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93)화 (93/130)

#93

“그건 당연한 거였어.”

“글쎄. 다른 높으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걸.”

메데이아가 다시 아리안의 손을 놓았다.

“아무튼 그놈이 내 계획대로 움직여 준 것만은 고마운 일이야. 이 차원에서는 나보다는 ‘도르센 대공’ 쪽이 움직이기 편한 건 사실이니까. 그 개자식이 널 찾아낼 거라 생각했지. 당연히 옆에 끼고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물론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녀가 빠르게 속삭였다. 아리안의 머릿속도 빠르게 돌았다.

계획대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칼릴에게 무슨 짓을 했어, 메데이아?”

“무슨 짓은 아니지.”

평소의 그녀라면 여기서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저 작은 의심의 씨앗을 심어 줬을 뿐이야. 이걸 위해서는 놈이 네 곁에 있어야 하거든. 네가 놈에게 아주 가까이 접근할 기회도 필요했구. 하하, 멍청한 게, 바로 믿더라구. 사랑의 묘약? 아하하하하! 그 멍청한 약물이 금지된 게 천 년은 넘었어!”

그녀가 이 순간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안의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회전했다. 의심의 씨앗, 사랑의 묘약, 가까이 접근할 기회가 필요했다고…. 그때 그녀가 아리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리안. 이걸로 그 개자식을 찔러.”

그 순간 아리안은 말문을 잃었다. 그는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메데이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총총한 눈으로 아리안을 마주 응시했다. 침묵이 잠시 흘렀다. 메데이아가 입을 열었다.

“네가 힘을 되찾는 방법은 그뿐이야.”

뒤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재촉하듯 신경질적으로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메데이아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갈 거야!”

그녀가 문을 향해 난폭하게 외치고서는 다시 아리안을 돌아보았다.

“인어 공주 몰라? 설마 너도 바보처럼 물거품이 되어 버리진 않겠지?”

“나, 난 그런 거 못 해….”

“저기. 설마 아직도 그 개자식을 사랑한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지는 않겠지? 너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잖아.”

“아니, 난….”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메데이아가 그렇게 말하며 아리안의 손에서 단도를 빼앗아 그의 옷 속으로 욱여넣어 숨긴 순간, 이어지던 노크가 끊어지고 대신 덜커덕 문이 열렸다. 표정 없는 기사들이 메데이아를 재촉했다.

“대공 전하께서 약속하신 시간이 끝났습니다.”

메데이아는 아리안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순순히 몸을 돌렸다. 기사들이 그녀를 연행하듯 양쪽에서 밀어 문밖으로 끌어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곧 문이 닫혔다.

아리안은 닫힌 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7> 재앙의 왼쪽 어깨

급보가 들어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칼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좁은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가운을 주워 맨 상반신에 걸쳤다. 땀이 남아 있던 뒷덜미로 선득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정사가 길었기에 벽난로의 불은 꺼져 가고 있었다.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약간 열린 휘장 사이로 흰 종아리가 보였다. 발목으로 이어지며 오목해지는 그 부위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발뒤꿈치가 얼핏 보였다. 발끝은 이불 사이에 휘감겨 있었다. 칼릴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는 다소 난폭한 손길로 휘장을 당겨 닫았다.

칼릴은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집어 올려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쿵, 주전자를 내려놓는 소리에도 휘장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긴 숨을 내쉰 뒤 바닥에 떨어진 하의를 집어 들었다.

대충이나마 나신을 가리고 침실을 나오자 기다리던 오스발이 그를 향해 짧게 인사했다. 오스발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긴장감을 닮은 그 표정을 칼릴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남부에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그 대답에 칼릴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르텔에서 칼릴의 군대가 대승을 거둔 것이 근 삼십여 일 전이었다. 왕녀는 부상을 입고 자신의 군대와 함께 후퇴해 요새에 틀어박혔다. 농성은 길게 이어질 기미였고 칼릴은 가파른 구릉 꼭대기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를 굳이 공략하는 대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엘테아의 수로를 이용해 올굽 평야에서 수확한 식량을 분배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러했다.

칼릴은 언제나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군주였다. 그는 기사였으며 전사였다. 가신들은 그의 그런 점을 가장 사랑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 그는 부르텔에 출정하지 않았다. 몇몇 가신들은 기이하게 생각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그저 열여섯 살부터 근 십여 년 동안 전장을 떠돌았던 대공이 전쟁에 질려 잠시의 휴식을 취하는 모양이라고 단순하게 여겼다.

진실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 오스발은 대공의 허술한 옷차림, 땀이 흐른 흔적이 남은 목덜미, 귀뺨에 희미하게 남은 손톱자국 따위를 불경하게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칼릴이 눈빛으로 경고했다. 오스발은 고개를 숙였다.

“부르텔 상황이 안 좋은가 보지?”

“왕녀의 부상이 위중한 모양입니다.”

“아하.”

칼릴이 비웃음 같은 소리를 흘렸다. 오스발이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사실 이미 죽은 걸 숨기고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칼릴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벽에 걸린 칼 두 자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장식용이 아니라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진짜 검이었다. 이 쌍검은 그가 어릴 적 왕녀가 가져온 남부의 명검이었다.

오스발도 같이 그 두 자루 검을 응시했다. 그는 칼릴의 심정을 추측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심란하십니까?”

“아니.”

칼릴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왕가에서라면 더더욱.”

그는 이런 배신을 수도 없이 보아 왔으므로 실망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누이가 나를 믿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목소리가 끊겼다.

그의 얼굴은 평소대로 무심했다. 진짜로 안타깝다는 기색은 아니었다. 단지 왕녀가 과거 도르센을 도왔음은 진짜였으므로 그 점만은 유감이었다.

“남부가 이제 와서 우리한테 무슨 얘길 하겠다는 거지? 설마 왕녀를 버리고 내게 붙겠다는 건 아닐 테고.”

“그 설마가 설마입니다.”

오스발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파살리아에서는 또 국왕이 오늘내일한다니 그들로서도 초조하겠죠. 왕녀가 정말 죽는다면… 뭐 이미 죽었을 수도 있겠지만요. 남부는 중앙에 끈을 잃는 셈이니 눈앞에 뭐가 보이기라도 하겠습니까?”

왕녀는 한 번 일왕자와 손을 잡고 대공을 배신했다. 남부와 비스키우스의 연합은 위력적이었으나 불운히도 비스키우스는 전쟁 경험이 적었고 남부는 격전지에서 너무 멀었다. 그 동맹은 일왕자가 왕녀를 배신하고 파살리아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끝장났다.

칼릴의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살짝 움직였다.

“정확히 요구하는 게 뭐라던가?”

“동맹 협상입니다. 이번에야말로 파살리아를 탈환하자는 거죠.”

그 말에 칼릴이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실소했다.

“날 한 번 배신했던 놈들이 잘도 지껄이는군.”

오스발이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적어도 남부와 손을 잡는다면 파살리아로 진군할 때 역공당할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성전에 원군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요.”

그의 목소리는 살짝 격양되어 있었다.

이건 어쩌면 기회였다. 삼 년간 밀고 밀리던 전쟁을 단번에 끝장내고 파살리아까지 진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대공의 가신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왕을 섬기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이 우리의 진실된 우방이 될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파살리아를 얻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저 우리가 파살리아를 공략하며 등 뒤에 남부 연합이라는 적을 둘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동맹을 가장한 배신자를 등 뒤에 두는 꼴이 될 수도 있겠지.”

“물론 남부 놈들은 우리와 다르게 신의를 모르지요. 하지만 놈들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놈들이 지난 삼 년간 남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건 비스키우스의 지원 덕분입니다. 하지만 비스키우스가 그들을 배신하고 등 돌린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당장이야 부르텔에서 농성을 이어 가겠지요. 하지만 다음 겨울을 버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올굽의 우리 군대를 등지고 회군하기에는 위험이 클 거고요. 놈들도 그걸 잘 알 겁니다.”

칼릴은 짧게 혀를 차고서는 몸을 돌려 푸른 우단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들은 이미 날 한 번 배신했다. 이제 와서 내가 그자들과 다시 손을 잡는다면 우리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거야.”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요. 물론 그 조건은 협상하기 나름이고요.”

“언제부터 네가 외교관이었지, 오스발?”

오스발이 어깨를 으쓱했다. 칼릴은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충직한 부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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