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04)화 (104/130)

#104

요한이 아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눈물 막으로 덮인 녹색 눈, 공포와 수치심으로 달아오른 뺨, 옷을 빼앗기고 찢겨진 천 조각으로 어떻게든 몸을 가려 보려고 한껏 움츠린 어깨 같은 것을 탐욕스러운 시선이 찬찬히 훑었다.

요한이 갑작스레 아리안을 번쩍 안아 들었다. 옷을 빼앗긴 아리안은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했다. 그는 요한의 팔을 움켜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광기 어린 눈동자들이 그를 쫓았다. 그러나 섣불리 요한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요한은 태연하게 아리안을 안아 든 채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그의 발치마다 헐벗은 사람들이 몸을 던졌다. 손가락이 그의 발등을 더듬고 숭배를 올렸다. 광대들이 경박스럽게 심벌즈를 울려 댔다. 쨍, 쨍, 쨍, 쨍! 모든 것은 고대의 광기 어린 희생제를 연상시켰다. 약과 술에 취해 알몸을 서로 비벼 대며 난교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는다 주장하는 광란의 제식이 바로 이것을 닮았다.

부들거리는 입술을 악문 채 아리안은 연회장을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샌가 난교 파티의 소란함이 등 뒤로 멀어졌다.

저벅, 저벅, 저벅, 요한의 발소리만이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가 어느 순간 우뚝 멎었다.

아리안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동시에 요한이 그를 어디론가 내동댕이쳤다.

“악!”

아리안은 짧은 비명과 함께 어느 한구석으로 처박혔다. 물컹한 바닥이 그의 몸을 받아 안았다. 푹신거리는 표면에서 몸이 두어 바퀴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씨근씨근 숨을 몰아쉬면서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잠시 주위의 소리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요한의 목소리나 발소리, 또는 숨소리를 포함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간신히 머리를 들 수 있을 만큼 어지럼증이 가셨다.

천천히 손으로 바닥을 짚어 상체를 세웠다. 주위가 느리게 시야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불꽃처럼 아른거리는 황금빛 휘장이었다. 그는 서너 겹의 호화스러운 휘장으로 에워싸인 침대 위에 있었다. 그 침대가 누구의 것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리안이 불에 덴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마치 잡아당기는 것처럼 두 무릎이 매트리스 밑으로 푹 빠져들었다. 매트리스는 마치 늪처럼 물컹거렸다.

“저런. 침대가 네겐 너무 높은가 보군.”

그때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휘장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리안은 화들짝 목소리가 흘러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밖, 번쩍거리는 청록색 타일이 붙은 침실 한가운데에 요한이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높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는 주둥이가 긴 은 술병을 들고 있었다. 그가 술병을 기울여 황금 고블릿에 술을 따랐다. 오랫동안 숙성시킨 농후한 향기가 허공으로 퍼져갔다. 그것은 달콤했으나 달콤함 밑으로 숨길 수 없는 비린내가 느껴졌다.

그 냄새에 아리안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제 몇 조각 남지도 않은 너덜거리는 옷깃 속으로 손을 넣었다. 허리에 단단히 묶어 여민 단도가 만져졌다. 가죽을 동여맨 손잡이를 꽉 쥐자 긴장감이 그를 뒤덮고 손발 끝이 저릿할 정도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긴 어디야? 내 방이 아니잖아.”

아리안은 일부러 먼저 말을 꺼냈다.

한 손에 고블릿을 든 요한이 눈동자를 힐끗 돌려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네 방?”

그가 묵직한 고블릿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대꾸했다.

“아하. 그 방? 몰랐는걸. 네가 그 방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줄은 말야. 너도 알다시피 난… 흠. 네가 그 방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당연히 싫어해. 하지만 어딘들 여기보다는 낫겠지.”

아리안이 용기를 끌어모아서 그렇게 쏘아붙였다.

“너무하는군. 그건 여기서 다섯 번째로 좋은 방이었어. 내가 네게 그 방을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요한이 마치 상처받은 것처럼 지껄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상처받았다는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도리어 아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성에서 다섯 번째로 좋은 방. 칼릴에게 버림받은 뒤 아리안이 파살리아에서 보낸 3년간, 성에 올 때마다 요한이 선심 쓰듯 내주었던 그 방. 사람들이 그 방에 머무는 아리안을 보고 뒤에서 얼마나 수군댔던가. 신관이 늙은 국왕을 침대 위에서 회춘시켰다고, 그 비법이 궁금하다며 킬킬대던 비웃음들.

요한이 황금 고블릿을 입가로 가져갔다. 비릿한 알코올이 비릿한 입술을 적셨다. 히죽거리는 웃음이 그 입술 위로 떠올랐다.

“아까 했던 얘기나 다시 해 보자. 대공이 네게 잘 안 해 줬어? 응? 그렇게 처참하게 버림받고도 못 잊어서 안달 내며 쫓아갔는데, 이제 와서 왜 다시 돌아온 거야?”

그가 친근한 말투로 빈정거렸다.

“차원 마수가 널 배신하기라도 했나? 새 애인을 만들었어? 얘기해 봐. 난 네 편이야. 은혜도 모르는 마수 놈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거든. 알지?”

그리고서는 한참을 킬킬대며 웃어 대더니 침대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맴돌았다. 아리안은 단도 손잡이를 꽉 쥔 채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요한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아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대공 소식은 들었어?”

“…무슨 소식?”

아리안이 반응하자 그는 마치 아리안이 흥미 있어 할 만한 화제를 떠올려서 기쁘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전쟁 말이야.”

아리안은 티 내지 않으려 했으나 호흡이 빨라지고 말았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전쟁.

파살리아까지 오는 길 중간중간 방랑자들이나 피난민들, 또는 이따금씩 들른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소문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모두 부정확한 추측성 항설에 불과했다.

아리안이 들은 마지막 소식은 칼릴과 그의 군대가 남부 연합과의 회담을 위해 엘테아에 도착해 부르텔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벌써 서른 날 전이었다.

“궁금해할 줄 알았어.”

아리안의 표정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요한이 킬킬거렸다. 아리안은 표정을 숨기려고 애썼으나 이미 헛수고였다.

“흐흠. 남부 연합하고 회담이 잘된 모양이야. 아아. 아무래도 더 이상 비스키우스에서 원조를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아. 궁정백이 어찌나 쨍알거리던지. 뭐, 이젠 더는 그런 말도 못 하겠지만.”

그러고서 요한은 아리안을 향해 눈웃음을 보내며 고블릿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 비릿한 미소에서 아리안은 궁정백의 말로를 상상하고 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역겨움과 공포가 적절하게 뒤섞인 감정이 배꼽 밑에서 자글거렸다.

“그리고 대공은… 흐음. 보자. 어디까지 왔다더라….”

그리고서 요한은 아리안이 안달 나게 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오브강을 건너 진격하기 시작했다는데 그 기세가 제법 대단하다더군.”

망국의 왕 역할극이라는 그 개소리는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 보였다.

“이대로라면 파살리아까지 오는 데 한 계절도 안 걸리겠어. 흠. 적어도 이듬해까지는 여기서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뭐, 괜찮아. 대공을 환영할 아주 성대한 연회를 계획 중이거든. 분명 맘에 들어 할 거야. 사실 그렇잖아? 차원 마수들의 취향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지.”

흥분된 목소리가 되도 않는 헛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아리안은 그 개소리들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그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쫓았다. 단도 손잡이를 쥔 손바닥에 땀이 고여 축축했다.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긴장이 강했다.

지금 요한은 혼자였다. 다른 요한들은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재앙이라도 그 수많은 인간들을 오랜 시간 한꺼번에 조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의식을 나눌수록 의지는 흐려진다. 가장 거대한 영혼을 지닌 신들조차 정신을 가르는 것을 경계했다.

아리안의 추측이 맞는다면 지금의 요한은 단일 개체였다.

지금이 기회일까?

단도를 쥔 아리안의 손에 느리게 힘이 빠져나갔다.

아니. 아직 아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조금 더 신중해야 했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고 눈앞의 요한이 유일한 요한임이 분명해질 때까지.

아리안은 한 손으로 칼을 꽉 쥐고 반대편 손으로 시트를 천천히 끌어당겨 칼을 숨겼다. 그것과 동시에 술잔을 든 요한이 몸을 휙 돌려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려 꼬리뼈 위에 한 방울 고였다.

그가 느릿느릿 침대로 가까워졌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아리안의 입 안에 침이 말라 갔다.

다섯 발자국, 네 발자국, 세 발자국…….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쳐다봐? 응?”

한 발자국을 남기고 요한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이 몸이 마음에 드나?”

그러면서 그가 자랑스레 양팔을 척 벌려 보였다.

“나쁘진 않은 몸이지. 그 늙은이하고는 당연히 비교도 안 되고. 뭐어, 이 정도면 제법….”

야릇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어때? 이 몸은 널 제법 마음에 들어 했는데. 아니. 아니지. 제법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열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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