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그가 성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달했을 때 푸른 화살 깃을 단 살이 쏘아져 그에게서 열 발자국 떨어진 바닥에 꽂혔다. 일종의 위협 사격이었다.
아리안은 멈춰 섰다.
시간이 얼마 흐르기 전에 성벽 안쪽에서 열 명의 기수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얼굴을 모두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아리안의 팔을 묶고 얼굴에 두건을 뒤집어씌운 뒤 말 등에 짐을 실어 고정시키듯 꽁꽁 매달았다. 아리안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관문 안쪽으로 끌려갔다. 차갑고 습기 찬 방이었다. 반듯한 벽돌을 쌓아 만든 벽 뒤쪽에서 두 여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표정이 없었고 칼을 차고 있었다.
“국왕 폐하께 전해 주세요. 요한을 만나러 왔다고….”
아리안은 그 말을 했다.
여자들이 잠시 서로에게 눈짓을 보내다가 몸을 돌려 나갔다.
병사들이 아리안의 짐을 뒤졌다. 허름한 옷가지, 신발, 수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녹슨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메데이아의 단검을 찾아냈다. 병사들은 단검을 뽑아 보려고 했으나 덜걱거리기만 할 뿐이었고, 얼마간 씨름한 끝에 그들은 그것이 위협용 장난감이거나 아니면 너무 녹슬어 뽑히지 않는 고철이라고 판단 내렸다. 한바탕 헤집어진 짐가방이 도로 아리안에게 던져졌다. 아리안은 그것을 끌어안고 차가운 방에서 사흘을 더 보냈다.
사흘 뒤 새벽, 드디어 문이 열렸다. 다시 두 여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아리안을 양쪽에서 에워싸고 감시하며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리안은 그 둘 외에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천장이 높은 복도를 지나칠 때 경계심 어린 시선들을 느끼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아리안은 창문이 없는 마차로 끌려갔다. 마차는 아무 무늬도, 특징도 없었고 바퀴는 세 개였으며 날렵한 근육으로 뒤덮인 거마 두 마리가 매여 있었다. 여자 하나가 아리안의 등을 밀어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차 내부는 아리안 한 명이 무릎을 구부리고 웅크릴 정도의 크기가 겨우 되었다. 좌석은 딱딱했고 천장은 낮았다. 창문은 없었지만 문틀이 꽉 맞지 않아 그 틈으로 바깥을 아주 약간 살필 수 있었다.
아리안이 간신히 좌석에 자리를 잡자 여자가 마차 문을 쿵 닫았다. 동시에 마차 앞쪽이 한 번 덜컹 내려앉았다. 마부가 마차에 올라앉은 모양이었다.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아리안은 가죽 가방을 양팔로 꽉 끌어안고 좌석에 웅크려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촥,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퀸트 관문에서 파살리아는 멀지 않았다. 관문은 파살리아의 출입구이자 동시에 최후의 방어점이었다.
마차는 쉼 없이 내달렸다. 말들이 입에 거품을 물 때가 되어서야 마부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 물을 먹이며 짧은 휴식을 가졌다. 아리안은 문틈으로 밖을 훔쳐보았다.
길은 잘 닦여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도로 왼편으로는 국왕의 사냥터가 펼쳐져 있었다. 숲은 어딘가 음울한 기색을 풍겼다.
말에게 물을 먹인 마부가 마차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아리안은 문에서 얼굴을 떼고 좌석에 다시 웅크린 처음의 자세로 돌아갔다. 곧장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표정 없는 마부가 예리한 눈초리로 아리안을 살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리안이 살아 있는지, 별다른 점은 없는지 한 번 훑고서는 다시 쿵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아리안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감아 버렸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부는 세 번을 더 짧게 쉬었다. 이동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운송에 가까웠다. 아리안은 좁은 마차에 짐처럼 구겨 넣어진 채로 파살리아까지 옮겨졌다.
파살리아 성벽이 보일 무렵은 한밤중도 지난 새벽녘이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성벽을 점점이 밝히는 불빛이 일렁였다.
밤새 달린 마차가 속력을 늦췄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눈에 핏발이 선 말들이 입에 피거품을 문 채로 헐떡였다.
아리안은 뒤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한참을 시달린 끝에 절반쯤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는 마차 바퀴가 돌 타일이 깔린 잘 정비된 길 위를 굴러가는 덜컹, 덜컹, 하는 소리를 몽롱한 의식 속에서 들었다.
마차의 문틈으로 희뿌연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제 마차는 파살리아 성내에 있었다.
아리안은 더 이상 재앙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는 메데이아의 칼을 꽉 움켜쥐고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메데이아는 말했다. 단 한 번 뽑을 수 있다고. 그렇다면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한 번. 목숨을 걸 수 있는 단 한 번. 그는 이제 목숨을 걸고 재앙을 찌를 것이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몇 번을 되풀이해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리안의 긴장감과 상관없이 그를 태운 마차는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파살리아의 분위기는 국왕의 사냥터처럼 음울했다. 도시의 모든 것에서 패색이 짙었다. 둘째 왕녀의 전사, 그리고 그에 연이은 남부 연합의 배신은 파살리아 전체를 절망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아직까지는 비스키우스에서 오는 물자 덕분에 버티고 있었지만 남부 연합이 도르센 대공의 편을 들어 비스키우스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된 지금, 그 원조가 끊기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발은 빠르게 거세져 마차 지붕을 후둑후둑 두들겨 댔다.
한참을 더 가서 마차가 멈췄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기세가 여전했다.
쿵, 철퍽, 마부가 몸을 일으켜 마차 아래로 뛰어내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마차 문 쪽으로 다가왔다.
아리안이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콰당 문이 열렸다.
흐릿한 빛이 어둑한 마차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갈라져 색색거리는 부름과 함께 마차 안쪽으로 말라비틀어진 고목 가지 같은 두 손이 불쑥 뻗어 들어왔다.
흡, 아리안은 비명을 삼켰다. 심장이 삼 초쯤 멈췄다가 다시 미친 듯이 빠르게 뛰어 댔다.
“후욱, 후욱, 후욱, 흐으으….”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마차 안쪽으로 흘러들어 왔다.
무거운 반지가 손가락마다 끼워져 있는 검버섯 핀 주름투성이 손. 그 손이 마치 아리안을 찾듯이 느릿느릿 마차 안 허공을 더듬었다. 아리안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 좌석 뒤쪽으로 몸을 한껏 붙여 웅크렸다. 그러나 마차는 비좁아서 더는 피할 구석이 없었다.
그 손이 기어이 아리안의 양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신관이여.”
국왕이었다.
부스러질 것만 같이 말라비틀어진 얼굴이 아리안을 향해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국왕에게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말년의 티토노스1)처럼 늙고 추했다. 얼굴에는 곰팡이 같은 검버섯이 가득했고 눈가가 늘어져 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고통과 회한만이 가득한 늙은이. 동정을 사기에 더없이 적합한 초라한 모습이 아닌가.
아리안은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을 뻔했다.
“오랜만이군. 내가 그리웠어?”
그러나 그 자글거리는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가 떠오른 순간, 아리안의 몸은 굳어졌다.
그와 함께 주름진 넝쿨 같은 손가락이 아리안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국왕이 아리안을 덮어 누르듯이 와락 끌어당기고서는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늘어진 피부 밑으로 음산하게 빛나는 눈동자.
이것은 불쌍한 노인이 아니었다. 이것은 요한이었다.
단도를 쥔 아리안의 손에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와락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요한을 찌르면 모든 게 끝이었다. 재앙도, 저주도, 예언도…. 그러나 그 순간, 아리안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쏘아 지르는 것 같은 집요한 시선이 요한의 등 뒤에서부터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리안의 떨리는 눈이 그 시선의 출처로 향했다.
호화로운 망토를 걸친 국왕의 어깨 너머, 시종이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종의 양쪽 뒤로 다시 서른 명은 될 법한 시종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아리안을 향한 채였다.
아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목덜미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생리적인 불쾌함으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저 수십 쌍의 눈. 저것들은 모두 요한의 눈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요한이었다.
그 순간 요한이 우악스럽게 아리안을 마차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아리안은 휘청거리면서 끌려 나갔다. 오랜 시간 마차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다리에 피가 돌며 저릿한 고통이 발끝부터 무릎 위까지 내달렸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리안을 움켜쥐고 있던 요한의 늙은 신체가 무게를 못 버티고 따라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국왕의 옥체가 바닥을 구르는 그 처참한 순간에도 도열한 시종들에게서는 미동조차 없었다.
[각주]
1)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연인. 에오스는 제우스에게 그를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이때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잊었기 때문에 끝없이 늙어 최후에는 매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