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10)화 (110/130)

#110

그러자 수많은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를 울렸다. 이 연극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칼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리안은 그가 자신을 바라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칼릴의 눈이 아리안의 얼굴에서부터 천천히 움직여 마지막으로 단검을 쥔 손에 닿았다.

아리안의 입 안에 침이 마르고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단검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떨리는 두 손을 애써 겹쳤다.

칼릴이 다시 시선을 올려 요한을 바라보았다.

“뭘 원해?”

“글쎄에. 내가 뭘 원할까?”

요한이 히죽거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칼릴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조잡한 결계로 여기까지 날 불러낸 만큼의 가치를 가진 걸 원하겠지.”

“아, 물론이지….”

요한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동시에 그림자들이 하나씩 툭, 툭, 쓰러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벽을 따라 걸려 있는 램프들의 불도 차례대로 꺼졌다. 거대한 석실이 어두워지면서 음악 소리가 점점 우렁차게 커져 갔다. 시끄러운 나팔 소리, 심벌즈 소리, 끊임없는 북소리.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요한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면서 커졌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리안은 눈앞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칼릴과 요한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으나 더 이상 아리안의 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리안은 예언에 대해 생각했다.

재앙의 왼쪽 어깨. 그것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요한이 칼릴의 신체를 차지해 이 차원을, 로마 공회를, 더 나아가 우주 전체를 파괴할 힘을 손에 넣는 순간을?

요한은 이 석실에서 칼릴의 몸을 차지할 생각이다. 이전 국왕의 신체를 차지했듯이. 이곳은 결계로 뒤덮여 있고 칼릴은 그걸 알면서도 이곳에 왔다. 어째서?

그 순간 벽력같은 깨달음이 아리안을 꿰뚫었다.

‘내가 라이오스였어.’

그는 테이레이시아스도, 이오카스테도 아니었다.

그는 라이오스였다.

예언을 피하기 위해 친아들을 죽이려 했던 미친 왕. 라이오스의 행동이 결국 오이디푸스를 테베로 불러들여 예언을 성사시켰듯이 아리안이 예언을 피하기 위해 했던 모든 행위가 칼릴을 이 석실로 불러들였다.

‘아니야!’

아직, 아직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리안은 퍼뜩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메데이아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 무기는 오로지 단 한 번, 칼을 매개로 한 희생을 통해 권능을 되살린다. 메데이아는 칼릴을 찌르라고 말했다. 그건 아마 아리안의 신성과 불멸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칼릴 정도로 강력한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겠지.

그렇다면 칼릴은?

그의 몸에 남은 상처를 회복시키고 권능의 마지막 한 조각을, 요한의 불결한 희생제와 타락한 결계로도 침투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필요할 것인가?

‘충분해.’

아리안은 그렇게 답을 내렸다.

그는 팔을 뻗어 요한의 길게 늘어진 비단 튜닉 자락을 움켜잡았다. 두 남자가 동시에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요한의 눈썹이 야릇하게 일그러지더니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아리안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댔다.

“왜 그래? 응?”

“칼릴과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게 해 줘.”

“…무슨 생각이야?”

요한이 낮게 속삭였다.

“네가 이제 와서 놈을 찌른다 해도 난 상관없어. 내 일을 더 쉽게 만들 뿐이야… 네가 권능을 되찾는 것보다 내가 그 쪼개진 신체를 차지하는 속도가 더 빠를걸. 아주 간단한 수학이잖아. 응?”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요한이 눈을 옆으로 찢어 칼릴을 힐끔 곁눈질했다. 그러더니 다시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허리를 펴고 양팔을 벌렸다.

“뭐. 좋아. 맘대로 해. 버림받은 복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안 그래?”

이번에는 칼릴에게도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아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칼릴을 바라보았다. 칼릴은 무표정했다. 그는 청동상처럼 굳건했고 또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리안은 그의 잠든 얼굴을, 음식을 잘라 건네주던 손길을, 뜨거운 입맞춤을 안다.

그는 아픈 다리를 끌면서 느릿느릿 칼릴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마지막 단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이제 둘 사이에는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짧은 거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칼릴.”

그 부름에 칼릴이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은 천천히 단검을 검집에서 뽑아냈다. 검신이 소리 없이 검집을 미끄러져 빠져나왔다. 검날은 눈부신 흰빛이었다.

칼릴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아리안은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푸른 눈, 높은 이마, 아름다운 머리카락. 아리안은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미소 짓고 싶었으나 잘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숙이고 칼릴을 향해 검을 쑥 내밀었다.

“무슨 짓이지?”

칼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리안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칼릴. 내가….”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기에 그냥 도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리안은 칼릴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쳐 단검 자루를 쥐여 주었다.

“무슨 짓을….”

그리고 칼릴이 눈썹을 치켜 올린순간 칼날을 향해 뛰어 들었다. 칼릴의 눈이 커졌다. 등 뒤에서 긴 비명이 터져 나온 것도 같았다.

아리안은 그 순간에서야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려 냈다.

“이제….”

그러나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었다.

<8> 성전

율리우스력 1449년 6월 4일.

쾰른 교구 739번째 재판 기록.

391명의 피고인 중 321명이 자백하였고 59명이 불시험(Feuerprobe)으로, 다시 11명이 물시험(Wasserprobe)으로 악마의 하수인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마녀 또는 마법사로 밝혀진 321명에게 재판 비용을 청구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율리우스력 1449년 6월 5일.

부르고뉴 공국의 발루아-부르고뉴 공작, 비테르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 브란델부르크 선제후, 헝가리의 국왕, 저지대 국가들의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이 쾰른을 방문하였다.

율리우스력 1449년 6월 6일.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24명의 유대 왕과 24명의 유대 장로 중 묵시록의 왕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같은 날, 대성당의 제실에 안치된 동방 박사의 유골함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같은 날 정오, 피의 종이 390번 울렸다. 프레티오사 종이 따라서 1번 울렸다.

독일 왕 프리드리히 4세가 남쪽 탑에 새로운 종을 설치할 것을 명령함에 따라 남쪽 탑의 공사가 재개되었다.

***

‘그렇게까지 화려할 필요는 없었지 않나.’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상아색 우단으로 장식된 천장에는 특이하게도 양손에 각각 책과 열쇠를 든 성 마태오와 날개 달린 사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벽체와 바닥에는 천장과 같은 상아색 쿠션이 씌워져 있어 몹시 푹신했으며 흔들림이 적었다.

마차는 호화로웠다. 적어도 대귀족이 쓸 만한 것이었다. 아리안은 그 호화로운 마차에 비스듬히 모로 누워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골함에서 핏물이 흘러넘치게 한 건 확실히 심했어. 그 종소리도.’

그가 누운 자리에서부터 피가 흘러 마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가 비단 장식을 적시는데도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 남자. 스테인드글라스의 피눈물부터 유골함, 391번의 종소리까지. 아리안을 구하기 위해 그 온갖 화려한 짓거리를 벌인 장본인.

아리안은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이 마차만큼이나 값비싼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금 자수가 들어간 화려한 자홍색 튜닉을 입었고 벨트에는 눈물만 한 작은 금강석이 줄줄이 박혀 있었으며 튜닉 위로 올라온 흰 러플 목깃도 윤기 흐르는 비단으로 된 고급품이었다. 은박으로 무늬를 입힌 어두운 남색 망토가 그의 한쪽 어깨를 휘감고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아리안은 시선을 더 위로 올렸다.

반듯한 얼굴.

마차의 황금 장식만큼이나 빛나는 고수머리가 남자의 높은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로마식으로 귓등이 보일 만큼 짧게 쳐 낸 머리카락 덕에 이목구비의 윤곽이 더욱 도드라졌다. 모든 것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균형 잡혀 있었다.

누군가 그의 뒤의 마차 벽체에 후광을 그려 넣는다면 이 남자는 성화 속의 등장인물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그 비슷한 종류이긴 했다.

다차원 생물종. 차원과 차원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이 희귀하고도 위험천만한 종족이 누군가를 구하는건 드문 일이었다.

‘나베리우스, 단탈리온, 모라, 스킬라… 아냐. 전부 아니야.’

아리안을 구할 만한, 적어도 안면이 있는 다차원 생물종은 많지 않았다. 이 남자는 그중 누구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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