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그는 아리안이 벗기려 했던 망토를 뜯어내듯이 잡아떼어 탁자 반대편으로 내던졌다. 그러고서는 손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갑도 벗어 그 곁으로 떨어트렸다.
아리안은 그 곁에 서서 약간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시선만 들어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칼릴이 짧은 숨을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한숨과 흡사했으나 그보다는 날카로웠다. 그리고 불시에 그의 손이 뻗어져 아리안의 턱을 움켜잡았다. 아리안은 엉겁결에 그 손이 당기는 대로 고개를 들었다. 칼릴이 어느샌가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아리안은 칼릴이 자신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칼릴의 얼굴에는 읽기 힘든 무표정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가 무감정하게 아리안의 턱을 탁 놓았다. 손끝이 따끔하게 스쳤다. 아리안에게서 차갑게 몸을 돌린 남자가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리 와.”
아리안은 약간 머뭇거렸다. 그 짧은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칼릴이 고개를 돌려 아리안을 응시했다. 서늘한 눈이 아리안을 말없이 재촉했다. 아리안은 주춤거리면서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의 몸이 몇 발자국 사이로 가까워지자 그의 팔이 아리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리안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리다가 침대 위로 휙 끌려 올라갔다. 칼릴이 우악스러운 동작으로 아리안을 침대로 눌러 눕혔다. 동시에 손이 옷 밑으로 돌아왔다.
“힉.”
아리안이 목을 움츠렸다. 칼릴의 손은 차가웠다.
칼릴은 한 손으로 아리안의 옷 밑을 만지면서 반대편 손으로는 자신의 튜닉 목깃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매듭과 단추 몇 개가 지익 뜯어졌다. 아리안은 화들짝 놀라 팔꿈치로 침대를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칼릴이 그 틈을 타서 아리안의 허리 뒤쪽을 더듬었다.
“지, 지금, 할 거야?”
“글쎄.”
칼릴은 아리안의 목적어 없는 불분명한 질문에 마찬가지로 불분명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리안이 눈을 들어 칼릴을 올려다보았다.
그 틈에 칼릴은 두 손을 아리안의 등 뒤로 돌려 뒷목에서부터 이어지는 긴 매듭을 단번에 풀어 내고 옷자락을 벌려 젖혔다. 얇은 녹색 장의가 밑으로 흘러내리며 눈부신 양어깨가 드러났다. 칼릴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옷을 더 당겨 아리안의 팔에서 두 소매를 모두 빼냈다.
“아….”
아리안이 낮게 신음하면서 한 손으로 칼릴의 가슴팍을 밀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그가 칼릴을 밀면서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칼릴은 내버려 두었다. 대신 손을 밑으로 내려 아리안의 허리 부근에서 말린 옷자락을 더 밀어 올리고 무릎 위가 드러나게 했다.
아리안이 팔을 뻗어 침대 곁의 작은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둥근 금속 고리가 나왔다. 그걸 집어 드는 아리안의 두 뺨이 숨길 수 없이 붉었다. 칼릴은 그것을 못 본 체했다.
아리안은 양손에 고리를 움켜잡고 칼릴을 올려다보았다. 칼릴은 느긋하게 아리안의 한쪽 무릎에 손을 얹고 있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는 이 고리를 스스로 끼우지는 않았으나 아리안이 끼우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그에 따라 이것은 이제 아리안의 일이었다.
아리안은 망설이다가 몸을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칼릴에게 다가갔다. 허벅지가 서로 스쳤다. 아리안의 몸에 잔 소름이 돋고 뒷덜미에 솜털이 섰다. 아리안은 고리를 쥔 한 손을 조심스럽게 칼릴의 가슴팍에 얹고 다른 손으로 천천히 칼릴의 옷을 벗겼다.
애초에 복잡한 옷이 아니었기에 금방 매듭이 모두 풀렸다. 허리띠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칼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안 자신의 숨소리만 들렸다. 아리안은 숨을 최대한 죽이면서 칼릴의 옷을 마저 벗겼다. 곧 그의 나신이 드러났다. 뼈와 근육으로 섬세하게 조성된 육체.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걸 알아차린 칼릴의 미간이 약간 좁아졌다. 그가 단번에 팔을 뻗어 아리안의 등 뒤에서 휘장을 당겨 닫았다. 그나마 어슴푸레하게 주위를 밝히던 빛이 막히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칼릴의 가슴팍을 짚고 있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근육의 윤곽이 선명한 단단한 하복부를 스쳐 내려간 손이 배꼽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더 밑으로 향했다.
칼릴은 아직 흥분하지 않았다.
아리안은 한 손으로 천천히 그것을 쥐었다. 굵은 줄기가 약간 꿈틀대며 빠르게 경도를 갖췄다. 아리안은 굵기를 가늠하듯 그 뿌리를 더듬었다.
“후우….”
칼릴이 긴 숨을 토해 내며 아리안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커다란 두 손이 아리안의 등을 세게 잡아당겼다. 몸이 더 가까워졌다.
“아직은 안 돼. 더 해 봐.”
칼릴이 아리안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아리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리를 끼우기에는 아직 칼릴이 충분히 흥분하지 않았다. 아리안은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남근 기둥을 쓰다듬었다.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한 애무에 칼릴의 등이 꿈틀거렸다. 선명하게 솟은 견갑골이 파도처럼 오르내렸다.
“더 세게 해.”
그가 명령했다.
아리안은 애써 손에 힘을 주었다. 남근이 꿈틀대며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서서히 발기하는 귀두 갓 부분이 뚜렷하게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고리를 쥔 한 손으로 뿌리를 감싸 쥐고 다른 손으로 귀두 밑부분부터 뿌리까지 빠르게 문질렀다.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성기의 윤곽이 선명해지며 기둥이 힘을 얻어 단번에 위로 솟구쳤다. 아리안은 그 틈을 타서 그 남근 뿌리를 쥐고 고리를 끼웠다. 달칵, 소리와 함께 금속 고리가 뿌리를 꽉 조이며 고정되었다.
흐으, 하는 낮은 신음과 함께 칼릴의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가 아리안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검지와 중지가 아리안의 입술과 그 안쪽을 어루만졌다. 아리안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칼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젖었어.”
칼릴이 조용히 말했다.
아리안의 눈꼬리가 실룩거리면서 눈동자가 습기로 반짝였다.
“이 짓이 기대됐어?”
아리안은 자신의 입 안에 들어와 있는 칼릴의 손가락을 밀어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좆 만지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 으읏.”
칼릴이 단번에 한 팔로 아리안의 허리를 휘어 감으며 침대로 눌렀다. 이제 그는 완전히 흥분했다. 아리안의 애무는 그를 감질나게 했을 뿐이었다.
평소라면 전희가 길었겠지만 오늘 밤은 그렇지 않았다. 칼릴은 아리안의 몸을 다소 난폭하게 더듬다가 뒤집어 놓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바로 삽입해 왔다.
“아…!”
아리안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삽입은 고통스러웠다. 제대로 젖지 않은 구멍은 빡빡했다. 그 틈으로 칼릴이 억지로 귀두를 비집어 넣었다. 두툼한 귀두가 구멍을 찢을 듯이 열었다.
“힘 풀어.”
칼릴이 등 뒤에서 명령했다.
아리안은 애써 온몸에 힘을 풀려고 했다. 잘되지 않았다. 칼릴이 그의 등 뒤로 가슴팍을 붙이면서 한 손으로 아랫배를 밀어 누르듯이 지긋이 감싸고서는 천천히 더 들어왔다.
“흐읏….”
끙끙 앓는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갔다. 이전 여러 번의 성교 경험도 이 고통을 경감해 주지는 않았다.
“흐, 흐으윽… 아파.”
아리안은 흐느끼면서 침대 시트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적셔 줘, 적셔 줘어… 아…!”
“기다려.”
칼릴이 낮게 속삭이고는 아리안의 하체를 위에서 납작하게 깔아뭉개듯이 짓누르고 거세게 안으로 들어왔다. 절반도 삽입되지 못했던 것이 단번에 아리안의 몸을 찢을 듯이 벌리고 푹 꽂혔다.
아리안의 몸이 경련했다. 흰 손등에 푸르게 핏줄이 떴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흐으, 흐으, 하, 하으… 아, 아….”
단번에 끝까지 뚫린 터라 고통이 어마어마했다.
칼릴이 손을 뻗어 아리안의 턱을 잡았다. 얼굴을 억지로 돌리게 했다. 아리안의 뺨은 창백했고 눈가는 붉었고 고통으로 식은땀이 흘러 관자놀이를 적시고 있었다.
칼릴은 천천히 아리안의 몸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귀두 끝을 아리안의 구멍에 걸친 채 자신의 손으로 기둥을 훑어 수음했다. 길지 않았다. 억지로 끌어 올린 흥분은 시각적 자극으로 단번에 고조되었다. 그는 적절하게 자신이 흥분했을 때 다시 아리안을 끌어안고 삽입했다.
“아… 읏….”
아리안의 몸이 꿈틀댔다. 다리가 고통으로 버둥거리면서 무릎께에 휘말린 옷자락이 버석거렸다.
칼릴은 한 팔로 아리안의 허리를 휘어 감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팍을 우악스럽게 주무르면서 느리게 피스톤질했다. 곧 남근에서 스미는 선액으로 안쪽이 미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아, 아, 아, 아, 아! 아….”
아리안의 몸이 점점 붉어졌다. 아직도 안은 빡빡했다. 평소라면 기나긴 전희로 아리안이 젖다 못해 흥건해질 때가 되어서야 삽입했을 것이다. 이런 고통은 생소했다.
“아, 카, 칼릴, 칼릴… 나, 아파, 아, 아… 적셔 줘, 빨리, 아, 적셔, 줘어, 제발, 제… 아…!”
애원이 더 길어지기 직전, 칼릴이 아리안을 침대에 처박듯이 눌러 붙이고는 거칠게 서너 번 피스톤질했다. 그리고는 금속 고리가 아리안의 엉덩이 사이에 거세게 눌릴 정도로 삽입한 채 사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