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보통이라면 더 좋은 방과 더 좋은 가구, 보석 장신구와 비단옷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태까지 대공의 연인들이 받았던 대우처럼. 그리고 물론 그들을 챙기는 것은 부르조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대공이 부르조에게 이 소년의 일신을 챙기라 한 것은 소년이 여태까지와는 다르다는 의미겠지.
부르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결론 내렸다.
“대공 전하께서 부르시면 알려 주겠네. 아무튼… 무슨 일이 있다면 날 찾게나. 나는 부르조일세.”
아리안은 이미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노인에게 자기소개를 한 번 더 하는 시간 낭비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부르조의 예상과 달리 수월했다. 아리안은 순종적이었다. 노인의 못 말릴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방을 떠나 일꾼들을 부르는 대신 기도실에 쌓인 먼지를 살피는 척 방을 왔다 갔다 했다.
아리안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모른 체하던 부르조가 결국 몸을 훌쩍 돌렸다. 노인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민첩함으로 아리안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파살리아 출신이지?”
그 질문에 아리안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칼릴이, 또는 닛사나 오스발이, 이 노인에게 자신에 대해 뭐라고 둘러댔을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글쎄요….” 하는 얼빠진 대답만 나왔다.
부르조가 에잉, 하고 혀를 찼다.
“자네가 삼 년 전에 파살리아에 대공 전하와 함께 있었던 걸 알아. 어째서 그때 전하를 따라 파살리아를 빠져나오지 못했던 겐가? 삼 년간 파살리아에서는 어찌 지냈고? 엘테아까지는 어떻게 왔는가?”
질문이 쏟아졌다.
그 질문들에 아리안이 얼이 빠져 있는 사이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거취를 챙기라 했지 뒤를 캐라고는 명령하지 않았는데, 부르조.”
서늘한 목소리가 문간에서 들려왔다.
부르조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아리안이 문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칼릴이 거기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무채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망토는 없었다. 벨트에 매달린 검집의 녹색만이 유일하게 색을 띤 것이었다. 그는 그림자 같았고 실제로 안색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로로 긴 눈에서 음산한 기색이 흘렀다.
부르조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
노인이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칼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러가라.”
노인은 반박하지 않고 뒷걸음질 쳤다.
부르조가 나가고 대신 칼릴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있는 것은 아리안뿐이었다.
칼릴이 아리안을 쏘아보았다. 푸른 눈이 번들거렸다. 아리안은 그 시선을 어떤 얼굴로 받아쳐야 할지 알지 못해서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것이 칼릴의 심기에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칼릴이 비스듬하게 머리를 기울여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궁금하군.”
얼마간의 불편한 침묵 끝에 칼릴이 입을 열었다. 서늘한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삼 년간 파살리아에서 지냈는지 말이야.”
아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무감정한 목소리와 달리 냉소적인 눈빛과 마주했다. 칼릴의 입꼬리는 한쪽이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눈동자는 차가웠다. 거기에 실린 것은 비아냥거림이었다.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칼릴의 미간이 조여들었다.
“그냥….”
결국 그 험악한 기세를 이기지 못한 아리안이 웅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지냈어….”
“그냥?”
칼릴이 건조하게 되뇌었다. 아리안은 황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시, 신전에 있었어. 사제 명부 덕분에 신전에 거취를 마련해 줘서….”
“신전에 거취를 마련해 줬다라.”
칼릴이 아리안의 말을 잘랐다. 그는 시선으로 아리안의 얼굴을 더듬었다. 젖살이 빠져 약간 갸름해진 뺨과 수척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낯빛, 메말라 윤기를 잃은 입술을 차례대로 훑었다. 그리고 그 서러운 듯 젖은 눈동자를 가장 오랫동안 응시했다.
“누가 널 챙겼지?”
칼릴이 다시 물었다.
“신전에서….”
“내 질문은, 누가 네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고 목욕할 물을 주고 밤에 몸을 누일 곳을 주었냐는 의미다.”
칼릴의 목소리는 갈수록 감정을 잃고 건조해져 갔다.
기어이 목소리 끝이 예리하게 갈라졌다.
“너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했을 텐데.”
그 마지막 한마디는 혼잣말 같았다.
칼릴이 초조한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아리안 주위를 마치 사냥하는 짐승처럼 빙빙 맴돌았다. 아리안은 어쩔 줄 모르고 몸을 움츠렸다. 그는 칼릴의 시선에서 몸을 숨기고 싶었으나 그럴 방법이 없었다.
칼릴의 시선은 더 집요해졌다.
“그런 몸으로….”
그 중얼거림은 단순히 필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아리안의 뺨이 붉어졌다.
붉어진 낯을 알아차린 칼릴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조각상같이 무감동한 얼굴에 드디어 감정이 실렸다. 그것은 분노였다.
“소문을 들었지.”
낮은 음성이 으르렁거렸다.
“국왕이 신관을 총애한다는 소문.”
아리안이 숨을 집어삼켰다. 힉, 하는 소리가 허공으로 뚜렷하게 새어 나갔다.
칼릴의 눈에 불이 붙었다.
“국왕이 널 총애했나?”
숨이 닿을 정도로 그가 가까워졌다. 아리안은 이제 그의 푸른 눈동자 속의 일렁거림까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널 만졌어?”
“아니야!”
아리안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요한은 아리안을 말로 괴롭히는 걸 좋아했으나 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따금씩은 아리안의 몸을 총애하는 척했다. 한밤중에 아리안을 침실로 부르거나 하는 일 따위가 그 예시였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리안을 침대 곁에 세워 두고서는 밤새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곤 했다. 주로 두서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아리안은 아주 작은 정보라도 얻어 낼 수 있을까 싶어 매번 열심히 귀를 기울였으나 대개는 별 소득 없이 끝나곤 했다.
그러니 국왕이 아리안을 성적으로 총애했다는 소문은 거짓말이었다.
칼릴이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일왕자인가? 둘째 왕자와는 무슨 관계지? 정말로 그가 널 파살리아에서 빼냈나? 어째서 엘테아를 혼자 떠돌고 있었던 거지?”
질문은 하나하나 집요했다. 아리안은 모든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전부 아니야. 아덴은….”
“아덴.”
칼릴이 이왕자의 이름을 몹시 생소한 듯이 중얼거렸다.
아리안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적어도 소문의 일부분은 사실이었군.”
“아니야!”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칼릴, 그 소문들이 뭐가 됐든 아무것도 사실이 아니야. 진실은 다른 거야. 궁정 마법사, 국왕, 그게 바로 재앙이었어. 재앙은 당신을 이용하려고 해. 예언은 진짜였어. 신성 재판 자체가 예언의 일부였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아하. 예언.”
칼릴이 천천히 아리안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 한 발자국만으로 아리안은 온몸이 조여드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긴장감으로 식은땀이 한 방울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칼릴의 시선이 그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쫓았다.
아리안은 칼릴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목을 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다면 아리안은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한다는 것도. 영원한 죽음. 즉, 진짜 죽음.
하지만 칼릴은 아리안의 목을 꺾는 대신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검을 쥐는 딱딱한 손끝이 연한 목을 더듬었다. 그 손길을 따라 아리안의 목에 얕게 소름이 돋았다.
“예언이 진짜였다고.”
칼릴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리안은 용기를 쥐어 짜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릴의 시선이 아리안의 눈으로 똑바로 쏘아졌다.
“그렇다면 그 재판도 정당했다는 거겠군.”
“난 오이디푸스 얘길 하는 거야.”
예언을 피하려다 예언을 이루고 말았던 비극.
아리안은 신성 재판 자체가 그 비극의 일부분임을 말하고 싶었다.
칼릴의 입술이 비뚜름히 기울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리안의 목을 감싸 쥐었다. 얼굴이 아리안에게 가까워졌다. 아리안은 독사의 시선에 사로잡힌 작은 새처럼 꼼짝도 못 하고 굳어졌다. 입술이 닿을 듯이 근접한 순간에서야 칼릴이 멈췄다.
“공회의 그 짓거리가 전부 테베의 비극이었다면 네가 맡은 역할은 뭘까?”
넌 네가 테이레이시아스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넌 이오카스테야.
무력한 가해자이자 무지한 피해자. 그 어리석고 비참한 인간이야말로 이 비극에서 아리안의 역할이라고. 차가운 조롱이 칼처럼 아리안을 찔렀다.
칼릴이 굽혔던 몸을 다시 폈다. 목을 졸라 쥐었던 손가락이 펼쳐졌다. 그 손끝이 그대로 아리안의 어깨를 따라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아리안의 눈이 침통하게 젖어 들었다. 그는 칼릴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디어 알아차렸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삼 년 전에 날 거기다 버리고 간 건 어차피 당신이었잖아….”
서글픈 목소리가 웅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