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음산한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는가 싶더니 뚝 멈췄다. 몸서리쳐지는 불쾌함에 아리안의 등 뒤로 솜털이 바짝 올라왔다. 불길한 예감에 아리안은 엉덩이를 뒤로 밀어 조금씩 물러났다.
요한이 그런 아리안을 기이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목마른 것처럼 그의 목울대가 꿈틀댔다.
“육신의 정욕이란 신기한 거야.”
난데없는 소리에 아리안의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정신한테까지… 영향을 미치거든….”
그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가늘어지며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 눈. 아리안은 그 눈을 잘 알았다. 요한의 눈이라기보다는 나일의 것이었다. 이전 그가 아리안을 탐내서 벌인 소름 끼치는 짓들이 단번에 떠오르며 전신에 소름이 돋고 공포가 엄습했다.
침묵처럼 멈춰 서 있던 요한이 침대 쪽으로 성큼 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침대를 밀어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물컹대는 매트리스에 손바닥이 푹푹 잠겨 시트 위에서 허우적댔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단번에 고블릿을 바닥으로 내팽개친 요한이 침대로 달려들었다.
“악!”
아리안이 비명을 올렸다.
요한의, 아니 이제 아리안은 그것이 요한인지 나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정욕으로 들끓어 오른 남자의 몸이 아리안을 짓눌렀다. 우악스러운 손이 몸통을 사납게 더듬어 댔다.
“하아, 하아. 신격을 잃어 아쉽게 됐다만 네 쓸모라는 게 거기에 있는 것만은 아니지.”
요한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빠르게 지껄였다.
“뭐어, 적어도 그 차원 마수는 네 쓸모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게 분명해.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널, 후욱, 도르센 밖으로, 놓칠 리가….”
그의 숨이 점점 빨라지고 가슴팍이 들썩댔다. 그가 아리안의 뺨으로 얼굴을 눌러 마구 비벼 댔다. 피부가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감촉에 아리안이 숨을 멈췄다. 양서류의 피부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솜털이 삐죽 치솟고 소름이 내달렸다.
“하지 마, 하지 마!”
“내가 널 그때 놓치고서 어찌나 아쉬웠는지… 한 번이라도 네 몸을 맛봤어야 했는데. 응? 너도 아쉬웠지?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네 발로 여기까지 돌아올 리가 없잖아!”
요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팔이 달아나려 몸부림치는 아리안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끌어안았다. 결국 요한의 두 팔 사이에 갇힌 아리안이 히익, 하고 목 졸리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이 신체가 널 얼마나 탐냈는지 알면… 아, 몇 번쯤은 허락해 줄 것을 그랬지? 응? 못난 동생 놈이 그날 널 빼앗아 가지만 않았어도 듬뿍 귀여워해 줬을 텐데….”
자아가 요한과 나일을 오락가락했다. 요한 스스로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발버둥 치는 아리안의 하체를 자신의 하체로 짓뭉갰다. 다리가 얽히면서 하반신이 겹쳐졌다. 기겁한 아리안이 요한의 팔을 물어뜯었다.
“제기랄! 가만히 있어!”
요한이, 또는 나일이 거친 욕설과 함께 아리안의 뺨을 후려갈겼다. 딱딱한 손바닥이 뺨을 후려치며 아리안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단번에 눈앞이 핑 돌면서 정신이 까무룩 흐려졌다가 돌아왔다. 이런 고통은 그야말로 오랜만이었으며 수백 번을 겪는다 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못하리라. 한쪽 코에서 코피가 흘러 인중을 적시며 입술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으읏….”
아리안은 자신의 피 맛을 느끼면서 고통에 신음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에도 핏기가 고였다.
요한이 아리안의 몸을 다시 타고 올랐다. 그가 아리안의 뺨을 손끝으로 마치 애완동물 어루만지듯 느릿하게 더듬었다. 통증이 올라왔다. 아리안은 그 손을 피해 꿈틀대면서 반대편으로 기어가려 했다. 그 순간 요한이 반대편마저 따귀를 올려붙였다. 아리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맞은 방향대로 고꾸라져 얼굴을 처박았다. 코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려 비단 시트를 흠뻑 적셨다.
후욱, 후욱, 요한이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목깃을 한 손으로 풀어 헤쳤다. 그의 관자놀이와 목덜미에 땀이 배어났다. 땀으로 젖은 얼굴이 불쑥 아리안에게로 들이밀렸다. 번들거리는 눈이 부푼 뺨, 피에 물든 입술, 자그마한 턱, 사슴의 것처럼 길고 미끈한 목을 차례대로 집요하게 훑었다.
그가 히죽대면서 아리안의 턱과 뺨을 쓰다듬었다.
“성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 봤지.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으니까. 근데 그거 알아? 그 짓도 사실 몇 세기쯤 지나면 지겹거든. 다 거기서 거기니까. 하지만… 정말이지… 넌….”
그의 눈이 몽롱해졌다.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리안이 다시 비명을 지르기 직전, 그가 너덜너덜해진 옷 틈으로 손을 와락 밀어 넣었다. 양손이 옷 속을 헤집으며 느슨해진 솔기가 투둑 뜯어졌다. 그 손이 아리안의 양 가슴팍을 쥐어 비틀었다.
“하지 마….”
“하하!”
아리안의 힘없는 애원에 요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싫어? 이 짓을 각오하고 돌아온 게 아니었어?”
그가 킬킬거리면서 아리안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혀를 길게 내밀어 가슴 끝의 몽우리를 핥았다. 몇 초 정도 맛을 보듯 핥다가 미친놈처럼 달려들어 가슴을 쥐어뜯으며 유륜을 입속으로 빨아들였다.
“신관이 되어선 이런 발칙한 젖통을….”
그가 추잡한 음담을 씨불여 대면서 헐떡였다.
“이걸 대공도 예뻐해 주던가? 응? 빨아 줬어? 하하! 나라면 여기에 고리를 달아서 꺼내 줬을 텐데….”
그가 뭉툭하게 부푼 유륜을 손가락으로 움켜쥐고 비틀어 대면서 혀끝으로 몽우리 틈을 쑤셔 댔다. 첩첩대는 추잡한 소리가 울렸다.
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폭력은 아리안을 꺾지 못한다.
이 신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뒤에 죽어 없어질 살덩어리. 그러니 이 신체가 겪는 고통 또한 잠시 눈을 감고 기다리면 지나갈 찰나의 산들바람에 불과하다. 그 어떤 더러운 폭력도 더 이상 아리안을 오염시킬 수 없다.
‘이런 건 참을 수 있어.’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그렇게 다짐한 순간, 그의 위에 올라탄 요한의 몸이 덜컹 흔들렸다. 짐승처럼 헐떡이던 요한의 숨소리가 뚝 멎었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다음 순간 아리안의 얼굴 위로 미지근하고 비릿한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아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요한의 얼굴이 앞에 있었다. 그 얼굴, 코와 충혈된 안구로부터 시커먼 핏줄기가 줄줄 흘러내려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였다.
오염된 생피. 그것을 인식한 순간 역겨운 시취가 아리안의 코를 찔렀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더 이상 그 피는 필멸자인 그에게 치명적이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 그를 지배했던 공포와 혐오가 그의 몸을 굳어지게 했다.
“후후….”
요한의 웃음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가 천천히 한 손으로 자신의 하관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거뭇한 피가 줄줄 흘러넘쳐 아리안의 콧잔등과 미간으로 투둑투둑 떨어졌다.
“아하하하, 후후, 후흐흣, 흐흑, 흐흐흐, 흐윽.”
웃음과 헐떡거림이 뒤섞여 한참을 이어진 끝, 고통스러운 호흡이 흘러나왔다. 요한이 고장 난 기계처럼 광기 어린 혼잣말을 쏟아 냈다.
“흐흐, 역시, 이 육신도 약해… 꽤 버텨 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이게 한계인가. 그래도 시간은 벌었으니. 흐흣, 뭐어, 상관없어. 이제… 다시… 더 강인한, 더 튼튼한 몸으로….”
그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던 핏줄기도 이제 멎었다.
아리안은 여전히 꼼짝 못 하고 굳어 있었다.
요한이 비틀비틀 아리안에게서 몸을 들어 올렸다. 이제 정욕은 사라진 듯 차분한 표정이었으나 피로 얼룩진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광기가 흘렀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아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눈이 반대 방향으로 데굴 굴렀다. 아리안은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차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몸을 내던졌다. 요한이 달려들었다.
시트가 밀리고 베개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아리안이 조금 전 감춰 두었던 단검이 그 틈에서 튀어나왔다. 아리안의 손끝에 단검이 걸렸다. 요한이 아리안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우드득 손목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렸다. 아리안은 비명을 참았다.
치열한 몸싸움이 이어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패배가 보이는 싸움이었으나 아리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 하하, 하아, 하하학, 흐흣!”
요한이 웃음인지 괴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아리안의 손목을 꺾고 반대편 손으로 목을 졸랐다. 아리안은 몸부림쳤으나 숨이 막히며 팔다리가 느슨해졌다. 기어이 손마디에 힘이 풀리며 움켜쥐고 있던 단검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요한이 무릎으로 검을 침대 밖으로 밀어냈다. 텅, 그것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게 네 계획인가? 응? 가랑이 사이로 날 쪽쪽 빨아서, 흐! 정신 못 차리게 한 틈에, 날 찌르려고? 아하핫! 안타깝게 됐어! 일이 이렇게 되다니 말야!”
요한이 미친 듯이 아리안의 목을 조르며 지껄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