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99)화 (99/130)

#99

더 용기 내서 손바닥 전체로 뺨을 감싸 안았다. 반듯하고 모난 데라고는 없는 수려한 얼굴의 절반이 아리안의 손바닥에 들어왔다. 아리안은 천천히 그의 얼굴을 만졌다.

그를 이렇게 만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는 아리안이 그를 만져 주는 것보다 그가 아리안을 만지는 것을 더 선호했다.

아리안은 다시 한번 메데이아의 질문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함께 떠올랐다. 죄책감이 그 뒤를 이었다.

‘미안해. 안 좋아할게.’

아리안은 속으로 혼잣말했다가 스스로 도리질 쳤다.

‘아니야. 싫어. 나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이 아프게 조여졌다. 필멸의 심장으로는 버티기 힘든 고조감이었다. 결국 아리안은 참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 잠든 차원 마수의 관자놀이에 키스했다. 칼릴이 마치 그걸 느낀 것처럼 두 팔에 힘을 주어 아리안을 끌어당겼다.

그 강인한 포옹.

머릿속이 일순간 깨끗해졌다.

메데이아가 준 단검, 파살리아의 재앙, 요한 묵시록, 테베의 비극. 그리고 칼릴. 그래. 이 모든 것들 앞에 아리안의 보잘것없는 마음이, 작은 의지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리안은 칼릴의 음영 진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아리안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여긴 테베가 아니고 칼릴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아리안이 테이레이시아스도, 이오카스테도 아닌 것처럼.

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칼릴의 정수리 위로 조심스레 머리를 기댔다. 눈물이 살짝 떨어져 그 금빛 정수리를 적셨다.

***

아리안이 방을 나오자 어디선가 늙은 몸종이 나타나 아리안의 어깨에 두꺼운 양털 망토를 걸쳐 주었다. 모자 달린 망토는 부드럽고 두툼했으며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아리안은 망토 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복도를 걸어 나왔다.

복도와 중정에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이 중정 가운데의 텅 빈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중정은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였고 높은 돌벽으로 에워싸여 있었으며 별다른 장식적인 면모는 없었다. 아리안은 중정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 끝을 기웃거렸다. 모든 통로는 동일하게 생겨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리안은 턱을 들어 까마득한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성벽 위로 흐린 먹구름이 흘러갔다.

시각은 이제 정오를 조금 지났으나 극야의 하늘은 어슴푸레했다. 성벽의 반듯한 선을 따라 희뿌연 빛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리안이 손에 든 촛대를 중정 끝에서 어디론가 아득한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비춰 보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큼큼,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웠기에 아리안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둑한 박명 아래에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고목 같은 눈가로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부르조였다.

“여기서 뭐 하는가?”

그 질문에 딱히 의심의 기색은 없었다. 부르조는 그저 아리안이 혼자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갑갑해서요.”

아리안은 흔들리는 촛불 아래로 노인의 표정을 읽으려고 주의 깊게 살피면서 대답했다.

부르조가 나이답지 않게 재빠른 걸음으로 아리안에게 다가왔다.

“하긴 갑갑할 만도 하지.”

그가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아리안의 곁에 붙어 섰다.

“여긴 길을 잃기 쉬워. 특히 이런 날씨에는 평생을 성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곧잘 길을 잃지.”

노인이 그러면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리안은 그의 등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부르조가 뒤를 돌아보면서 안 오고 뭐 하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서야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부르조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성벽과 성벽, 기둥과 기둥,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 어둠에 잠긴 회랑 사이를 망설임 없이 가로질렀다.

“파살리아 출신들은 여기서 오래 못 버텨. 대공 전하께서만이 유일한 예외지. 뭐. 그분이야 사실 이젠 도르센 사람이나 다름없으시니 예외라 할 것도 아니구만. 그나저나 자넨 파살리아 출신이 맞나? 그래 보이진 않는데. 거기 놈들은 내가 자주 봐 왔는데 말이야. 죄다 비단으로 온몸을 두르고 뻔질뻔질거리거든.”

부르조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노인의 낮은 목소리는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성벽과 성벽 사이를 빙빙 맴돌았고 그 사이를 그들의 발소리가 채웠다.

“남부의 피가 섞였지? 그런 머리카락은 주로 남쪽에서 나거든. 헌데 얼굴은 남부 혈통 같지는 않고.”

아리안이 딱히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부르조는 혼자서 신나게 말을 이어 갔다.

십 분 정도 걸었을까, 성벽이 꺾이며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위에는 이글거리는 횃불이 걸려 있었고 멀찍이서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걸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부르조가 아리안을 한 번 돌아보고는 먼저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아리안은 그를 따라 올라갔다.

계단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성벽은 까마득하게 높았고 중간중간 계단참마다 내부로 들어가는 두꺼운 철문이 붙어 있었다.

숨이 턱 끝에 찰 때가 되어서야 끝이 보였다.

그들은 이제 성벽 위에 있었다.

마차가 지나다닐 만큼 폭이 넓은 성벽 위에는 커다란 도르센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다른 쪽 성벽에 횃불을 들고 움직이는 작은 점 같은 병사들이 보였다.

날아갈 듯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부르조가 하얗게 센 머리를 이마 위에서 손가락으로 긁어 잡으면서 아리안을 돌아보았다.

“기분 전환이 좀 되는가?”

“…네.”

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르조가 혀를 쯧 찼다.

“허구한 날 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외출도 하고 그러게나. 대공 전하께서도 자네가… 크흠! 성안을 조금 돌아다닌다고 뭐라 하시겠는가? 그렇다고 여기저기 망아지처럼 들쑤시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야. 요즘 분위기가 썩 유쾌하지만은 않으니 말일세.”

아리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벽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섯 겹의 방벽이 황무지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었으며 그 방벽에서 이어지는 기나긴 성곽은 황무지를 동서로 양분했다. 어둠에 잠긴 울퉁불퉁한 대지는 폭풍우 치는 난폭한 해수면처럼 보였다.

“요새가 견고해 보이네요.”

그 중얼거림에 부르조가 멍청이를 보듯이 아리안을 보았다.

“당연한 소릴.”

부르조는 설명할 것도 없다는 듯이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긴 왕국의 서쪽 방벽이야. 수백 년간 그림자 마수로부터 왕국을 수호했지. 엉덩이 무거운 파살리아 놈들도 우리가 없었다면 지금껏 콧대 높이고 있지는 못했을걸?”

“서쪽 방벽….”

아리안은 성벽 밖을 바라보았다.

육중하게 솟은 방벽의 서쪽으로 어둠에 잠긴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다시 몸을 돌려 이번에는 반대편을 응시했다. 거뭇한 숲과 불그스레한 토양이 화상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아리안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르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파살리아는 먼가요?”

“파살리아?”

부르조가 미간을 찡그렸다.

“멀지. 여기까지 왔으면서 그런 걸 묻나?”

타박하는 듯한 대답에 아리안은 시선을 돌렸다.

“파살리아에서 엘테아까지보다 엘테아에서 여기까지가 더 머네. 자넨 닛사 경의 마법으로 손쉽게 왔으니까 모를 테지만….”

부르조가 거센 바람 탓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연신 긁어모았다.

“대공 전하께서도 그걸 아시니 골머리를 썩이고 계신 게지. 올굽까지 군대를 진군시키고 물자를 주고받는 데만도 한참 걸리니까….”

“그런 건 마법으로 못 보내요?”

그 질문에 부르조는 그야말로 머저리를 보는 듯이 아리안을 쏘아보았다.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는구만. 마법이란 게 무슨 애들 장난질인가? 닛사 경 앞에선 그런 얘긴 입도 벙긋 말게나. 그나마 닛사 경 정도 되니 대공 전하와 자네까지 단번에 여기까지 옮겨 온 거지 애송이들은 꿈도 못 꿀 일이야.”

부르조가 투덜거렸다. 아리안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거리를 접는다는 그 마법에는 거리나 질량 등 엄격한 제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번 회담만 잘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거야. 대공 전하께서도 발 뻗고 주무시겠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네?”

뜬금없는 질문에 아리안이 떨떠름하게 되묻자 노인이 눈을 부라렸다.

“그때까지 전하께서 심기가 최대한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자네가 알아서 잘 모시란 말이야. 아무튼 지금 전하께서… 가까이 두시는 게 자네뿐이니까.”

그리고서 노인은 민망한 얘길 꺼냈다는 듯이 헛기침을 연신 했다. 아리안도 망토를 묶는 매듭 자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시선을 피했다.

바람 소리만 세차게 울렸다.

한참 성벽 밖의 대지를 바라보던 아리안은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파살리아에 가실까요?”

부르조가 그러시겠지, 하면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노인의 주름진 눈이 자부심으로 빛났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실 게야. 그분께서 파살리아의 주인이 되실 테니까.”

노인은 마치 행성이 자전하고 은하가 팽창하는 것처럼 당연히 도르센이 승리할 것이라는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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