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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티아 (87)화 (87/130)

#87

이틀 뒤 닛사가 마법이 준비되었다고 알려 왔다. 칼릴은 더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엘테아에서 그가 할 일보다 도르센에서 할 일이 더 많았다.

닛사의 마법으로 그들은 날이 바뀌기 전에 도르센에 도착했다.

그녀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단번에 접었다. 이 이동 마법은 다차원 마법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이 차원의 문명 정도를 고려했을 때 놀라운 수준이었다.

아리안은 약간은 얼떨떨한 상태로 도르센에 도착했다.

도르센.

왕국의 서쪽 방벽.

이 고대 요새는 황량한 황무지와 한가운데에 위치했다. 높고 견고한 성벽이 광활한 황무지를 길게 가르고 있었다. 이 성벽은 길이가 대략 이천 킬로미터에 달했고 이는 하드리아누스 장성의 약 스무 배 정도는 되는 길이였다.

용의 몸통 같은 성벽은 왕국의 남서쪽 해안과 북동쪽 수정 호수의 끝자락까지 닿아 왕국의 경계선을 그었다. 이 서쪽으로는 불모지, 그림자 마수가 우글거리는 죽음의 땅이었다.

도르센은 바로 이 성벽 그 자체였다.

요새는 성벽의 남서쪽 1/3 지점에 위치했다. 이 요새 도시는 다섯 겹의 성벽으로 다시 둘러싸여 있었고 인구의 대부분은 군인과 그 가족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없을 때는 순무와 감자 농사를 지었고 그 외에는 전쟁을 했다.

도르센이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 황폐한 땅에서 사치와 부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황량한 땅줄기 사이의 광맥에서 나오는 막대한 금전은 대부분 그림자 마수와의 전쟁으로 흘러들어 갔다. 때문에 도르센에서의 삶은 엘테아나 비스키우스 같은 남부의 풍요로운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매캐한 석양이 방벽 서쪽 너머의 지평선에 이글이글 깔려 있었다.

닛사의 마법이 끝나는 지점에 그들을 마중 나온 일단의 군대가 있었다. 그들은 칼릴에게 무릎을 꿇어 인사하고 닛사를 향해서도 정중한 인사를 보냈다. 그러나 아리안에 대해서만은 영 아리송한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아무튼 훈련받은 기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중한 태도로 도르센의 주인과 그 마법사,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외지인을 요새까지 호위했다.

닛사의 마법에 약간의 오차가 있었으므로 그 짧은 여정은 약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

석양이 높은 방벽 너머로 사그라들고 마지막 태양이 이지러지며 밤이 찾아왔다.

요새 곳곳에는 횃불이 이글거렸다.

아리안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칼릴과 헤어졌다. 병사 두 명과 긴 옷을 입은 하인 한 명이 그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리안은 차마 고개를 돌려 칼릴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칼릴이 숨기지도 못하고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던 것과 정반대로.

“전하?”

오스발이 그를 불렀을 때가 되어서야 칼릴은 고개를 돌렸다.

가신들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릴은 표정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엘테아는 어떠셨습니까? 사령관은 잘 지내덥니까? 난민 문제로 꽤나 골머리를 앓는다던데….”

부르조 노인은 내내 나불나불 떠들어 대면서 두 손으로는 분주하게 그의 몸에서 망토를 벗겨 내는 등 시중을 들었다. 오스발이 그에게 팔팔 끓인 포도주를 가져왔다.

칼릴은 그에게서 잔을 받아 들고 의자에 앉았다. 칼릴이 의자에 앉자 부르조가 냉큼 다가와 그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노인이 나뭇등걸 같은 손을 뻗어 칼릴의 부츠를 잡았다.

“신발을 벗겨 드릴까요?”

칼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부르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먼 여정을 다녀오지 않으셨습니까. 몸종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향유로 발을 문질러 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노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칼릴에게서 대답이 없자 노인의 입술이 꿈틀댔다. 그가 무릎을 펴고 일어나 칼릴 주위를 목마른 개처럼 한 바퀴 돌았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노인이 질문을 던졌다.

“함께 온 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닛사와 오스발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칼릴을 섬겨 온 나이 든 약제사는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인이 다시 한번 물었다.

“엘테아에서 데려온 자입니까? 사령관은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자는 아닐 텐데요….”

부르조의 의문은 타당했다. 칼릴이 파살리아에서 만났던 신관을 찾는다는 사실은 극비에 부쳐졌으므로 닛사와 오스발을 제외하면 이에 대해 아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칼릴의 한쪽 눈썹이 스윽 치켜 올라갔다. 동시에 닛사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여정이 고단하였으니 전하께서 쉬시도록 저희는 물러나겠습니다.”

오스발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아니, 하지만….”

부르조가 뭐라고 더 말을 이으려 한 순간 닛사가 눈을 부라렸다. 부르조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두 충신이 부르조를 이끌고 떠나려는 순간, 칼릴이 입을 열었다.

“오스발, 척후대를 열 명 선발해 채비를 해라. 북동쪽에서 그림자 마수가 관측되었다지? 그쪽을 살피러 가겠다.”

“이 계절이면 언제나 있던 일입니다. 전하께서 굳이 살피지 않으셔도… 네, 아니요. 아닙니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다음에는 부르텔에 대한 보고를 받겠다. 준비해 놓도록 해.”

닛사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방을 나오며 부르조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양옆의 닛사와 오스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 왜들 그래? 내가 뭘 놓친 거야? 뭐야 대체? 무슨 일….”

“그냥 가시죠, 영감.”

오스발이 그를 질질 끌어당겼다.

도르센의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시일들이 흘러갔다.

칼릴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엘테아에서보다 한층 더 정력적으로 안팎 대소사를 살피고, 직접 움직여 성벽을 순찰하고, 부르텔의 군대에 대한 근황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대공은 젊고 건강했으니 가신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불면을 알고 있는 가까운 수하들만 그의 과로를 걱정했다.

칼릴은 어느 날 불현듯 육신의 피로를 깨달았다.

도르센으로 돌아온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른 오전부터 시작된 두통은 계속해서 그의 관자놀이를 쪼갤 듯이 찍어 댔고 팔다리는 무거웠으며 마치 꿈을 꾸듯 모든 것이 몽롱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증상에 대해 잘 알았다.

이것은 중독 증세였다. 그의 필멸의 신체를 무너트리기 위한 치명적인 독에 의한 증상.

그는 일단 그 고통을 참아 냈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였다. 그와 그의 가신들은 부르텔의 둘째 왕녀를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재배치하는 건에 대해 한창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도르센 휘하에는 서른 개가 넘는 성과 요새들이 있었고 그들의 동의를 모두 얻어 군대를 소집하고 재배치하는 데에는 격렬한 토론, 때로는 무력이 필요했다.

칼릴은 이런 것에 익숙했다. 그는 이런 것을 수천, 수만 년 동안 겪어 왔다. ‘높은 자들’은 그런 것을 차원 마수들의 악취미라 대놓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칼릴은 그를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미래를 예견하고 군주를 결정하고 세상을 ‘더 나은’ 방식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그치들의 고상한 취미에 비한다면야 그 어떤 것인들 악취미가 아니겠는가?

칼릴의 생각의 흐름은 아리안으로 향했다. 그에게 달콤한 이름을 가진 독을 먹여 이 중독 증세를 이끌어 낸 장본인.

한번 아리안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자 더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리안이 누워 쉬고 있을 작은 방을 생각했다. 그의 침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작은 방. 그는 그 방을 아주 고심해서 골랐다. 너무 추워서도, 너무 더워서도 안 되었다. 너무 초라해서도, 너무 호화로워서도 안 되었다. 그의 방에서 결코 가까워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인들이 머무르는 숙소를 같이 쓰게 할 수도 없었다. 수백 번의 고심 끝에 결정한 그 작은 손님용 방에 아리안이 지금 누워 있을 것이다.

지금은 깊은 한밤이었고 칼릴은 방금 막 부르텔에 보내 둔 간자들로부터 이왕녀의 동향을 전해 들은 터였다. 전서조는 군대의 수상쩍은 움직임에 대한 긴급한 전보를 날라 왔고, 가신들이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칼릴은 억지로 생각의 방향을 틀려고 시도했다.

군대, 오브강의 수로를 이용한 물자 보급선, 엘테아의 재정비, 군대의 새로운 배치, 아리안, 아리안, 아리안….

그는 팔을 뻗어 탁자 위를 뒤집어엎었다. 문갑, 잉크병, 검 손질용 가죽 조각 같은 것이 팔에 걸려 나뒹굴었다. 손가락 끝에 놋쇠 잔이 닿았다. 그는 잔을 끌어당겼다. 안에는 술이 절반 정도 차 있었다. 칼릴은 그것을 단번에 들이켠 뒤 다시 술병을 찾아 잔을 채우고 그것도 모조리 마셨다. 희석하지 않은 독한 포도주 원액이 식도를 타고 흐르며 삽시간에 뱃가죽 밑이 뜨끈해졌다.

그 열기는 삽시간에 강렬해졌다. 불붙은 분노는 빠르게 정욕이 되었다.

눈앞이 불타는 듯이 뜨겁고 머릿속은 이글거렸다.

아주 강력한 중독 증상이다.

약. 약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칼릴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진단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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