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얼마 뒤 칼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이가 정말로 죽었을까?”
“죽진 않았더라도 회생 불가능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부 돼지들이 우리한테 손을 내밀 리가 없으니까요.”
오스발의 말은 일리가 있다. 왕녀를 한 번 배신했던 일왕자 나일보다는 차라리 대공을 택하여 승전을 꾀하겠다는 남부 연합의 심산도 이해가 갔다.
이제는 칼릴의 선택이 남았다.
“일단 얘기는 들어 보겠다.”
짧은 침묵 끝 긍정의 대답에 오스발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서둘러 침실을 떠나갔다.
오스발이 떠난 뒤 칼릴은 얕은 회상에 빠져들었다.
이 미발달한 차원은 그에게 과거를 상기시켰다. 모략과 배신, 열전 또는 냉전, 악수나 미소 뒤의 흉계… 제법 화기애애한 기억들이었다. 그는 전쟁의 몇 가지 변수들을 따져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굳게 닫힌 침실 문을 열고 다시 들어서자 향유와 정액 냄새가 풍겼다.
휘장 너머는 여전히 고요했으며, 그 안쪽에 이 차원의 가장 큰 변수가 누워 있었다.
그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침대로 다가갔다. 저벅저벅 하는 발소리에도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시트에 코를 눌러 애써 숨을 죽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흐흥, 칼릴은 코를 차며 두 손으로 휘장을 와락 벌려 젖혔다.
침대 안쪽은 여전했다. 한데 뒤엉킨 깃털 이불과 베개 사이에 흰 나신이 길게 누워 있었다. 아리안은 애써 베개와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칼릴의 시선이 이불 틈으로 뻗은 날씬한 종아리와 발그스름한 발에 닿았다. 그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며 팔을 뻗어 그 발목을 낚아챘다.
“흐읍….”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우스웠다.
칼릴은 웃는 대신 상반신을 비스듬히 기울여 움켜잡은 발목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분홍색 발톱과 복숭아뼈, 발등은 약간 둥글게 솟아 있었고 발가락은 살짝 움츠러든 채였다.
칼릴은 발등에 입술을 묻었다. 발가락이 한껏 오므라들었다. 그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당기며 입술을 움직였다. 발등에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 부드러운 발가락에 닿았다. 그 새끼발가락에는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다시 아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랜 도보 여행이 남긴 상처였다.
“흐으, 하, 하아, 흐읍….”
아리안이 가파르게 숨을 내쉬었다.
칼릴의 입술은 계속 움직였다. 굳은살이 배긴 발뒤꿈치에 닿았다. 티 한 점 없이 매끄럽기만 하던 예전과 달리 까끌까끌한 감촉이 입술에 느껴졌다.
깨끗하게 씻기고 상처를 치료하게 향유를 발랐어도 사라지지 않는 필멸의 흔적.
그것은 새삼스럽게 칼릴에게 다가왔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자문했다.
아리안이 죽는다면 칼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초조함이 심장을 옥죄었다.
아리안이 죽는다면… 그 전제 조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 뒤가 섬찟하게 차가워졌다.
그는 트리스탄이 죽자 그 뒤를 따라 죽은 이졸데를 떠올렸다.
‘안 돼.’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해독약을, 아니, 최소한 권능을 온전히 되찾기라도 한다면….’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어쩌면 그 마녀가 해독약을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생각이 드문드문 이어지다 끊기기를 반복했다.
“그만!”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그를 상념에서 건져 낚아챘다. 칼릴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그만. 그만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아리안이었다.
아리안이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칼릴은 생경한 기분으로 그 달아오른 뺨을 응시했다. 시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목, 쇄골, 가슴, 배꼽…. 그는 아리안의 굳은살 배긴 발뒤꿈치를 개처럼 핥아 대던 차였다. 그 발은 얼굴처럼 달아올라 분홍색이었으며 타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리안이 그의 손에 잡힌 발을 버둥거렸다. 칼릴은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어 빠져나가려는 발목을 움켜잡았다.
“아!”
아리안이 작게 비명 지르면서 숨을 씩씩 내쉬었다. 우악스레 잡힌 발목이 제법 아팠는지 팔뚝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칼릴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아리안이 즉시 발을 숨겼다. 칼릴은 발을 다시 찾아 쥐는 대신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그리고 결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자신의 옷을 벗었다. 허술하게 입은 옷가지가 금방 흘러내렸다. 다시 나신이 된 남자가 아리안의 위로 몸을 눌렀다. 아리안의 호흡이 가늘어졌다.
“듣고 있었지?”
다시 아리안을 격렬하게 안는 대신 칼릴은 대화를 선택했다.
그 질문에 아리안이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침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들고 나는 소리를 모두 차단할 만큼 견고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완벽하게 방음 기능을 구현할 만큼의 정교한 기술력이 이 차원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스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침대에 누워 밖의 대화를 훔쳐 듣기에는 충분했다.
아리안에게서는 대답이 없었지만 칼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상이 잘 진행된다면 내년 이맘때쯤에는 파살리아에 있을 거다. 물론 함정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그 말에서야 아리안이 눈을 들었다.
칼릴은 한쪽 팔꿈치로 침상을 짚어 몸을 옆으로 기대며 반대편 팔로 아리안을 끌어당겼다. 아리안은 그가 당기는 대로 따라왔다. 이제 아리안의 몸은 칼릴의 양팔 사이에 있었다. 그가 숨을 쉴때마다 미적지근한 호흡이 칼릴의 어깨와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칼릴은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그 간질거리는 감각을 무시했다.
아리안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나도 파살리아에 가?”
그 질문은 어째서인지 짜증을 유발했다. 칼릴은 당연하다고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남부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난 전쟁 같은 건 잘 몰라.”
“그러시겠지.”
칼릴은 일부러 빈정거림을 섞어 대꾸했다.
아리안이 서글픈 눈빛을 밑으로 떨어트렸다. 그는 칼릴의 어깨 너머 어두운 침대 구석을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파살리아에 안 가면 안 돼?”
그 목소리 한구석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칼릴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재앙 때문에?”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리안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네가 재앙과 무슨 상관이지?”
굳은살과 핏줄이 얽혀 거칠고 단단한 손이 아리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차피 예언의 그날 너는 죽어 없어졌을 텐데.”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그에 정반대로 손은 아리안을 달래듯이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얼러 주는듯한 손길이 아리안을 오랫동안 만졌다. 칼릴은 스스로의 상반된 모습에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국왕이 정말 재앙이라면 그자가 네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왜냐면 필멸인 너는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
아리안은 울지 않았다. 울기에는 칼릴의 손길이 부드럽고 애틋했다.
금세 새벽이 찾아왔다. 어슴푸레한 빛이 휘장의 겹쳐진 주름 사이를 더듬었다. 두툼한 이불 틈에서 빠져나온 솜털 몇 장이 허공을 맴돌다가 아리안의 한쪽 귓불 위로 떨어졌다. 칼릴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살짝 털어 냈다. 아리안은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다시 한참 뒤 칼릴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리안의 몸을 이불로 덮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땀이 식은 몸에 선선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칼릴은 말없이 침실을 나왔다.
바깥은 어둑했다. 극야의 절정, 성벽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윙윙대는 바람 소리가 요새를 울렸다.
그는 목욕 준비가 되어 있는 내실로 향했다. 금방 바깥에서 몸종이 들어왔다. 몸종은 욕조에 펄펄 끓는 물을 더 부어 약간 식은 물을 다시 덥혔다.
칼릴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성격을 아는 몸종은 말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의 몸이 욕조 안으로 잠기며 물이 넘쳤다. 회색 타일 바닥으로 뜨거운 물이 흘렀다.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칼릴은 욕조 턱에 등을 기대고 수증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흠. 예언이 진짜였다라, 흥미로운 사실인걸.”
그때 수증기 너머 문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릴은 놀라지 않았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다가 욕조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땅딸막한 그림자가 칼릴 쪽으로 기울어졌다. 칼릴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상대도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예언이 진짜면 또 어때?”
상대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휘저어 수증기를 쫓았다. 그 틈으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려한 비단옷과 보석 허리띠, 손가락마다 끼운 알알이 굵은 반지로 초라한 몸을 애써 한껏 치장한 남자. 이제 칼릴은 그를 알았다. 독 혓바닥을 가진 날개 없는 용. 원래대로라면 이 남자는 감히 칼릴에게 말조차 걸지 못했을 것이다.
칼릴은 긴 눈을 가늘게 접어 수증기 사이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