쩔 건데?”
무표정한 차원 마수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제 알현실 벽과 바닥, 천장을 이루는 모든 면들은 하나의 선으로 산산이 분해되고 있었다.
옥좌 팔걸이를 움켜잡은 요한의 손등에 퍼렇게 핏줄이 솟았다.
이 분리된 차원의 틈에서 시간은 측정 불가능했으므로 칼릴이 원한다면 요한에게 영원한 고문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무한대의 시간은 다른 차원에서는 단 1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긴장이 극에 달한 순간, 칼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억 개의 선으로 분해되었던 공간이 삽시간에 하나로 합쳐지며 원래의 알현실로 돌아왔다.
“약을 줘.”
칼릴이 음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약을 만드는 데 희생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러니 약을 내놔. 그 약이 있는 이상 네 목숨 줄도 붙어 있을 테니까.”
요한의 턱 밑으로 식은땀이 굴러떨어졌다. 떨리는 목젖이 마른침을 삼키며 꿀렁거렸다.
그가 품에서 유리병을 꺼내 칼릴을 향해 집어 던졌다.
칼릴은 허공에서 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알현실을 떠났다.
***
이왕자 아덴이 이끄는 군대는 빠르게 그림자 마수의 영토를 통과하여 이제 도르센 방벽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도달했다.
날씨는 기이했다. 건조한 바람이 그들의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었으며 먼 지평선에는 마른번개가 쳤다. 그러나 으레 이 여름에 한바탕 쏟아지곤 하는 급작스러운 스콜이나 우박은 없었다. 하늘은 쨍하니 푸르스름하고 다섯 개의 태양 빛은 뜨겁게 내리쪼였다. 불판처럼 달아오른 대지는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으며 먼 곳에 신기루가 일렁거렸다.
그림자 마수의 기척은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신관들이 되돌아왔다는 것을 믿는 자는 도르센에 적었다. 정화술을 쓰는 사제들이 정말 남아 있었다면 어째서 도르센을 외면했는가?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 도르센을 지킨 것은 기사와 마법사들이었다. 신전이 아니었다. 도르센의 신전은 왕국 어디보다 빠르게 쇠퇴했다.
그러나 사제가 아니라면 아슬랭 군대가 그림자 마수의 땅을 가로질러 도르센 장벽 앞에 도달한 것을 무슨 수로 설명하겠는가?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요새를 덮쳤다.
도르센 군인의 대부분은 일평생을 마수와의 전쟁으로 보내 왔다.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전쟁 경험은 짧은 내전이 전부였다. 게다가 올굽과 엘테아에서의 전투를 어찌 지금과 비교하겠는가? 그때 명분은 그들의 것이었다. 폭정하는 왕을 옥좌에서 끌어 내리고 왕국을 구할 것이라는 명분이. 그러나 그 명분은 이제 그들 적에게 있었다.
“정말 신관이 있는 건가?”
“허풍이지!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사제란 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어.”
“그게 가짜라면 저 군대는 어떻게 마수의 땅을 통과한 거야?”
“진짜라 해도 그 정화술이란 건 마수를 상대하는 거 아냐? 사람한테는….”
“옛날에는 사제들이 기사처럼 말을 타고 전쟁에 나섰다는데….”
“그럼 마법사라는 거야?”
“정화술이란 게 대체 뭔데?”
닛사는 수많은 웅성거림과 속삭임을 들으면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불안함에 젖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로 흘러 들어왔다.
마침내 성벽 꼭대기에 도달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녀는 성벽 난간에 두 손을 짚고 몸을 내밀어 앞을 바라보았다. 마법 눈이 대지를 훑었다.
이왕자 아덴의 군대는 완만하게 굴곡진 구릉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군대는 난민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절도 있었으며 훈련받은 자들의 움직임이었다.
닛사가 그들 사이에서 한 명의 말 탄 기수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그 기수는 빠른 속도로 진영을 빠져나와 성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닛사의 눈이 커졌다.
성벽 위 병사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기수가 탄 말이 바닥을 박찰 때마다 흙먼지가 일고 그 위로 찬란한 광채가 떠올랐다. 후광을 무지개처럼 두른 기수. 닛사는 과거 진짜 신관들을 본 적이 있었으나 그 무엇도 지금 같지 않았다.
“신관일까요?”
기사 한 명이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닛사라고 그에 뾰족한 대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탁, 탁, 탁, 탁, 계단을 딛는 발소리가 다급했다.
성벽을 내려온 그녀는 칼릴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의 수런거림은 이제 너무 커서 그녀의 귀는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하아. 전하!”
그녀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고요한 복도에 문이 벽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쿵 울려 퍼졌다.
칼릴은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이미 갑옷 차림이었다. 그의 앞에 선 오스발이 그의 완갑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칼릴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이지?”
“전령이 오고 있습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