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92)화 (92/130)

#92

칼릴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보일 듯 말 듯한 조소가 아로새겨졌다.

“넌 공회의 명령으로 여기 왔고 날 중독시켰어. 그런데 내가 널 거기 버렸다고 날 원망하다니, 적반하장이로군.”

“난 공회의 명령으로 여기 온 게 아니야. 널 중독시키지도 않았어, 나는, 그저, 그 약은, 내가, 널….”

“괜찮아.”

칼릴이 충격과 흥분으로 몸을 벌벌 떠는 아리안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는 연인에게 하듯이 한 손으로 아리안의 뺨과 턱을 한꺼번에 감싸며 속삭였다.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괜찮아, 아리안. 네가 말했던 걸 기억해. 넌 나를 겁탈하고 싶어 했지.”

아리안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공회가 시켜서라고는 하지만, 나도 알아. 전부 다 연기는 아니었겠지. 그런 게 연기라면… 그런 식으로… 그렇게….”

칼릴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다가 끊어졌다.

이제 두 눈이 말 대신 아리안을 진득하게 내려다보았다. 푸른 눈 속의 검은 동공은 블랙홀처럼 끝없이 깊었다. 마치 아주 친근하고 살가운 사이처럼, 뺨이 붙고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그것이 닿는 데에는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입맞춤이 길었던 만큼 정사 또한 그러했다.

침대가 없었기 때문에 아리안은 바닥에 누워서 옷을 벗어야만 했다. 이 텅 빈 방은 엘테아에서의 밤을 떠올리게 했다. 단지 그 밤과 달랐던 점은 칼릴이 아리안을 깔아뭉개는 대신 옆으로 뉘어 누르지 않은 채 가졌다는 점이다. 성교가 횟수를 거듭하며 그는 아리안을 자신의 위로 올렸다. 마침내 아리안이 의식을 반쯤 잃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도 아리안은 여전히 그의 몸 위에 있었다.

좁은 방은 이제 열기로 가득했다. 아리안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칼릴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몸은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었으며 다리가 서로 얽혀 한 몸 같았다.

아리안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칼릴의 피부 위를 더듬었다. 오래된 나무뿌리처럼 근육의 결이 뚜렷한 목 줄기가 단단한 어깨로 이어졌다. 알맞게 부푼 흉곽이 숨을 쉴 때마다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그 위에 늘어진 아리안의 몸도 따라서 오르내렸다. 아리안의 시선이 드디어 그 가슴팍에 얽은 형태로 남은 상처에 닿았다. 그람이 남긴 상처. 아마 이것은 오랫동안, 어쩌면 그의 등에 남은 상처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아리안의 시선을 느낀 칼릴이 낮게 코를 울려 웃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의 손이 아리안의 등을 감쌌다.

“내 부하들은 아직 네가 날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의 손이 아리안의 등을 따라 내려왔다. 완만하게 구부러진 척추의 굴곡을 따라 미끄러진 손이 꼬리뼈 끝에서 멈췄다.

아리안의 몸이 흠칫 떨렸다. 단단한 손끝이 아직도 젖어 있는 엉덩이 사이를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아….”

아리안은 칼릴의 어깨에 이마를 눌렀다.

“으응…!”

손가락이 안으로 더 깊게 들어왔다.

“어차피 신격을 잃은 너는 쓸모가 없지.”

차분한 목소리가 아리안의 효용성을 논했다.

그러나 그 냉정한 판단과 달리 그의 손은 아리안을 끈질기게 더듬고 있었다. 연하게 풀어진 몸속을 손가락이 더듬어 이전 정사의 흔적을 긁어냈다. 정액이 흘러넘치며 아리안의 허리가 요동쳤다.

“흐으, 흑, 아, 아읏, 아, 아, 아…!”

기어이 칼릴이 참지 못하고 아리안의 허리를 다른 팔로 와락 끌어안으며 그 몸속으로 자신을 파묻었다. 갑작스러운 삽입에 아리안이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저릿하게 피 맛이 도는 그 위를 칼릴의 입술이 눌러 덮쳤다. 아래가 섞이며 혀도 같이 섞였다.

아리안은 두 팔로 칼릴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뭉툭한 손끝이 탄력적인 등을 긁었다. 칼릴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

아리안이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얼굴을 맞이한 것은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그는 여전히 도르센에 있었다.

태양이 개수를 늘리고 계절이 바뀌며 공기에 전쟁의 냄새가 섞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소강상태였던 전쟁이 재개될 조짐은 도르센의 공기에서 느껴졌다. 병사들의 굳은 얼굴과 더불어 도르센에는 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그에 비례하여 분위기는 삼엄해졌다.

따라서 그 반가운 방문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메데이아가 사뿐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아리안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안녕. 아리안.”

메데이아가 빙긋이 미소 지으면서 인사했다.

“잘 지내지 못한 건 알아. 그러니까 안부는 생략하자.”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가 아리안을 향해 걸어갔다. 아리안은 그때까지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지크에 이어 메데이아마저 그를 위해 이 척박한 차원으로 사만 오천 광년의 먼 여정을 헤쳐 올 줄이야.

“어, 어떻게 여기 온 거야?”

아리안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문이 트이자마자 질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언제 온 거야? 지크를 네가 보냈다면서? 지크는 무사해? 그, 그쪽은 어때? 넌 대체 무슨 일로 여길….”

“그만.”

메데이아가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 위에 대 보이면서 쉿, 하는 동작을 했다. 아리안은 숨을 들이켰다.

“질문 많을 거 알아. 하지만 시간이 많이 없거든.”

“시간이 많이 없다니?”

“칼릴 말야.”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시간을 많이 안 줬거든. 널 볼 시간 말이야.”

그 말에 아리안은 흡, 하고 입을 다물었다. 1초 뒤, 후욱 하고 숨을 내쉰 아리안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메데이아. 급한 일이야. 예언은 진짜였어. 신성 재판 자체가 예언의 일부였고, 재앙은 이 차원에 있어. 칼릴을 여기로 추방한 건 완전한 실수….”

“그만! 난 그런 재미없는 얘기 하려고 온 거 아냐.”

메데이아가 다시 아리안의 말을 막았다. 아리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럼….”

“내가 그런 데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예언이고, 재앙이고, 나발이고. 난 알 바 아니고.”

그녀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네 얘길 하려고 여기 온 거야, 아리안.”

“내 얘기?”

“그래.”

그녀가 옷소매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얇은 가죽으로 된 것이었으므로 안쪽의 내용물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칼이었다. 작은 단도. 그녀는 주머니를 묶은 끈을 풀고 안에서 그것을 꺼냈다.

“자.”

“이건….”

아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자, 받아.”

메데이아가 다시 한번 아리안을 향해 재촉했다. 아리안은 단도를 받는 대신 굳은 눈으로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너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

메데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다물린 입술을 스쳐 작은 손에 들린 칼에 닿았다.

투박한 단도.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의 피부를 겨우 벨 정도로 연약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그 실체는 그렇지 않았다.

차원을 찢고 항성을 살해할 수 있는 무기.

이런 무기는 드물었다.

엑스칼리버, 롱기누스의 창, 엘레나의 성정, 간장과 막야, 다인슬라이프, 그람… 많은 무기들은 지금은 소실되었거나 파괴되었고 남아 있는 것은 몇 없었다. 아리안은 그것들 대부분을 실제로 보았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단도는 그중 무엇도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어디겠어?”

메데이아가 피식 웃었다.

“네가 모르는 이런 무기가 땅에서 솟았을까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그럼 어디일까?”

“메데이아, 이런 걸 허가 없이 만드는 건 공회에서 엄격하게 금지….”

“먼저 공회의 허락 없이 여기 온 건 너였어. 물론 난 반대했지만.”

메데이아가 빈정거렸다.

“그리고 네 꼴을 봐, 아리안. 이제 너는 우리 중 하나조차 아니야. 신격을 잃고 영생을 뺏긴 채 이런 초라한 꼴이 되고 말았지.”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이럴 줄 알았어. 네가 차원 마수를 구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딴 빌어먹을 결과가 될 줄 알았다구.”

아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메데이아가 난폭한 손길로 단도를 아리안에게로 밀어 넘겼다. 아리안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의 수천억만 배의 질량으로 이루어진 신성 무기였다. 지금의 아리안으로서는 이것을 뽑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차피, 난, 이젠 이걸 사용할 수도….”

“단 한 번.”

메데이아가 아리안의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단 한 번 뽑을 수 있어. 애초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아리안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이런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힘을 소모해야만 했다. 수많은 위대한 자들이 영혼을 갈아 무기를 만들어 내고는 힘을 다해 사라졌다.

메데이아가 웃었다.

“마지막 순간 아테네에서 네가 나에게 용을 보냈지. 네가 아니었다면 난 여기 없었어.”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다들 날 미친년이라고 했어. 구제할 가치도 없다고. 하지만 너만은 날 믿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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