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아리안은 죽음에서 깨어났다. 말 그대로.
눈을 뜨자 익숙한 등이 보였다. 녹색 우의를 입은 젖은 등이었다. 비 냄새가 났다. 굽슬굽슬한 검은 머리 타래가 그 어깨에 걸쳐 등으로 떨어져 있었다.
아리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어깨가 흐물거렸다. 팔꿈치가 꺾이며 약간 일으켰던 상체가 밑으로 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 등이 몸을 돌렸다.
“아. 너무 움직이지 마. 몸이 아직 약해. 그 망할 진흙은 어디서 파낸 거야? 제대로 된 게 아니라서 그 정도까지만이라도 만드는 데 아주 고생했어.”
메데이아의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팔 조심해. 관절 부위는 특히 약하니까. 뭐, 너무 걱정은 마. 빠져도 다시 붙여 줄게.”
그러면서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점점… 점점… 커졌다.
마침내 그녀가 아리안의 앞에 멈춰 섰을 때, 그녀는 티탄 신족처럼 보였다. 물론, 그 혈통을 절반 이어받기는 한 게 사실이지만….
아리안은 멍청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커졌어?”
그 질문에 메데이아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손을 뻗더니 아리안을 부드럽게 손바닥에 싣고서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은 아리안의 몸통만 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가까워졌다. 아리안의 눈이 혼란으로 요동쳤다. 꿈일까, 아니면 죽음에 달하는 여정 도중 보는 환각일까.
“아리안.”
그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어 가는 너를 내가 살렸어. 무너진 파살리아의 후원에서 네 피와 권능으로 빚어진 진흙 인형을 찾아냈지. 거기다가 꺼져 가던 네 숨 한 모금을 불어 넣어 널 살려 낸 거야.”
“아….”
아리안의 입이 벌어졌다.
“그건….”
오래된 느티나무 밑에서 파낸 진흙으로 빚었던 작은 인형.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 없이 뭉툭한 갈색 손바닥이 보였다. 입이 더 벌어졌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팔다리도 짤막했다. 몸통은 퉁퉁했고 까슬한 모슬린 천으로 된 거적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빨간 털실 뭉치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눈은 녹색 보석 부스러기를 박아 넣었다.
아리안은 이제 조금 슬픈 표정을 한 그슬린 진저맨이 되고 말았다.
메데이아가 깔깔거리면서 아리안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곳은 푹신한 솜과 천이 깔려 있는 네모진 바구니였다. 솔직히 과자 바구니처럼 보였고 아리안은 거기 앉기 싫었다. 피크닉 바구니를 장식하는 진저브레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든 거야? 너라면 더….”
“더?”
“더… 사람 같이 만들 수도 있었잖아.”
아리안의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아무튼 메데이아는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설령 그슬린 진저맨으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그걸 지적하는 대신 메데이아는 낄낄대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왜냐고? 난 마녀니까. 마녀는 절대 일을 쉽게 만들지 않는 법이잖아?”
그녀가 허리를 굽혀 바구니 안의 아리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벗이여. 너는 날 구했지. 나도 그럴 거야.”
그 뒤에 그녀는 유쾌한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내 방식대로.”
그녀가 빙글 몸을 돌렸다. 흐흐흥,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그녀의 손이 긴 선반 위에 놓인 여러 가지 물건들을 차례대로 집어 들어 커다란 벽난로로 던져 넣었다. 챙강, 챙강, 병이 깨지고 낡은 책과 썩어 가는 약초 다발에 불이 옮겨붙었다. 매캐한 연기가 꾸역꾸역 솟구쳤다.
아리안은 바구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바구니의 높이에 비해 그의 팔다리가 너무 짧았다. 벽에 달라붙어 버둥거리다가 푹신한 솜 위로 나동그라지기를 몇 번 반복한 끝에 결국 뭉툭한 팔다리를 사방으로 뻗고 발라당 드러누웠다. 바구니 위로 메데이아의 등이 내다보였다. 그녀가 걸친 녹색 우의는 살짝 젖어 있었다.
아리안은 불안하게 그 등을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메데이아. 저기… 칼릴은? 그는 어떻게 됐어?”
“아, 그 남자.”
메데이아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어, 아리안. 재앙의 왼쪽 어깨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조금 전과 정반대로 그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바구니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뭐. 성전이 이런 구석진 차원에서 벌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 못 했겠지만.”
그리고서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그거에 대해 너나 내가 할 일은 없지.”
“서, 성전이라니?”
“성전이 성전이지.”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설명해 봐.”
아리안이 초조하게 되물었다. 메데이아가 입술 한쪽을 비뚜름히 끌어 올렸다.
“성전. 성전 말이야, 아리안. 카르타고, 메디나, 트로이, 콘스탄티노플! 기억 안 나? 재앙은 부활하고 차원 마수가 그 왼쪽에 섰지. 그럼 로마 공회는 이제 뭘 할까? 당연히 성전을 선포하지 않았겠어?”
아리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성전이라니, 이제 와서…. 얼핏 스쳐 지나간 그 생각조차 입 밖을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메데이아의 말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재앙은 부활했고 칼릴이 그 곁에 섰다. 그리고 로마 공회는 그를 척결하기 위해 성전을 선포했다. 이것이야말로 아리안이 가장 피하고자 했던,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아닌가. 스스로를 찌르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예언은 결국 실행되었다. 아리안은 또다시 실패한 것이다.
그 순간 메데이아가 짝, 하고 크게 박수를 한 번 쳐서 아리안의 생각을 끊었다.
“자, 쓸데없는 생각은 이제 그만. 분위기 잡아 봤자 어차피 탄 쿠키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녀가 바구니 안의 아리안을 생긋 웃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잘 들어, 아리안. 난 이제부터 널 칼릴에게로 데려갈 거야.”
“뭐, 뭐라고?”
아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야? 칼릴한테?”
“그래. 널 완전히 되살리려면 그가 필요하거든.”
“완전히 되살린다니? 원래 몸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 게 가능해?”
“물론.”
경쾌한 대답이 주저 없이 돌아왔다.
아리안은 입을 벌렸다. 물론 그슬린 진저브레드의 갈라진 금이 벌어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메데이아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면서 검은 눈동자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걱정 마. 그런 건 내 전공이지. 살인, 저주, 복수….”
“잠깐, 잠깐만. 메데이아. 난 그런 걸 바란 적….”
“오, 물론 그렇겠지. 오해하지 마. 이건 널 위해서가 아니야, 날 위해서지.”
그녀의 눈이 둥글게 구부러지면서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난 내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거야. 네 터무니없는 계획을 말리지 못했던 내 실수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전부 내 방식대로 할 거야. 그도 그럴 게 지금 네 꼴을 봐. 네 방식대로 한 결과가 어떻지?”
아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죄책감이 혀에 돋은 가시처럼 그를 따끔따끔 괴롭혔다.
로마 공회에게 들키지 않고 차원을 건널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메데이아는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리안을 위해 비약을 조제했다. 그것은 아리안의 권능을 신체에서 분리해 냈고, 그 결과 아리안은 누구의 시선에도 들키지 않고 차원을 건너 칼릴을 찾아냈다.
“메데이아, 그건 네 실수가 아니었어. 그건 내….”
“네 실수지. 내 실수기도 하고.”
메데이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그 실수를 바로 잡아 보자구.”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두 손이 바구니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손이 바구니 뚜껑을 천천히 눌러 닫았다.
왕골을 엮어 만든 견고한 뚜껑이 밑으로 내려오며 그림자가 아리안의 위로 떨어졌다.
아리안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며 제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메, 메데이아! 잠깐만! 메데이아! 안 돼! 닫지 마!”그는 바구니 끝으로 힘껏 달려가 위를 향해 점프했다. 그러나 뭉툭한 손끝(그것을 손이라 불러야 하는지도 미심쩍었지만)이 바구니 벽 표면에서 미끄러졌을 뿐이었다.
“자아. 편히 쉬고 있어.”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탁, 뚜껑이 닫혔다.
***
“기, 기다려! 되살릴 수 있어. 되살릴 수 있다구! 내가 알아. 어떻게 살리는지….”
요한이 바닥을 기며 외쳤다.
칼릴이 우뚝 멈춰 섰다.
팔이 뜯겨 나간 왼쪽 어깨를 움켜쥔 요한이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 눈에는 기이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히힛, 하하핫, 내가 살릴 수 있어. 살리는 방법을 알아! 수천 세기를, 흐, 그 짓만 연구했는데, 모를 리가.”
칼릴은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요한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그가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만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칼릴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재앙의 왼팔을 바닥으로 툭 내던졌다.
“어떻게?”
갈가리 찢긴 수백 구의 시신으로 뒤덮인 석실에서, 여전히 고요하게 표정 없는 차원 마수가 물었다.
“어떻게 살릴 수 있지?”
칼릴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지난 반년간 수백 번 되풀이되었던 악몽이었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주먹 쥔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흘러 떨어졌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에 긴장을 풀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팽팽하게 당겨진 전신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창백한 얼굴에는 병적인 기색이 감돌았다.
바람도 없는데 촛불이 흔들려 선명하게 뼈가 도드라진 그의 광대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칼릴은 몽롱해진 눈으로 그 그림자를 좇았다. 소리 없이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따라 고개를 돌린 끝,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칼릴은 침대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커다란 세 발자국, 그는 이미 침대 앞에 서 있었다.
침대에는 얇은 휘장이 절반쯤 내려와 있었고, 주홍빛 불빛이 비단 휘장을 투과하여 안쪽으로 부드러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칼릴은 조심스럽게 휘장을 옆으로 걷었다.
그 안에 아리안이 있었다.
다소곳이 눈을 감고 얌전히 누운 아리안은 그냥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뺨에는 혈색이 없었고 입술은 창백했다. 그리고 칼릴은 안다. 아리안은 언제나 베개나 이불, 또는 칼릴의 팔이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려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좋아했었다.
휘장을 움켜잡은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흐느적대는 휘장에 피가 옮겨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