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긴 복도를 걸으며 닛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결국 부르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그 신관이니 어쩌니 하는 건 뭡니까?”
“휴우.”
닛사가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신관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부르조는 신실한 사내였다. 그는 진짜 신관들을 보며 자랐다. 따라서 닛사는 아리안이 신관이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명목상으로만 그렇게 해 두자는 겁니다. 신전의 명부에도 이미 기록을 해 두었고….”
“아이고. 맙소사. 그런 짓까지 하셨습니까? 대체 왜요? 대공 전하께서 창부를 총애하시는 거라면 그냥….”
“부르조. 그 아이는 창부가 아닙니다.”
닛사가 부르조의 말을 막았다.
부르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아이는, 아니, 그자는….”
닛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부르조의 얼굴이 덩달아 진지해졌다.
“치유사입니다.”
“치유사라고요? 아이고. 닛사 경. 나한테까지 그런 핑계 안 대셔도 됩니다. 그자가 대공 전하의 침실을 차지한 걸 내 눈으로 똑바로 봤는걸요. 세상천지 어느 치유사가 환자의 침대를 차지한답니까?”
“전하께서 그자를 총애하게 된 건… 우연입니다.”
닛사는 아리안을 떠올렸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흠결 없는 사지, 공들여서 깎아 낸 듯한 이목구비를. 그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리안은 이 땅의 인간조차 아니었다…. 그런 자가 대체 왜 대공을 찾아 수정 호수를 건넜단 말인가? 닛사는 스스로조차 납득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을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파살리아에서 우리가 발견했습니다. 자기 말로 대공 전하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도 그랬죠.”
부르조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닛사를 바라보았다. 닛사의 굳은 옆얼굴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 얼굴이 부르조를 향했다.
“대공 전하께서 당신에게 그자의 거취를 맡기셨으니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닛사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자의 치유력은 진짜라는 걸요.”
“허허.”
부르조가 헛웃음을 쳤다.
“부르조.”
닛사가 그를 짧게 불렀다. 그들은 어느덧 복도 끝에 다다랐다.
“적절하게 대하십시오. 너무 가까워질 필요도 그렇다고 멀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분간은… 대공 전하께서 그자를 가까이하실 테니까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복도의 갈림길로 몸을 돌렸다. 부르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분간은?”
그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고목 껍질처럼 주름진 얼굴에 알기 힘든 표정이 아로새겨졌다.
그는 잠시 어두운 복도 끝을 응시하다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대공의 개인실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가신들 중에서도 아주 가까운 몇 명에 한했다. 부르조도 그중 한 명이었다.
대공의 개인실은 넓은 방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형태였다. 그 가운데에는 길쭉한 복도처럼 생긴 응접실이 붙어 있었고 이 응접실을 사이로 각각 침실과 내실로 공간이 분리되었다. 내실은 장의자와 탁자, 콘솔, 서랍장 따위의 오래된 가구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위아래로 긴 창문 세 개가 한쪽 벽에 나란히 위치했다. 이 창문들은 안뜰로 향했는데 작은 안뜰은 이 황량한 요새에서 유일하게 장식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 장소였다. 요새의 주인에게만 허락된 사사로운 사치였다. 반대로 침실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곳은 두꺼운 벽으로 빈틈없이 에워싸여 있었고 특이하게 둥그스름한 반원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끝에는 옷장과 나무 병풍이 있었다.
대공의 성격만큼 이 공간은 단조로웠다. 가구는 중후하고 오래되었으며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실용성을 따져 제작된 것들이었다. 장식품은 거의 없었다. 거위 가슴 털을 채워 넣은 매트리스만이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적절히 대하라니, 대체 어떻게 대하라는 말인가?”
방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서 부르조가 혼잣말했다.
그는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돔 천장을 가진 길쭉한 응접실이 나왔다. 가느다란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응접실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탁한 먼지가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부르조는 응접실 가운데에 서서 또 머뭇거렸다.
내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부르조가 문을 여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발소리가 스윽스윽 가까워졌다.
“크흠. 흠흠!”
부르조는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발소리가 멈췄다.
“들어가겠소.”
부르조는 목소리를 키워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내실 안쪽에서는 세 개의 긴 창으로부터 햇빛이 들어와 기하학적인 무늬를 바닥과 벽에 그리고 있었다. 솜털 같은 먼지가 허공을 부유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는 어두운 녹색과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익숙한 대공의 내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소년에 가까운 젊은 남자였다. 고작 스무 살이 되었을까 말까 한 나이로 보였다.
아리안. 부르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오스발에게 얼핏 들었던 그 이름을 떠올렸다.
그는 부르조의 늙은 눈으로 보기에도 놀랄 만한 미인이었다. 우윳빛 장의에 청록색 가운을 걸친 남자는 그 외에는 아무 장식도 하지 않았음에도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웠다. 피부는 그가 걸친 우윳빛 비단에 비해도 꿀리지 않게 희었으며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뺨은 다소 창백했으나 미모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눈동자에는 촉촉한 윤기가 흘렀다. 머리카락은 미인의 기준으로 꼽히는 빛깔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아무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무랄 데 없는 미인이었다.
부르조는 그제야 닛사의 말을 이해했다.
‘전하께서 그자를 총애하게 된 건… 우연입니다.’
여태까지 그 어떤 치유법도 통하지 않았던 대공의 오래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남자라니. 그것참 대단한 우연이었다.
“누구세요?”
아리안이 입을 열었다.
부르조는 잠시 말문이 막혀 헛기침을 했다. 목이 제법 칼칼했다.
“커흠! 흠! 흠. 나는 대공 전하를 모시는 사람일세. 전하께서 자네의 거취를 돌보라 명령하셔서 이리 왔네.”
그 말에 아리안의 눈에서 빛이 흘렀다. 그것은 살 만큼 살았다 자부하는 부르조조차 읽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내 거취라니요?”
“자네는 신관이라더군.”
부르조의 말에 아리안이 짧게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칼릴이… 대공 전하께서 그러시던가요?”
“닛사 경과 오스발에게 들었지.”
부르조는 이 대화가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는 미모에 혹할 만큼 젊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대공 전하의… 크흠. 흠. 자비에 기대어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다소곳하게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은 부르조의 마음에 찼다.
노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는 대공이 파살리아 출신의 창부를 데려왔다고 여겼었다. 닛사의 말은 그에게 혼란을 가져왔다.
“이쪽으로… 나를 따라오시게.”
부르조는 닛사의 말을 머릿속에서 새겼다. ‘적절하게’ 대하라는 그녀의 충고. 노인은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아리안은 고분고분히 그를 따라왔다.
3부르조는 이 고성(古城)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한평생을 살았다. 인생의 전반기는 성내 신전에서 보냈다. 오라스테스의 전쟁 이후에는 도르센의 주인 일가를 모셨다. 그는 요새의 구조에 대해서도, 과거에 사제들이 쓰던 기도실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부르조는 아리안을 남아 있는 낡은 기도실로 데려갔다. 기도실에는 오래전 사제들이 사용하던 곁방이 딸려 있었다. 사용되지 않은 지 오래된 기도실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가 기도실일세. 곧 일꾼들을 시켜 가구를 가져오게 하지. 자네는 이 곁방에서 지내면 되네.”
“기도실….”
아리안은 기도실의 구조가 생소한 것처럼 굴었다.
설령 부르조가 아니라도 그 누구도 이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소년이 신관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옷도 가져다줌세.”
그렇게 말하며 부르조는 아리안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리안이 걸친 것은 흰 장의에 청록색 가운뿐이었으나 그것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아니, 무엇을 걸친들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를 눈에 띄지 않게 하려면 두건이 달린 외투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숨기는 방법밖에 없으리라.
“그전까진 여기 머물고 함부로 나돌아다니지 말게.”
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르조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곳에서는 거동을 조심하고, 물론 말도 조심해야 할 걸세… 그리고 방이 춥다면 하인에게 전하게. 다른 필요한 게 있어도 마찬가지로 하고. 내가 미리 일러 놓도록 하지. 그리고 또….”
부르조는 한참을 대공의 총애를 받았을 것이 분명한 이 소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