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그는 비틀거리면서 침실을 나섰다. 어두운 복도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다. 일렁이는 불그림자에 잔상이 겹쳐 기이한 환영을 만들어 냈다. 너울대는 손길. 그것은 그를 부르는 아리안의 손처럼 보였다.
복도는 길었다. 그는 계단을 몇 개 더 오르내려야만 했다.
아리안의 방은 그의 침실에서 멀었다. 너무 가까우면 약을 과용할지도 모른다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선택된 방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칼릴은 그때 자신의 선택을 욕했다. 그 방은 너무 멀었다.
칼릴은 비틀거리면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깊은 밤의 도르센은 죽음과도 같은 적막에 둘러싸여 있었고 칼릴의 발소리, 거친 호흡 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복도 끝에 그 방이 있었다.
아리안이 잠들어 있을 방.
그는 문 앞을 굶주린 들개처럼 배회했다. 숨을 몰아쉬면서 문고리를 쓸고 문틈에 이마를 눌러 안쪽의 기척을 냄새 맡으려 했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순간 칼릴의 불안감에 불을 붙였다.
아리안이 정말로 이 문 너머에 있는 건가?
칼릴은 참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콰지직! 문고리와 잠금쇠가 단번에 부서져 나가며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는 어두운 방 안으로 달려들듯이 성큼 몸을 밀어 넣었다.
방 안은 건조했다. 그리고 아리안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감미로운 맹독의 향기.
그는 그 향기를 흡입하듯이 코로 들이마셨다.
흉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는 폐부 깊숙하게까지 그 향기를 들이마시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두운 방은 작고 초라했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방에는 두꺼운 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중간쯤에는 콘솔과 의자가, 그리고 끝에는 침대가 있었다. 침대의 네 기둥에는 허름한 휘장이 둘려 있었으나 안쪽을 제대로 가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안쪽에 아리안이 있었다.
아리안은 잠이 깬 얼굴이었다. 이곳에 있는 칼릴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두 눈은 모두 커다랬고 입도 벌어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충격으로 희게 질려 있었으며 양손은 이불자락을 아플 정도로 세게 틀어쥐고 있었다.
칼릴은 몰이사냥을 하는 짐승처럼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아리안의 몸이 움찔 튀었다. 이불을 부여잡은 손등에 파르스름하게 핏줄이 떠올랐다. 그 손등은 어둠 속에서 희멀겋게 반질댔다. 칼릴은 저 손등에 얼굴을 묻고 키스를 퍼붓고 싶은 기이한 충동을 느꼈다.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이미 저 몸이 주는 쾌락을 알지 않던가? 그는 그 충동을 애써 합리화했다.
“칼릴?”
아리안이 겁에 질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
칼릴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침대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리안이 주춤주춤 침대 반대편 끄트머리로 물러섰다.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아리안이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고 물었다. 칼릴은 침대로 다가가면서 대꾸했다.
“글쎄. 무슨 일이겠어?”
그 음성은 고요했으나 푸른 눈동자는 섬광처럼 이글거렸다. 아리안은 그 눈동자에서 흐릿해진 이성의 자취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니, 닛사 경이 당신이 바쁘다고 했는데….”
그 중얼거림에 칼릴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닛사를 만났나?”
그가 조용히 물었다. 아리안은 대답 대신 그를 힐끔거리기만 했다.
이제 칼릴은 한쪽 무릎을 침대에 올리고 있었다.
이불자락을 부여잡은 아리안의 손등이 더 하얘졌다. 칼릴이 결코 서두르지 않는 동작으로 팔을 뻗어 그 손등을 느릿하게 쓸었다. 삽시간에 아리안의 뒷덜미로 솜털이 곤두서며 온몸이 굳어졌다. 칼릴은 그 변화를 눈에 담았다.
“왜 무서워하지?”
“당신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잖아….”
아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릴은 잠자코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에 찬 얼굴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졌다. 이 또한 중독 증세일까?
“해독제는 아직도 줄 마음이 없나?”
칼릴은 예의상 물었다. 아리안의 눈이 축축해졌다.
“그 약은… 야생 박하 잎으로 만든… 단순한 주술이야. 효과도 미약하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고, 해독제 같은 건 애초에 필요하지조차….”
아리안이 똑같은 변명을 반복했다.
‘아직까지 거짓말이로군.’
칼릴은 예리한 눈으로 아리안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기야.’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저런 눈으로, 저런 얼굴로 결백을 호소했다면 여태까지는 누군들 믿지 않았겠는가.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칼릴은 침대 위로 나머지 한쪽 무릎도 올려놓았다. 그는 손을 뻗어 아리안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그대로 힘주어 당기자 가벼운 몸이 끌려왔다. 아리안은 자랐으나 길이만 조금씩 길쭉해지고 무게는 그다지 늘지 않은 것 같았다. 성장기의 사지는 휘청거릴 듯이 길고 늘씬했으며 사슴의 다리처럼 연약했다.
“후우, 후우….”
칼릴은 깊게 숨을 들이쉬면서 아리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아리안이 자지러질 듯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칼릴은 그 반응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키스할 듯이 입술이 가까워졌다. 칼릴이 아리안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느슨한 옷깃 사이로 날렵한 콧날이 비벼졌다. 깊게 파인 쇄골 사이로 콧날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리안이 걸친 것은 길고 헐렁한 잠옷 한 장뿐이었다. 바지도 없이 끈으로 소매를 묶을 뿐인 단출한 잠옷이었다.
칼릴은 손쉽게 그 옷자락을 걷어 올려 무릎에 손바닥을 얹었다. 무릎은 부드러웠으나 식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꽉 움켜잡아 바깥쪽으로 밀었다.
“아.”
아리안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칼릴의 손이 허벅지로 올라왔다. 마디가 굵고 단단한 손이 허벅지 살집을 꽉 움켜잡았다. 그곳은 이전처럼 토실토실하지 않은 대신 더 매끄러워졌다. 칼릴의 숨이 빨라졌다.
그가 아리안의 쇄골에 묻은 콧잔등을 옆으로 밀어 옷자락 위로 어깨를 깨물었다. 아리안이 파드득 몸을 경련했다.
“하, 하지, 마.”
“멈추는 방법은 쉬워. 해독제를 주면 돼.”
칼릴이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아리안이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아리안이 지리멸렬한 변명 대신 입을 다물었다. 녹색 눈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성교는 집요했다.
칼릴은 마치 아리안에게 쾌감을 느끼게 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아리안의 온몸을 물고 빨았다. 손가락 발가락 끝이 타액으로 젖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전신의 말단을 입에 넣고 샅샅이 애무했다. 아리안이 몸부림치자 아래로 짓눌러 놓고 키스했다. 구음 또한 끈질겼다. 그는 아리안의 페니스를 잡고 거기서 꿀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빨아 댔다. 선단이 발갛게 달아올라 결국은 쾌감 대신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질 때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중간에 그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옷을 찢듯이 벗어 던졌다. 혁대, 부츠, 칼집 고리를 포함해 모든 것을 떼어 내고 나신이 되었다. 그 나신은 견고하게 짜여 있었다. 어깨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는 호쾌한 선은 팔뚝에서 부드럽게 부풀어 탄력적인 근육의 모양을 그렸다. 미학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완벽한 구조의 신체가 아리안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 몸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체모가 적은 피부는 기름칠한 듯이 미끄러웠으며 땀방울이 알맞은 양감으로 부푼 대흉근 사이를 흘러내렸다.
아름다운 신체를 흉터와 문신이 함께 덮고 있었다. 아리안의 시선이 얼핏 그의 왼쪽 가슴팍에 닿았다. 그곳에는 이전 지크프리트의 애검 그람이 남긴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참혹한 자취를 오래 바라볼 시간은 없었다.
칼릴이 아리안을 깔아뭉개듯이 침대로 눌렀다. 두 신체가 붙었다. 여덟 개의 팔다리가 나무뿌리처럼 얽혀들었다.
그는 아리안을 짓누른 채 귀를 빨았다. 혀가 귓속을 드나들면서 동굴 속 울림처럼 척척한 소리가 울렸다. 아리안은 그 소리를 참지 못하고 몸을 비비 꼬았다. 칼릴의 두 팔이 아리안을 꼼짝 못 하게 끌어안았다.
“흐으, 무거워….”
아리안이 작게 흐느꼈다. 그 흐느낌이 칼릴의 몸에 더 불을 붙였다.
칼릴은 이미 완벽하게 흥분해 있었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발기한 남근은 성교의 준비를 마친 뒤였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아리안의 몸을 당장 찢는 대신에 입과 손으로 아리안을 애무했다. 그는 자신처럼 아리안이 젖기를 원했다.
이전, 파살리아에서의 무수한 밤들처럼. 그 녹진했던 밤의 기억은 아직 그에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아리안에게도 그럴 것이다.
실제로 칼릴은 그가 원하는 대로 했다. 그는 아리안이 차라리 빨리 끝내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인내했다.
마침내 아리안이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젖은 입술로 울면서 애원했다.
“빨리 끝내 줘, 빨리, 아, 빨리이… 제발….”
칼릴은 그 애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 따라서 성교는 단지 삽입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삽입했다. 두꺼운 귀두가 흐물흐물해진 구멍을 짓누르고 통과했다. 귀두 끝만을 살짝 아리안의 몸속에 담근 채 그는 그 조임과 열기를 오랫동안 느꼈다. 쾌감은 불길 같았다. 이것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