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삐이이이익!
가스 불 위의 주전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리안은 꿈결같이 몽롱한 상태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추위가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그건 대략 11 솔라 매스 정도의 무게였으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투 끝에 눈꺼풀이 올라가고 실선같이 시야가 트였다.
어느샌가 귀를 찢는 듯한 주전자의 비명도 수그러든 채였다. 주위는 고요했다.
부엌이었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너른 등. 달그락달그락 그릇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커피 향기가 났다. 누구지… 아리안의 의문이 너무 길어지기 전 그 등이 몸을 돌렸다. 붕대가 감긴 가슴팍이 드러났다.
‘붕대… 피… 칼릴!’
아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리안은 주방의 식탁에 엎드려 기댄 채 짧게 잠들어 있었다. 가스 불을 켜고 주전자를 올려놓은 지 불과 십 분가량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지친 몸이 기절한 듯 잠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십 분 사이에 침실을 빠져나온 칼릴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어, 어….”
아리안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시선이 앞에 선 차원 마수를 위아래로 더듬었다.
그는 한 손에 커피포트를, 한 손에 머그 컵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불 꺼진 가스레인지 위 주전자가 수증기를 흐리게 뿜었다. 머그 컵에서는 커피 향기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단추를 느슨하게 채운 셔츠 깃 사이로 붕대를 감은 가슴팍이 보였다.
그는 침착했다. 자세는 꼿꼿했으며, 눈은 부상자 같지 않게 차분했다. 그 푸른 눈은 차원 마수의 눈이었다. 과거, 수많은 인신 공양의 대상으로서 숭배되었던 고대 신의 흔적이 거기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무언가를 파악하려는 듯이 아리안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긴장으로 아리안의 어깨가 굳어지고 손등에 소름이 돋았다.
1분조차 되지 않는 짧은 응시였으나 시간은 상대적이었으므로 아리안 시점에서는 그 스무 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손이 후들거리면서 무릎에 힘이 빠졌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식탁에 손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칼릴은 아리안의 후들거리는 손이 허공에서 식탁까지의 70센티미터 고작 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그것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가 예고 없이 한 발자국 앞으로 떼어 놓았다.
아리안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다리 뒤로 식탁이 닿았다.
칼릴은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아리안의 맞은편 식탁 위치까지 걸어왔다.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둔 불과 서너 발자국뿐이었다.
긴장감이 첨예해지면서 아리안은 그에게 말을 걸어야겠다는 알 수 없는 의무감에 휩싸였다.
“…커피 마실래?”
정작 커피포트는 칼릴의 손에 있었다.
아리안은 혀를 깨물었다. 자기소개부터 할 것을 뒤늦게 떠올렸던 쾰른에서에 이어 두 번째 후회였다.
“어, 나는 아리안이고… 널 알아.”
자기소개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맞던가?
“…그러니까, 네 소개는 안 해도 된다는 말이었어. 음. 일단 오늘은 아직 1999년 12월 3일이야. 물론 그레고리력으로. 네가 기억하는 날짜하고 차이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여긴 시베닉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인데, 마을에서는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널 발견한 데에서는 한 7킬로미터 정도… 다른 눈에 띄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도. 참, 상처는 걱정 마. 그다지 깊지 않았고, 응급 처치를 했으니까. 물론 잘 꿰매지는 못했지만, 겸자가 없었거든. 그런 식으로 상처를 처치한 건 2차 대전 이후로는 처음이라서….”
5분이 지난 뒤 아리안은 스스로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강한 욕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불거리는 혀를 간신히 깨물어 멈췄다.
“…일단 앉을래?”
그 권유에서야 정물처럼 미동 없던 칼릴의 표정에 움직임이 생겼다. 한쪽 눈이 가느스름하게 접히면서 마치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리안은 식은땀이 조금씩 배어 나오는 손바닥으로 나무 의자 등받이를 꾹 움켜잡으면서 다시 말했다.
“커피라도….”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이미 네 손에 있긴 하지만….”
더 말을 하느니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천만다행히도 아리안이 스스로의 혀를 자르거나 목을 졸라 버리기 전에 칼릴이 입을 열었다.
“커피를 달라는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그게 아니라는 변명을 할 틈도 없었다.
칼릴이 몸을 돌려 찬장에서 머그 컵을 꺼냈다.
아리안은 넋을 놓고 그가 커피포트를 기울여 새 컵에 커피를 따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탁, 묵직한 머그 컵이 아리안 앞에 놓였다. 원두커피 향기가 진하게 올라왔다. 얼굴이 붉어졌으나 이제 와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변명하기에도 늦었다.
아리안은 손을 뻗어 컵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칼릴을 힐긋 힐긋 곁눈질했다.
칼릴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여 커튼 닫힌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아리안은 그가 자신을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아무것도 안 물어봐?”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던진 질문에 칼릴이 심드렁한 시선을 보내 왔다.
“뭘 물어봐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라거나… 왜 널 구했냐거나. 뭐 그런 거.”
“글쎄. 묵시록에 불만을 가졌거나, 로마 공회에 불만을 가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컵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던 아리안의 손가락이 멈췄다.
칼릴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긴, 쾰른에서의 일은 벌써 다섯 세기도 더 전의 일이었고….
그 순간 칼릴이 머리를 약간 기울이면서 아리안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아니면 쾰른에서의 일을 보답하는 걸 수도 있고.”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기억해?”
칼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푸른 눈꼬리가 살짝 접혀 아래쪽으로 떨어지자 희미한 눈웃음 같은 것이 거기에 걸렸다. 그것은 처음 보는 종류의 미소였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그건 제법 인상적이었지. 게다가 지금 세기에 와서는 널 모르기도 힘들고.”
로마 공회가 언제나 한 몸이었던 것은 아니다. 엄밀히 따져 보면 하나였던 시기보다는 여러 개로 갈려 싸워 왔던 시기가 더 길었다. 15세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안은 따지자면 ‘고대 신’의 한 갈래였고 당시에는 이단이었다.
“아무튼 지금 이게 쾰른에서 내가 널 구했던 것에 대한 보답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리안은 심장이 점점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기억하고 있었어! 칼릴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고 안 해도 돼. 난 그냥 재판 결과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니까 널 구한 거야.”
그리고 혀를 깨물었다.
“물론… 쾰른에서의 보답도 있구.”
그 뒤에 아리안은 칼릴의 눈치를 살피면서 식탁 의자에 슬쩍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아리안은 더는 조금도 인내할 수 없었다. 그의 인내심은 이미 지난밤 시베닉의 황야 어딘가에 쓰러졌을 칼릴을 찾아 헤매며, 그리고 밤새도록 그를 간호하며 모두 닳아 없어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 된 거야?”
오랫동안 참아 왔던 질문이 튀어 나갔다.
“다들 별거 아니라고 말했다구. 기껏해야 육칠십 년, 많아야 백 년 정도가 선고될 거라고 했어. 물론 이쪽 시간으로! 당신 변호사는 뭘 한 거야? 대체, 대체….”
그에게 선고된 형기는 한 문명이 저물 때까지의 기간이었다. 그건 무기 징역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그런 결과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불공정한 재판이었다. 예언을 근거 삼은 고발이라니. 묵시록의 예언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해석에는 아직 논란이 많았다.
“신성 재판은 프리크라임이 아니야….”
기어이 아리안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불공정했어! 그리고 당신 변호사는 무능했고!”
“진정해. 세기말이잖아. 검사가 실적에 안달 나 있을 시기지. 실적을 올릴 수만 있다면 묵시록이 아니라 노스트라다무스라도 끌고 왔을걸.”
정작 칼릴은 시큰둥했다.
아리안만 씨근거렸다.
“항소해야 해.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구.”
“내 재심 청구에 동의해 줄 다른 두 명은 있고?”
칼릴이 되물었고, 아리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찾아보면 돼. 해 줄 것 같기도 한 사람도 있고….”
“아하, 그래?”
칼릴은 그다지 신뢰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으며, 사실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도 미심쩍을 정도로 태연했다.
“칼릴.”
아리안은 식탁 너머 칼릴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공회는 이전과 달라. 언제까지 집행관을 피해 도망쳐 다닐 수는 없어.”
그 말에 칼릴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까지’라. 아주 전형적인 삼차원적 표현이군.”
그가 컵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컵이 밑으로 낙하했다. 끝없이.
동시에 칼릴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익,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그는 식탁 위에서 컵을 다시 집어 들었다.
창문을 향해 몸을 돌린 그의 등은 절벽처럼 굳건했다. 그가 한 손으로 커튼을 약간 젖혔다. 얼핏 드러난 커튼 틈으로 먹구름이 드글거리는 지평선이 보였다. 굵은 눈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른 오전, 아침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끊임없이 지면을 향해 떨어지는 벼락만이 인기척 없는 평야를 밝히고 있었다.
아리안이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커튼을 도로 잡아 닫았다.
“…은신이 완벽하지 않아. 적어도 신전 기사단이 여길 떠날 때까지는 주의해야 해.”
칼릴은 잠시 아리안을 내려다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창문에서 뒷걸음질 쳐 물러섰다.
“신전 기사들이 쉽게 추적을 포기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마… 모르겠어. 다른 쪽으로 유인해야 할지도 몰라.”
“유인이라고? 무슨 수로?”
“어떤 수든….”
아리안은 대충 얼버무렸다.
“이리 와. 상처를 한 번 더 봐야겠어. 회복이 빠르다면 실밥을 빨리 풀어야 해.”
차원 마수들의 회복력을 가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환자는 협조적이었다. 칼릴은 얌전히 아리안을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