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이대로 죽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 없는 국왕의 버석거리는 몸뚱이에 깔린 채 버둥대는 아리안을 어디선가 뻗어 온 강한 손이 일으켜 세웠다.
우산을 든 시종은 여전히 그림 같은 고요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쏴아아, 빗소리는 요란스러웠으나 마치 영화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아리안이 스스로 서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다해 무릎에 힘을 주고 있을 때, 그를 일으킨 손이 아리안을 종잇장처럼 흔들었다. 아리안은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다른 손이 이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리안은 뜨겁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품에 끌어안겼다.
“아직 쭈글쭈글해지지는 않았군. 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은 모양이야. 그리고, 어디 보자….”
정수리에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지껄여 댔다.
“약간 여위었고… 키가 자랐어. 예쁜 얼굴은 여전해. 다행이야. 이제 네게 볼 거라곤 그 얼굴뿐이니까. 안 그래?”
차가운 손이 아리안의 뺨과 턱을 징그럽게 더듬었다. 아리안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노, 놓….”
그러나 말이 끝나기 전에 우악스럽게 턱을 잡혀 고개가 들려 올라갔다.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아리안의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오다가 사그라들었다.
일왕자 나일의 얼굴을 뒤집어쓴 요한이 거기 있었다. 그가 아리안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그나저나 대공이 잘 안 해 주던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다시 돌아왔어? 그것도 네 발로. 재미있는 파티 계획이라도 세웠나?”
마치 아리안의 계획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질문이었다. 아리안의 눈이 커지고 호흡이 빨라졌다. 그것을 잠자코 바라보는 요한의 얼굴 위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흐흥. 뭐어, 아무래도 좋아. 아무튼 돌아온 걸 환영해. 파살리아는 언제나 신관에게 활짝 열려 있거든.”
그가 아리안을 끌어안지 않은 반대편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동시에 빗속에 도열한 시종들이 우레같이 짝짝짝짝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빗소리에 그 박수 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사이코 호러 영화에나 나올법한 광경이었다. 아리안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한바탕의 기립 박수가 끝난 뒤 요한이 아리안을 향해 야릇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귀한 신관을 언제까지 빗속에 세워 둘 수는 없지. 자, 들어가자구.”
요한이 아리안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안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큰 우산을 든 시종이 그를 따랐다. 비가 우산 안쪽으로 들이치지 않도록 비단 장막을 펼쳐 든 시종 다섯 명이 함께 움직였다. 빗방울이 그들의 정수리와 어깨를 두들겨 댔다.
아리안은 무력하게 요한에게 끌려갔다.
긴 도보 여행으로 해진 신발 바닥이 두껍게 깔린 양털 융단 위에서 질질 끌렸다. 힘없는 무릎이 꼬여 몇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요한은 아리안이 휘청거리든 발이 꼬여 넘어질 뻔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긴 회랑이 나왔다.
대리석 회랑의 곳곳에는 황금 촛대와 향로가 놓여 있었다. 향로에서는 기이한 향이 피어올랐고 촛불이 벽에 기하학적인 그림자를 그렸다.
“환영식을 준비했어.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하느라고 미흡한 점이 많긴 하지만 너그러이 이해해 주겠지? 응? 넌 자비로운 신관이니까.”
요한이 빠르게 지껄여 대면서 회랑 끝으로 아리안을 끌고 갔다.
회랑 끝에는 양쪽으로 열리는 커다란 문이 붙어 있었다. 요한이 한 손으로 그 문을 열어젖혔다. 문 안쪽에서 가느다란 연기와 일렁대는 불빛이 흘러나왔다. 연기에는 야릇한 향이 섞여 있었다. 아리안은 그 향을 마시지 않으려고 입과 코를 막고 숨을 참았다. 요한이 아랑곳 않고 아리안을 끌고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쿠웅.
등 뒤에서 문이 느리게 닫혔다.
겹겹이 드리워진 비단 휘장 덕분에 안쪽의 광경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장막 너머로 쿵, 쿵, 쿵, 쿵,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북소리 사이를 왁자지껄한 환호성, 고함,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이 채웠다.
“파살리아의 연회는 오랜만이겠군. 도르센은 어떻던가? 응? 비교할 만하던가?”
“하아, 하아, 놔줘….”
저 안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든 그다지 기꺼운 일은 아니리라. 아리안이 희미하게 꺼져 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요한은 마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휘장을 한 팔로 걷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음악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사랑과 젊음을 찬양하는 노랫가락이 함께 들리기 시작했다. 깔깔깔깔, 숨도 못 쉬는 것 같은 웃음소리. 환호성. 헐떡이는 숨소리. 교성. 모든 방종과 향락에 젖은 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여 아우성쳤다.
요한이 드디어 마지막 휘장을 걷었다.
그들은 흰 대리석 계단이 열두 칸 높게 세워진 꼭대기에 서 있었다.
요한이 나타나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광대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공 위에서 재롱을 부리던 난쟁이가 경망스럽게 박수를 쳐 댔다.
“파살리아의 일왕자 전하! 비스키우스의 주인! 그리고 우리 위대한 파살리아의 망나니께서 드십니다아아아!”
누군가가 나팔을 불었다. 요란한 박수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느작거리는 천으로 몸을 절반 정도 가리고 나머지 절반은 드러낸 채였다. 단단한 가슴팍을 드러낸 사내가 요한을 향해 양팔을 내밀고 껄껄 웃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포도주를 부었다. 나이 든 여자가 젖가슴을 출렁거리며 달려들어 남자의 가슴팍에서 포도주를 핥았다.
연회장의 곳곳에는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광대와 난쟁이, 원숭이, 곰이 사방에서 나팔을 불고 종을 치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무용수들이 긴 비단 끈에 매달려 공중에서 춤을 췄다.
음산하게 쏟아지는 폭우가 무색하게 연회장에는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다. 한가운데에는 길고 커다란 식탁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온갖 사치스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모두들 먹고 마시고 성교하고 있었다.
성 바깥에서 노인과 아이들이 굶어 죽고 목숨을 건 피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와중에 이곳에서는 남는 음식과 술이 버려지고 사람들은 비단과 보석으로 몸을 휘어 감은 채 약과 술과 섹스에 취해 있었다.
요한이 아리안을 질질 끌고 이 향락과 타락의 구덩이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향했다.
세 사람은 족히 앉을 듯 커다란 의자에 그가 앉았다. 그가 아리안을 같은 의자에 앉히자마자 수 쌍의 손이 달려들어 요한을 더듬고 아리안을 따라서 더듬었다.
아리안은 그 손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는 절박하게 도움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것은 번들거리는 탐욕스러운 눈동자뿐이었다. 그 눈동자 중 절반은 요한이었고 나머지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연회장에는 요한들이 가득했다. 미친 자리였다.
“여기선 이런 옷을 입으면 안 돼요!”
“벗겨! 벗겨 버려!”
“찢어, 다 찢어 버리자!”
“전하! 이자는 누구인가요?”
눈이 몽롱하게 풀린 여자가 요한의 허벅지 위로 몸을 던지면서 물었다. 그녀의 손은 요한 반대편에 앉은 젊은 남자의 가슴팍을 더듬고 있었다.
“이자는 신관이야, 에머릭. 진실로 신실한, 하나뿐인 신관이지.”
요한이 킬킬거리면서 대꾸했다.
“아! 신관님!”
에머릭이 비틀거리면서 아리안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나한테도 축복을 내려 주셔요!”
그녀의 손이 달려드는 것과 함께 다른 손들도 아리안을 더듬었다. 망토가 벗겨지고 소매의 솔기가 지익 뜯겨 나갔다. 매듭이 풀리고 옷자락이 찢어졌다.
“신관이래!”
“신관의 몸에 닿았던 천이야!”
“이건 내 거야!”
사람들이 아리안이 걸쳤던 옷을 탐욕스레 갈기갈기 찢었다.
“안 돼! 그만둬!”
아리안은 비명을 지르면서 그 손들을 막아 보려고 했다. 요한이 낄낄거렸다.
어디선가 손이 뻗어와 아리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누군가는 아리안의 발등을 핥았다. 반대편 발을 어디선가 뻗어 온 손이 미친 듯이 긁어 대며 끌어 내렸다.
“하지 마! 하지 마!”
아리안은 혼비백산해서 비명 질렀다. 여기서 아리안을 도와줄 사람이라고는 요한뿐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요한의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 하지 말라고 해, 하지 말라고… 악…!”
“하지 말라고 할까?”
요한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공포가 아리안을 덮쳤다. 여태까지 아리안은 요한에게서 그가 뒤집어쓴 껍질의 흔적을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일왕자처럼 보였다. 더러운 정욕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 아리안은 혼란에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요한일까, 아니면 일왕자인가?
“응? 대답해 봐, 신관. 하지 말라고 해?”
그때 누군가가 아리안의 헐벗은 종아리를 핥아 대기 시작했다. 두꺼비 껍질처럼 축축한 손바닥이 희고 보동보동한 허벅다리를 감싸고 안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아리안은 비명을 애써 억누르며 요한을 응시했다. 요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정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아리안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리안은 눈물을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