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101)화 (101/130)

#101

아리안은 인간을, 그들이 사는 대지를, 때로는 그 혈통을 사랑한 수많은 불멸자들을 알았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쳤고 판도라는 상자를 열었으며 로물루스는 일곱 개의 언덕에 천년을 이어질 대제국을 건설했다.

아리안은 성벽 위에 서서 말없이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땅과 하늘을 나누는 빗금 위로 긴 겨우내 조용히 잠들어 있던 첫째 태양이 팔을 뻗어 대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는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여명을 바라보다가 성벽에서 내려왔다.

계절이 바뀌고 왕국 내의 길이 다시 열리며 칼릴은 더 바빠졌다. 몇 개로 나누어진 군대가 순차대로 도르센을 떠나 올굽을 향했으며 엘테아의 항구에서는 군대를 이동시킬 거대한 군선이 건조되었다. 도르센에는 눈에 띄는 옷을 입은 남부의 칙사가 드나들었다.

칼릴은 출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엘테아에서 그의 정예군과 함께 배를 타고 남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왕녀가 생전 주둔했던 부르텔로 간다. 왕녀는 죽었고 이제 그녀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남부 연합으로 흡수되었다. 남부 연합은 그를 부르텔로 불러들이는 대신 그가 파살리아를 공략하는 동안의 원조와 비스키우스의 견제를 약속했다. 부르텔에서의 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칼릴은 곧장 파살리아를 향해 진군할 것이다.

그러면 겨우내 멈춰 있었던 전쟁이 다시 시작되겠지.

‘전쟁….’

아리안은 기도실 제단을 올려다보았다. 제단 위, 반질거리는 은 촛대 표면에 비친 얼굴이 그를 마주 보았다.

전쟁과 정치는 언제나 그의 일은 아니었다…. 그가 전쟁에서 읽는 것은 파괴와 죽음과 고통, 눈물뿐이었다.

아리안이 짤막하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떨어트렸을 때 문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하게 고개를 돌린 아리안은 그대로 굳어졌다.

칼릴이 기도실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오전이었고 칼릴은 한창 바쁠 시각이었다. 요즈음 그는 잠조차 줄여 가며 전쟁 준비에 매진했다. 며칠이고 요새를 비우는 날도 많았다. 이런 시간에 그를 보는 건 그야말로 오랜만이었다.

아리안은 엉겁결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끼익 바닥을 긁었다.

칼릴은 그 소리는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아리안을 향해 걸어왔다. 한 발자국 앞에서 그가 멈춰 섰다. 긴 눈이 아리안을 관찰하듯이 살폈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뜬금없는 말에 아리안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맞았다. 칼릴의 눈은 어딘지 열에 들뜬 것처럼 보였으며 마치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계획대로라면 가을이 오기 전에 닛사를 보낼 거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닛사의 마법이면 도르센에서 파살리아까지는 닷새가 안 걸리니 겨울이 와서 길이 닫히기 전에 파살리아에 도착할 수 있겠지.”

그제야 아리안은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전쟁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그 이후.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도르센으로 돌아오지 않고 아리안을 다시 파살리아로 데려갈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일 년은 짧아. 물론 네겐 더 이상 그렇지 않겠지만.”

상처 주려는 의도라기에는 칼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아무튼 그의 말이 맞았다. 한 해는 더 이상 아리안에게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없는 동안은 부르조가 널 보살필 거다.”

칼릴은 아리안에게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다시 약간 돌렸다. 머리가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며 시선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그 예리한 눈빛이 아리안의 옆얼굴을 훑었다.

“정말로 파살리아에 재앙이 있다면….”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고, 이번에야말로 아리안의 얼굴이 공포로 굳어졌다.

칼릴은 그 창백해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너희 예언이 진짜일지 아닐지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되겠지.”

칼릴이 떠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

아리안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질질 끌 만한 시간도 없었고.

다행히 그에게는 당장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투박한 옷, 따듯한 망토, 튼튼한 신발(이것들은 아리안이 가장 먼저 구한 것이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딱딱한 빵과 칼로 썰어야 하는 질긴 육포 덩어리, 말린 과일 약간(그의 몫으로 나오는 따듯한 음식을 하인들의 음식과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돈 대신 쓸 수 있는 사금 알갱이 한 줌(성의 일꾼들 사이에는 사적인 거래가 활발했으므로 이 또한 손쉬웠다).

먼 여정을 떠나기에 충분했다.

도르센은 평상시와 같았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수많은 기사들과 정예군이 한꺼번에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공전 궤도처럼 일정하게 제자리에서 움직였다.

아리안만이 그러지 않았다.

그가 여느 때와 같은 차림으로 방을 나왔을 때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고 그에 대해 아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이미 칼릴과 함께 도르센을 떠났다. 그리고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부르조는 칼릴을 만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파살리아에서 탈출했던 그가 도르센을 빠져나가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못했다.

아리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중정을 빠져나와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통로를 걸었다.

그는 몸종들이 언제 성을 드나드는지 알았다. 쓰레기와 오물을 싣고 나가는 마차가 어느 문을 통해서 나가는지, 기름 장수가 언제 오는지, 가축에게 줄 여물을 어디로 가져오는지. 그 틈에 끼어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며, 그는 언제나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법을 잘 알았다.

아리안은 정오가 되기 전에 다섯 겹의 성벽을 빠져나왔다. 흐릿한 태양이 서쪽으로 10도 정도 더 기울어졌을 때 아리안은 높은 구릉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청회색 하늘에는 까마귀 몇 마리가 날고 있었다. 뒤를 돌자 황무지를 양단하는 성벽 줄기가 보였다. 우뚝 솟은 거대한 요새도 보였다.

칼릴은 가을을 말했다. 그가 파살리아 공략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배분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가을 전에는 퀸트 관문을 넘어 파살리아까지 진입하겠다는 의미였다.

만일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면 초여름에는 퀸트 관문을 통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아리안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군대의 이동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고 아리안은 그보다 더 빨리 움직일 자신이 있었다.

그는 망토 안쪽에 손을 넣어 단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칼릴이 파살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재앙은 사라지고 예언은 무위로 돌아갈 것이며,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칼릴도 권능을 되찾게 되리라. 그리고, 그러면, 그러고 나면….

아리안은 단도를 한 번 더 꽉 움켜쥐었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다시 몸을 돌렸다.

그의 앞으로 서리가 녹지 않은 길이 펼쳐졌다. 대로를 피해야 했으므로 그 길은 비좁았고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지 오래되어 울퉁불퉁했다. 그러나 아리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걸어서 왔으니 걸어서 갈 수 있으리라.

***

도르센에서 파살리아는 멀었다. 이 두 도시는 사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이는 대략 마드리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도의 거리였다.

대로를 따라 말을 달린다면 이십 일, 중간에 엘테아 뱃길을 이용한다면 더 단축시킬 수도 있겠지만 아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큰길을 피해 산과 들판을 가로질렀다. 야생 감자나 먹을 수 있는 허브, 봄 딸기를 주워 가며 이동했다.

여정이 절반쯤 왔을 때 아리안은 텅 빈 농지를 지나갔다. 마을의 집들은 여럿이 비어 있었다. 전쟁으로 차출당한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마을은 황량했다. 한창 농번기였음에도 밭은 비어 있었고 몇몇 노인들이 이랑을 따라 메밀을 심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곳에서 사금 알갱이를 먹을 것으로 바꿨다.

날씨는 오락가락했다. 봄 한복판에 서리가 내렸다. 때아닌 비가 하루 종일 쏟아지기도 했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늙은 물푸레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던 와중, 아리안은 피난민 행렬을 만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굶주림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오랜 전쟁과 몇 년을 이어진 흉작, 자연재해에 시달린 사람들은 모두 표정이 없었고 지친 안색이었다. 아리안은 그들에게 이전 마을에서 바꿨던 식량을 주고 대신 얼룩덜룩한 천을 엮어 만든 우비를 받았다. 그는 망토 위에 우비를 걸쳐 입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남쪽으로 갈수록 피난민 행렬을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대부분은 엘테아를 향했다. 올굽으로 가거나 아예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리안은 길게 이어지는 그 고단한 행렬을 바라보며 쇠락한 차원의 말로를 예감했다.

무너져 가는 세계.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지 못하고 꺼져 가는 불빛.

차원 틈에 균열이 생겨 척력은 약해지고 인력은 점차 강해진다. 해가 가까워지고 백야가 길어지며 해일이 인다. 기상 이변이 이어진다. 자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혜성과 위성들을 끌어모은다. 행성 핵의 질량은 점점 무거워져 마침내 전자 축퇴압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아리안은 이제 권능을 잃었으므로 단지 그 끝을 추측할 뿐이었다.

퀸트 관문에 도착했을 때는 봄의 말엽이었다.

관문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두 산맥 사이에 우뚝 솟은 성벽은 거인의 등처럼 보였다. 강철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높은 성벽 위에 화톳불이 점점이 이어졌다.

아리안은 천천히 요새를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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