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15)화 (115/130)

#115

아리안은 추운 곳에서 잠든 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얼굴에 드리운 주홍빛 불빛도 전혀 따스해 보이지 않았다.

칼릴은 무심코 그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손에 묻은 피를 깨닫고 도로 거두어들였다.

그는 대신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수정으로 된 병은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였고 뚜껑에 둥근 조각이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장식도 없었다. 그는 침대맡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리안의 입가로 약병을 가져다 댔다. 병을 천천히 기울이자 안에서 약이 흘러나왔다. 뾰족한 약병 입구에 걸린 한 방울이 느릿하게 아리안의 입술 위로 굴러떨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입술 틈으로 스며들었다.

칼릴의 두 눈은 미동 없이 아리안을 응시할 뿐이었다.

변화는 느렸다.

곧 아리안의 두 뺨에 서서히 핏기가 돌아오면서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숨을 내쉴 것처럼 입술은 싱그러웠고 감긴 눈을 번쩍 뜰 듯이 속눈썹 한 가닥 한 가닥이 선명했다.

칼릴은 참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격정을 참지 못한 어깨가 사납게 들썩였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부짖음을 삼켰다.

그는 차마 아리안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그저 오랫동안 아리안을 지켜보기만 했다.

기지개를 켜며 눈을 반짝 뜨고 일어날 것만 같던 아리안의 뺨에서 다시 서서히 핏기가 빠져나가고 활력이 사그라들며 대리석 조각상처럼 핏기 없는 얼굴만이 남을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칼릴은 말없이 누운 아리안을 내려다보면서 아리안이 마지막 순간 하려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

아리안은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칼릴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부정적인 맺음말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제 끝이라고? 이제는,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칼릴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휘장을 다시 내리고 침대에서 몸을 돌렸다. 그는 약병의 무게로 남은 약의 양을 가늠하며 방을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그림자가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반대 방향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그림자를 다시 대각선으로 가르며 문은 더 이상 3차원 시신경으로 인식할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물리적인 걸음으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단 세 걸음의 복도를 빠져나오자 빛이 쏟아지는 응접실이 나타났다.

응접실에는 닛사와 부르조가 있었다. 둘의 안색은 초조했으며 특히 부르조는 낯빛이 거무죽죽했다. 퉁퉁하니 보기 좋게 살집이 올라 있던 노인은 지난 반년 사이 반쪽이 되었다. 눈 밑은 거뭇했고 뺨도 움푹 패어 이전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였다.

“전하.”

닛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칼릴은 두 가신의 초조한 얼굴에 한 번 시선을 던지고서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창가의 의자로 향했다.

“전하….”

이번에는 부르조가 그를 부르며 몇 걸음 다가왔다.

칼릴의 시선은 비스듬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가신은 덜컥 겁에 질렸다.

“전하!”

닛사가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가 앉은 의자 바로 앞까지 다가와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칼릴은 눈만 움직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이 든 마법사의 눈빛에 어린 초조함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그에 더불어 그녀의 걱정 또한.

‘주군이 드디어 완전히 미쳐 버린 것은 아닌가?’

파살리아에서 시체를 안고 돌아온 대공을 목격한 자는 많지 않았으나 대공이 시체와 침식을 함께한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닛사와 부르조가 필사적으로 그를 숨기려 했으나 발 없는 말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반년 전, 도르센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파살리아는 함락 직전이었다. 비스키우스의 원조는 끊어졌고 노쇠한 국왕은 그 충격에 정신을 잃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일왕자 나일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가 오랫동안 왕위를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르센 군대는 파살리아의 마지막 방어점인 퀸트 관문 앞까지 진군했다.

승리는 잡힐 듯이 눈앞에 가까웠다.

가까웠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다시 도르센에 있다. 파살리아의 국왕은 거들먹거리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부과했고, 그들의 주군은 여전히 대공으로 남았다.

닛사는 희망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가신 중 하나였다.

칼릴은 그녀의 침중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날 찾아온 걸 보니 이왕자가 다시 문제인가 보군. 이번엔 또 뭐라던가? 식량을 내놓으라던가? 아니면 도르센을 열어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둘 다 아닙니다.”

닛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등 뒤에 선 부르조가 마른침을 꿀떡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응접실에 울렸다.

“전하. 이왕자가 거병했습니다.”

“아예 난민을 끌어모아 군대를 만들었나 보군. 관심 없다.”

“전하….”

닛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몇 초 뒤 그녀가 다시 침착함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상황이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신전이 이왕자의 편에 붙었다고 합니다. 소문이 흉흉합니다.”

“전하! 소문에는 신전이 부활했다고…!”

부르조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가파르게 높아졌다가 살짝 꺾였다. 그가 입술을 깨물고 칼릴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칼릴은 여전히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이왕자가 난민뿐만 아니라 굶주린 신관까지 거두는군. 갸륵한 일이지. 내버려 둬라.”

닛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노쇠한 마법사는 시선을 자신의 발치로 떨어트렸다가 슬쩍 부르조를 쳐다보았다. 두 가신이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칼릴은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르조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이왕자의 군대는 북쪽 그림자 마수의 땅을 가로질러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쪽을? 개죽음이 하고 싶다던가?”

칼릴이 피식 웃었다.

왕국의 북서쪽을 차지하는 광활한 동토는 그림자 마수의 땅이었다. 그곳은 죽음의 땅이다. 오염된 토지에서는 살아 있는 것이 자라지 못하고 독극물이 샘과 우물 대신 흘러넘쳐 강을 이룬다. 사람은 결코 그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도르센 장벽과 북부의 수정 호수는 이 죽음의 대지와 왕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칼릴의 반응에 부르조의 얼굴에 점점 더 초조한 기색이 강해졌다.

“전하!”

노인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더 시간을 끌기에는 그는 충분히 오래 살았으며 남은 시간도 많지 않았다.

“정화술을 쓰는 신관이, 아니 신관들이 있다고 합니다. 감히 가로되 신전은 부활했고 높으신 분들께서 이왕자를 선택했다고….”

“높으신 분들?”

그때 칼릴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부르조는 결연한 눈이었다.

“네. 신들 말입니다. 수정호수 건너편의 오래된 신들.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 우리를 버렸다고 알려진 그 신들이요!”

“높으신 분들이라….”

칼릴이 흥미롭다는 듯이 그 말을 반복했다.

닛사와 부르조가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뒤 칼릴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얼굴에서 잠시 엿보였던 흥미롭다는 기색은 이제 사라지고 그는 다시 무기력한 청동상처럼 아무 감흥도 없는 건조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신관들은 오라스테스의 전쟁에서 다 죽었다. 이왕자가 그림자 마수의 땅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면 신관의 힘이 아니라 군대의 저력이겠지. 아니면 사술이든가.”

“전하께서도 정화술을 쓸 수 있는 자들이 다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닛사의 그 말에 칼릴이 무표정해졌다. 마법사의 음울한 음성이 이어졌다.

“한 명이 남아 있다면 두 명도, 세 명도 남아 있을 수 있지요.”

그녀는 대공의 분노를 각오했다. 죽은 소년에 대한 것은 도르센에서는 금구였다. 대공이 그 시체를 끌어안고 애지중지한다는 소문처럼.

그러나 칼릴은 화내는 대신 낮게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우리 일은 변함없다. 누구든 장벽을 넘으려 한다면 막을 뿐이지. 높은 분들의 뜻이 정말로 이왕자에게 있다면 도르센을 뛰어넘을 날개도 주시지 않겠는가?”

결국 닛사의 음성이 비통해졌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전하? 무엇을 위해서 그들을 막습니까? 배부르고 살찐 자들을 지키고자 굶주리고 아픈 자들을 막습니까?”

칼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노신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칼릴의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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