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95)화 (95/130)

#95

남자가 마치 더 커 보이려는 것처럼 가슴팍을 불쑥 내밀며 어정쩡한 자세로 섰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저 그를 더 땅딸막하게 보이게 할 뿐이었다. 경계할 가치조차 없었다. 칼릴은 그냥 눈을 감고 욕조 턱에 뒤통수를 기댔다.

“사실 그치들이 말하는 예언이란 것도 말야. 중구난방이잖아. 뭐 하나 앞뒤가 맞는 게 없단 말이지. 안 그래?”

“그래서. 본론이 뭐지, 린드웜?”

용은커녕 뱀조차 아닌 그 멸칭에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 기색은 금방 사라지고 남자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네 예언 말야. 재앙의 왼쪽 어깨.”

그가 칼릴이 앉은 욕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난 그거 안 믿어. 아니, 반 정도만 믿어. 그렇잖아. 누군들 알았겠어, 이 허접한 차원에 재앙이 숨어 있을 거라곤 말야.”

반 정도라.

칼릴이 피식 웃자 린드웜이 몸을 뒤로 빠르게 물렸다.

“흠… 뭐… 그렇지. 내 말은. 너라면 그걸 먹어 치울 수 있을 거란 얘기야. 네가 바로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왼쪽 어깨 정도가 아니라… 아니, 뭐, 설령 왼쪽 어깨면 어때? 두 개 중 하나잖아. 기수 넷보다는 낫다고.”

린드웜이 떠벌거렸다.

칼릴은 한쪽 눈을 떴다. 린드웜이 움찔했다.

“재앙이 뭔데?”

“재앙… 뭐? 재앙이 뭐냐니? 재앙이 재앙이지.”

“그러니까. 재앙이란 게 대체 뭔데 내가 그게 될 수 있느니 없느니 하냔 말이야.”

“그건….”

린드웜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재앙이란 건… 그러니까… 뭐, 엄청나게 센… 은하 수억 개 정도는 단번에 찢어 버리고 빅 프리즈나 빅 립을 일으킬 만한….”

칼릴은 표정 없이 린드웜을 응시했다. 기어이 그의 횡설수설이 멈추고 말꼬리가 길게 이어지다 못해 침묵이 내려앉을 때까지.

수증기가 아래로 내리깔렸다. 침묵하던 린드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주를 끝장낼 수 있는… 아무튼, 뭐 그런 거 아니겠어?”

“비상식적이야. 설령 내가 그런 힘을 얻는다 해도 우주를 끝장낼 이유가 없어. 그런 데 관심도 없고.”

“그야 나도 딱히 우주의 끝을 원하는 건 아니거든? 그래도 그럴 수 있는 힘이란 건 꽤 매력적이잖아.”

린드웜이 설득력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야 세상의 끝 따위는 누구도 원하지 않겠지, 끝나면아무것도없는거잖아어쩌고저쩌고웅얼웅얼…… 그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칼릴은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 재앙인가?”

“응? 그놈? 글쎄….”

린드웜이 양팔을 벌리면서 희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뭐어, 그게 진짜 요한 묵시록에 나온 그 재앙인지는 알 수 없다만 아무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놈이란 것만은 분명해. 모르지. 일이십 세기쯤 전에 쫓겨난 뭔가일지 뭘지. 그런 놈들 꽤 많잖아. 사탄, 몰렉, 아스타로트, 아자젤, 네필림들….”

칼릴이 물이 식어 가는 것처럼 그의 주절거림에 관심을 잃고 있었을 때 린드웜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침묵은 불과 몇 초였다. 교활한 지렁이가 욕조 난간에 두 손을 짚으며 다가왔다. 그가 고개 숙여 칼릴의 젖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저치는 왜 살려 두는 거야?”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그다지 높은 자들하고는 친하게 안 지내잖아? 흠. 물론 쟨 이미 높은 자들은 아니지만….”

그가 낮게 히죽거렸다.

동시에 칼릴의 손이 튀어 나갔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히죽대던 땅딸보의 모가지를 낚아챘다.

“끕! 컥!”

목 졸리는 소리를 내며 린드웜이 발버둥 쳤다. 칼릴은 그대로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방울이 청동상 같은 나신 위를 굴러떨어졌다. 린드웜의 호화스러운 비단신을 신은 두 발이 바닥에서 발버둥 쳤다. 퉁퉁한 얼굴이 시커멓게 달아올랐다.

콰당! 칼릴이 그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땅딸막한 몸이 돌바닥을 굴렀다. 린드웜이 꿱! 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버둥댔다. 그다지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곧 그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벌떡 일어섰다.

“미, 미안! 미안해! 내가 주제넘었지? 아, 아무튼 난 네 편이니까, 알지? 언제든 불러!”

그리고서는 부리나케 뒤쪽으로 달아났다. 그의 모습은 어둑하게 깔린 수증기 사이로 사라졌다. 아주 민첩한 도주였다.

칼릴의 시선은 그쪽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내실에서 이어지는 복도 형태의 응접실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깔린 벽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일렁이는 램프 불빛이 보였다. 칼릴은 그 너머, 침실로 들어가는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몇 분 뒤, 그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욕조를 빠져나왔다. 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는 손을 뻗어 긴 수건을 잡아당겼다. 몸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충 털어 낸 뒤 물 묻은 발로 성큼성큼 반대편에 놓인 긴 나무 행거로 향했다. 그는 스스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무늬와 장식이 화려하지 않은 단순한 의복. 셔츠와 바지, 튜닉, 허리띠, 검을 매다는 가죽끈, 부츠, 망토까지 모든 것은 장식성보다는 실용성을 따져 만든 것이었다. 전장에서 그의 군대를 만난다면 하나같이 같은 차림을 한 기사들 사이에서 누가 지휘관인지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리라.

단추와 매듭을 하나씩 채우고 엮어 가며 그의 푸르른 시선이 천천히 몽롱해졌다.

그의 머릿속은 또다시 상념을 헤매었다.

지렁이 놈의 주제넘은 질문.

아리안을 살려 두는 이유는 명백했다. 그리고 칼릴의 권능 아래에서 아리안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약효가 다 닳거나… 해독제를 얻기 전까지는…. 칼릴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동공이 흐릿해지며 검푸른 그림자가 홍채를 덮었다.

‘메데이아 말이 맞아.’

제우스조차 프로메테우스를 영원히 묶어 두진 못했고, 솔로몬의 레게메톤도 결국에는 끝장났으며, 펜리르를 묶은 글레이프니르도 마지막 순간에는 끊어졌다.

‘언젠가는….’

거기서 그는 생각을 끊어 냈다.

적어도 그 언젠가가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언젠가까지 아리안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완벽하게 의복을 갖춰 입은 칼릴이 내실을 나섰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닛사와 오스발이 그를 향해 몸을 굽혔다.

이제부터는 도르센 대공으로서의 일을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칼릴은 이 일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

아리안은 메데이아의 냉소적인 질문을 떠올렸다.

‘저기. 설마 아직도 그 개자식을 사랑한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지는 않겠지? 너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잖아.’

아리안은 그때 자신이 어떻게 대답하려고 했는지 생각하려 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끊어졌다.

그때 단번에 대답하지 못한 아리안을 책망하듯이 냉혹한 차원 마수가 그에게 물었다.

‘이래도?’

‘이래도 아직?’

‘이래도 아직 내가 좋아?’

그 질문들은 마치 그를 시험하는 듯했다. 아리안은 그것이 환청인지 진짜인지 그도 아니면 아리안 본인의 무의식 속의 죄책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날 배신한 주제에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야.”

아리안은 무심코 그렇게 속삭였다.

“아니야, 미안해… 이제 안 좋아할 테니까….”

동시에 쿵! 하고 묵직한 것이 어딘가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리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정신이 돌아오며 환각 속을 헤매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아리안은 작은 콘솔 앞에 앉아 있었다. 어둑한 방 한쪽 벽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이글거렸고 그 위에 놓인 황금 촛대에서 촛불이 어슴푸레한 빛을 뿌렸다. 콘솔 위의 반신 거울에 아리안의 옆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거울 표면에 반사된 얼굴에는 어딘지 창백한 기미가 감돌았으며 눈은 겁에 질린 듯이 굳은 채였다.

콘솔에서 고작 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막 돌아온 칼릴이 서 있었다. 조금 전 들린 소리는 그가 허리띠의 검집을 풀어 바닥으로 내던지는 소리였다.

남자는 어둠 속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의 발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크게 기울어져 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그 날렵하고 시원스러운 콧잔등 밑으로 그림자가 우묵하게 드리워진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아리안은 그 그림자에서 분노와 언짢음의 기색을 읽었다. 그는 약간 떨리는 숨을 들이켜면서 콘솔에 손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들었을까?’

아리안은 조금 전 환청에 홀려 지껄이고 말았던 자신의 헛소리를 그가 들었는지 걱정하면서 몇 걸음 그에게로 다가갔다.

“들어오는 걸 못 봤어. 지금 온 거야?”

칼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아리안도 딱히 두 번 말을 걸지는 않았다.

칼릴은 장식이 적은 옷차림에 가벼운 모직 망토를 걸친 차림이었다. 그에게서는 약간의 매캐한 담배 냄새와 술 냄새, 그리고 잉크와 밀랍 냄새가 났다. 지금까지 오스발이나 닛사, 또는 다른 가신들과 머리를 맞대고 전쟁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겠지. 아리안은 그렇게 짐작하면서 그의 어깨로 손을 뻗어 망토를 벗기려고 했다.

그때 칼릴이 몸을 옆으로 틀어 아리안의 손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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