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소식이란 게… 뭔데?”
“오. 그래. 좋은 소식, 아주 좋은 소식이지. 틀림없이 너도 좋아할 거야.”
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리안은 심장이 불길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도르센 군이 퀸트 관문 지척까지 도달했다는군.”
기어이 심장이 쿵 떨어졌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가슴이 아플 정도로 조여졌다.
“하루 이틀이면 관문에 도착할 것 같다는데….”
그렇게 말을 잇던 요한이 아리안 쪽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뭐야아. 왜 그런 표정이지? 기쁘지 않아? 사랑해 마지않는 대공이 온다는데.”
입술이 굳어 버린 것처럼 아무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소금 기둥처럼 굳어진 아리안의 얼굴 이쪽저쪽을 들여다보면서 시시덕거리던 요한도 그 반응이 이어지자 재미없다는 듯이 픽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넓지 않은 방을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빙글 몸을 돌려 아리안을 응시했다.
“사실 이건 내 예상을 벗어난 일이긴 해. 난 퀸트가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고 도르센 군대를 들여보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도 그럴 게… 내가… 거기로 가는 지원금과 식량을 끊은 지가 꽤 됐단 말이야?”
그가 고뇌하는 척 손가락으로 턱을 짚고 머리를 한쪽으로 깊게 기울였다.
아리안은 혐오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싶었다. 그러나 아리안은 아직 확신을 얻지 못했으며 기회는 오로지 한 번뿐이었으니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아리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망국의 왕 놀이를 하려고?”
“맞아!”
요한이 즐거운 듯이 크게 외쳤다.
“바로 그거야! 망국의 왕 놀이. 그도 그럴 게 망국이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끝나잖아? 하지만 이봐, 내 상황도 생각해 줘. 여기 있는 개돼지들이 돈이 여간 드는 게 아니란 말야.”
“네가 그렇게 만든 거지.”
“그럴 싹이 있는 놈들이었어.”
“모든 사람에게는 싹이 있어, 어떻게 움틀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걸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게 우리가….”
“오, 잠깐. 기다려 봐. 그다음은 내가 잘 알지. 우리 ‘높은 자들’이 할 일이라 이 말이지?”
그리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아아… 정말 재미없어. 재미없다구. 좋은 방향? 그건 어떤 방향인데? 이봐, 신관 나으리… 아니지. 옛 높으신 분이시여. 너도 봐 왔을 거 아냐? 수천 개 차원의 수억 개 행성에서 수천억 번 반복된 진부한 스토리 말야. 불쌍한 어린양들이 이리 삐뚤, 저리 삐뚤, 그러면 너희들 높으신 자들이, 마치 양 떼를 몰듯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몰아가지.”
그가 검지로 한쪽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지성이라고는 없는 하등 생물 다루듯이…. 지겹지도 않아? 그 짓을 언제까지 하려고? 그러니 개소리 좀 그만하라고, 왈왈왈!”
요란스럽게 개처럼 짖어 댄 그가 삽시간에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빙긋 웃었다.
“물론 너는 예외야. 그 지루한 굴레를 끊고 실제로 필멸의 한 자리에 내려서신 분이잖아? 아주 대단해! 감동적이야!”
요란스러운 박수가 뒤를 이었다. 조롱 섞인 박수갈채에 아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
언제나 아리안은 남을 설득하는 데에는 재능이 없었다. 게다가 항성이 빛을 발하고 행성이 궤도를 도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을 설명하는 데에는 더더욱. 선함과 빛을 추구하는 데에 어떻게 이유를 갖다 붙이겠는가?
“그러시겠지. 높은 자들 중 가장 높았던 분이시여.”
요한이 조롱조로 툭 내뱉었다.
그가 아리안에게서 흥미를 잃은 것처럼 휙 몸을 돌렸다.
“아무튼 상황이 예정하고는 달라졌지만 내 계획은 그대로야. 퀸트 관문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지 않겠다면 내가 열어 주면 되는 거지.”
“항복하겠다고?”
“설마. 그렇게 재미없는 짓을.”
그가 쯧, 혀를 차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씩 웃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였다.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그것이 주르르 밑으로 펼쳐졌다.
“대공이 내 초대를 받아들였거든.”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는 무심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요한이 마치 그를 놀리듯이 서신을 허공에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리안은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편지 말미에 크게 찍힌 문장. 도르센 문장이었다. 아리안이 그 내용을 읽으려고 눈을 위로 올린 순간, 요한이 도로 편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말했지? 난 문을 열어 줄 거라고. 물론… 아주 정당하게. 어디까지나 초대자 입장에서 말이야.”
그가 훌쩍 날듯이 다가와 손가락 끝으로 아리안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킬킬거리는 미소가 뒤이었다.
“그러니 대공은 부하들 없이 혼자 올 거야.”
아리안의 숨이 거칠어졌다.
말도 안 된다. 편지는 가짜임이 분명했다. 아리안을 골탕 먹이려는 요한의 못된 수작질이 틀림없었다.
“…그가 이제 와서 네 초대에 응할 리가 없어. 여기 들어오고 싶었다면 언제든 들어올 수 있었을 테니까.”
“아하. 다차원 생물종. 차원을 접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니는 짐승들. 물론 그러시겠지. 하지만 말이야.”
요한이 눈꼬리를 양순한 척 떨어트리며 두 손을 자신의 쇄골 밑에 다소곳이 모아 잡았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시간이 조금 많은 게 아니었잖아? 차원의 끈을 실타래처럼 뱅뱅 꼬아 놓는 귀찮은 짓거리에 몰두할 정도로 충분히.”
아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다차원 생물종들은 결코 살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선례가 있었다. 레비아탄이 그랬고 티아마트가 그랬고 파프니르가 또 그랬다. 그들을 묶어 놓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더 쉬웠다. 솔로몬의 72개 봉인처럼.
요한이 낄낄대면서 다소곳이 모았던 손을 허공에 팔랑거렸다.
“대공을 환영할 아주 성대한 연회를 준비해 놨지. 호수의 뱃놀이나 사냥제 따위보다 더! 더 엄청난 걸!”
그의 양팔이 쫙 벌어졌다.
그는 아리안을 향해 마치 기립 박수를 받은 희극 배우처럼 자랑스럽고 벅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대해도 좋아.”
“칼릴은….”
“안 온다고? 그거야 그때 가서 볼 일이지. 물론 안 와도 난 상관없어. 오든 안 오든 연회는 있을 거야.”
요한은 한바탕 신나게 웃어 젖히더니 갑작스럽게 아리안의 손목을 난폭하게 낚아챘다. 아리안이 휘청였다. 탐욕스러운 일왕자의 거죽을 뒤집어쓴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건 바로 오늘 밤이야. 넌 그 한가운데에 있을 거고. 왜냐하면 네가 주역이거든.”
요한이 그를 사납게 끌어당겼다.
아리안은 짐승처럼 질질 방 밖으로 끌려 나갔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어둠에 잠긴 계단은 끝도 없이 길었다.
요한은 아리안이 넘어지거나 비틀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악스레 끌고 갔다. 평소라면 그의 주위를 얄랑거리며 맴돌 하인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낮이었는데 삽시간에 해가 사라진 것처럼 복도는 어둑했다. 계단 난간 위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뚝, 뚝, 뚝, 반복되었다. 아리안은 몇 번이나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때마다 요한이 그를 우악스럽게 잡아 일으켰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계단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영원히 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시간 감각이 흐릿해졌다.
어느 순간, 계단이 끝났다. 짐승의 입처럼 뻥 뚫린 통로 끝, 불길한 핏빛 문이 굳건히 서 있었다.
아리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저 문을 기억했다. 삼 년 전 일왕자의 모략에 빠져 희생제의 산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그 밤, 그때의 석실이었다.
“아, 안 가!”
아리안이 발에 힘을 준 순간 요한이 아리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놔! 놔!”
그는 발악하는 아리안을 마치 새끼 양 짊어지듯 어깨에 짊어지고는 붉은 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문을 걷어차 열었다. 쿵! 육중한 문이 덜컹거렸다. 안에서 축축한 바람 한 줄기가 쇄액 쇄도해 왔다. 입을 벌린 어둠 속으로 요한이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음산한 공기가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갑작스레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불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스러운 음악이 흘렀다. 쿵, 쿵, 쿵, 작은 북을 두들겨 대는 소리가 석실과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실눈을 떴다.
석실은 대낮처럼 환했다. 양쪽 벽에 수십 개의 황금 램프가 주르르 걸려 있었다. 원숭이가 공을 타며 심벌즈를 쳤고 배가 나온 난쟁이가 뚱뚱한 손가락으로 현악기를 연주했다. 곰이 나팔을 불었다. 정신 사납고 신나는 음악이 석실을 쿵쿵쿵 울렸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역광을 받아 마치 그림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깔깔댔다. 건드린 흔적 없이 먹음직스러운 김만을 모락모락 올리고 있는 음식들이 식탁에 가득 차려져 있었다. 무언가를 가리기 위한 것처럼 짙은 향신료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