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이한 침묵을 눈치챘는지 노인이 주름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리안은 몸을 비스듬하게 돌린 채 성벽 밖을 바라보고 있어서 노인의 눈에는 아리안의 귓불과 뺨의 단면만이 보였다. 그러나 거기에 드리워진 수척한 빛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노인은 혀를 찼다.
“쓸데없는 걱정을. 자네가 잘만 하면 자넬 안 데려가시겠나?”
완전한 오해였다. 하지만 아리안은 노인의 착각을 해명하는 대신 그냥 고개를 저었다.
노인이 혀를 쯧 차고는 몸을 돌렸다.
“가세나. 너무 오래 있었어. 뼈마디가 시리는구만. 그래도 내일모레쯤에는 슬슬 해가 뜰걸세. 뭐 도르센의 봄이야 서리 녹듯 짧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부르조는 아리안을 다시 중정까지 데려다주었다. 돌아오는 길, 아리안은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는 복도와 회랑, 기둥과 벽을 하나씩 눈여겨보았다.
아리안이 돌아오자 늙은 몸종이 화로를 다시 채울 새 숯과 뜨거운 차를 가져왔다. 아리안은 차를 받고 몸종을 내보냈다.
그는 기도실로 들어갔다. 기도실에도 화로가 놓여 있어서 공기가 온화했다. 아리안은 기도실 벽의 장식용 창틀로 다가갔다. 창틀을 덮은 두꺼운 태피스트리를 젖히고 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벌리자 안에서 단도가 나왔다.
가죽으로 손잡이를 동여매었을 뿐 그 외에는 어떤 장식도 없는 투박한 단도.
아리안은 그것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칼이 대답이었다.
아리안은 단도를 가죽 주머니에 다시 넣어 잘 묶고 도로 태피스트리 뒤에 놓아 두었다.
몸을 돌리자 기도실 제단 위에 놓인 초가 짤막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보다 오랫동안 단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모양이었다.
아리안은 촛대를 들어 곁의 다른 초로 불을 옮겼다.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기도실을 노크했다.
아리안은 촛대를 들고 문가로 나갔다. 말수 적은 몸종이 서 있었다. 그가 칼릴의 호출을 알려 왔다. 아리안은 짧아진 초의 길이를 보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평소보다 이른 귀환이었다.
아무튼 아리안은 몸종을 따라 기도실을 나왔다.
칼릴의 침실은 기도실에서 고작 서른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다. 도르센의 옛 주인들은 그림자 마수로부터 자신을, 그리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신관을 가까이에 두었다. 칼릴은 다른 이유로 아리안을 가까이에 두었다.
몸종이 문을 열었다. 아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몸종은 따라 들어오지 않고, 등 뒤에서 문을 닫아 주었다.
아리안은 익숙한 구조의 응접실을 가로질러 내실 쪽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수십 개의 초가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큰 벽난로에는 장작이 가득했고 불길이 이글거렸다. 방 안은 더울 만큼 따스했다. 칼릴은 벽난로 맞은편에 서 있었다.
아리안은 잠시 멈춰 서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벗어 던지고 간소한 셔츠와 바지만 입은 차림이었다. 흰 셔츠 밑으로 너른 어깨부터 허리까지 좁아지는 긴 선이 드러나 있었다. 등 근육의 결을 따라 매끈하게 잘록해지는 허리 아래로는 검은 바지뿐이었다. 아리안은 이미 그 흑백 의복 아래의 몸을 알았다. 시선을 애써 돌렸다.
그때 칼릴이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상반신의 절반이 드러났다. 셔츠의 목깃은 매듭이 풀려 쇄골 뼈가 우묵하게 모이고 그 아래로 두툼하게 흉근이 부푸는 곳까지 드러나 있었다.
“이리 와.”
아리안은 그가 부르는 대로 다가갔다. 칼릴은 아리안을 끌어당기는 대신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아리안은 그가 걷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둥근 탁자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음식의 가짓수는 열 종류 정도가 되었고 모두 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도르센 포도 품종으로 담근 포도주도 있었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유리로 된 길쭉한 호리병에 담겨 있었으며 술잔도 묵직한 주석이나 황동으로 된 것이 아니라 색이 들어간 유리잔이었다.
칼릴이 아리안에게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아리안은 고분고분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칼릴의 자리는 그의 맞은편이었다.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아리안은 접시 표면에 새겨진 덩쿨 무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음식들은 내온 지 오래되지 않았다. 모두 따듯했다. 브랜디에 재운 도요새 구이, 번들거리는 족발 찜, 얇게 튀긴 양뱃살, 향신료를 아낌없이 사용한 흰 스튜, 가시를 발라내 구운 철갑상어, 버터와 과실이 듬뿍 들어간 달콤한 파이, 수십 겹의 결로 찢어지는 부드러운 빵, 거기에 적어도 다섯 가지 종류의 말린 과실이 반달 모양 유리그릇에 담겨 있었다. 식사 시종이 없는 자리였으므로 음식들은 먹기 쉽게 조리된 채였으며 2인분이라기에는 충분히 많았다.
칼릴이 먼저 식기를 들었다.
대화는 없었다. 식기와 그릇이 부딪치며 달각거리는 소리만 났다.
아리안은 그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이 식사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리안은 자신 몫의 접시에 가장 가까이 있는 빵을 집어 가져왔다. 얇은 시트 수십 장을 겹쳐 구운 빵은 몹시 부드러웠으며 버터의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것을 깨작거리고 있자니 이전 파살리아에서 함께 식사했던 기억이 났다. 그 늦은 오전, 닛사와 오스발이 양옆에 앉아 있었고 칼릴은 아리안의 접시로 마치 부모 새처럼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그가 잘라 주었던 사슴 고기, 장미 열매 잼을 듬뿍 넣었던 파이 조각, 해산물 스튜와 송어구이…. 아리안은 그 식사 자리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쩐지 목이 메었다.
아리안은 양고기 튀김을 덜어서 칼릴의 접시로 옮겼다. 칼릴의 눈썹 끝이 약간 올라갔다. 아리안은 움츠러들지 않고 연이어서 스튜 그릇을 칼릴 쪽으로 가깝게 밀어 주었다.
칼릴은 눈썹을 찌푸린 채 아리안이 하는 꼴을 보고 있다가 잠자코 커다란 스튜 대접에서 건더기와 국물을 함께 떠올려 작은 그릇으로 옮긴 뒤 그것을 아리안에게서 가까운 쪽에 내려놓았다.
아리안이 멈칫했다. 칼릴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짤막하게 명령했다.
“먹어.”
“난….”
아리안이 뭔가 말하려고 했을 때 칼릴이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도르센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전보다 여위었군.”
“아니야.”
아리안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윈 게 아니라 키가 자라서 그래.”
그 대답에 칼릴의 얼굴이 굳었다. 차갑고 건조한 얼굴에 아리안은 지레 찔끔해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묵묵히 아리안을 바라보던 칼릴이 눈에 힘을 풀며 식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각, 그가 쥔 포크가 은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이따금씩 울렸다.
얼마 안 있어 칼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낮에 부르조와 같이 있었다던데.”
“응. 성벽 위를 보여 줬어.”
아리안은 슬쩍 칼릴의 눈치를 보았다.
“가면 안 되는 곳이야? 화난 거 아니지? 아마 그 노인도 몰랐을 거야.”
칼릴은 조용히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여긴 길을 잃기 쉬우니 몸종을 데리고 다녀. 부르조가 항상 네 뒤를 쫓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아리안은 길을 찾는 것, 복잡한 모퉁이와 골목에서 방향을 가늠하는 것, 남들이 모르는 길을 찾아내는 것을 모두 잘했지만 그걸 말하는 대신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응.”
그 뒤에 그는 가시를 모두 발라내고 토막 내 구운 철갑상어의 한 토막을 재빨리 칼릴의 접시로 옮겼다. 칼릴은 잠시 손을 멈췄으나, 곧 다시 움직여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리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연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칼릴에게 말린 과일을 덜어 주고 고기를 자르고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칼릴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세 번째로 잔을 채우면서 아리안은 잔 너머의 칼릴을 훔쳐보았다.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 너머로 칼릴의 얼굴은 뿌옇게 일그러져 보였다. 천장의 샹들리에에서 떨어진 빛이 유리에 색을 입힌 부분에 반사되면서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를 떠난 뒤에도 아리안은 이 광경을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남부와의 회담은 순항이었다.
왕녀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었으며 거기에 더해 파살리아의 국왕마저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이 왕국 전체를 가로질러 도르센에까지 도달했다. 이제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모두 그 얘기를 했다. 둘째 왕녀의 죽음과 와병 중인 국왕, 파살리아에 틀어박힌 일왕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공에게 꼬리를 쳐 오는 남부 연합… 전쟁 얘기를 하는 도르센 사람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열기,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승리를 확신했다.
아리안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믿음을 읽을 때마다 궁금하고 신기했다. 칼릴의 정체를 아는 자신보다 어찌하여 이들이 더 칼릴의 승리를 믿어 마지않는가.
그리고 어딘지 울적해졌다. 도르센 백성들이 칼릴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만큼 칼릴도 그러할까? 그런 나머지 힘을 되찾아 가는 지금도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