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86)화 (86/130)

#86

주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리안은 그 소리에 눈을 떴다.

몸이 무거웠다. 그 무거운 몸을 한층 더 무거운 이불이 짓누르고 있었다. 아리안은 늪에 빠진 것처럼 팔다리를 힘껏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실상은 손가락 끝을 조금 꿈질거렸을 뿐이었다.

침대 곁에서 대야에 행주를 짜던 노인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펄떡 튕겼다.

그가 머리를 기울여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눈,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거렸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리안은 눈을 끔뻑거렸다. 노인이 잠시 아리안을 살피다가 몸을 일으켜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노인이 나간 뒤에야 아리안은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그는 작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은 아니었다. 이 방은 작았지만 소박했고 갖춰질 만한 가구들이 대충 갖춰져 있었다. 낮은 침대와 서랍장, 밋밋한 무늬의 두꺼운 태피스트리가 걸린 벽이 차례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벽난로는 없었지만 대신 침대 발치에 놋쇠 화로가 놓여 있었다.

아리안은 천천히 눈만 깜빡였다. 기억도 같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그는 한순간 과거를 헤매다가 한순간에 현실로 내던져졌다.

그는 칼릴을 만났다.

혼란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리안은 어깨를 움츠렸다.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참혹한 밤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손이 온몸을 쥐어 비트는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한바탕 두들겨 맞은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삽시간에 얼굴과 목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조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그를 덮쳤다.

아리안은 칼릴이 자신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난폭한 손아귀 힘, 불타는 것 같던 접촉면, 뜨거운 손, 그런 것들도 따라서 기억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에 눈물이 스며 나왔다. 눈물 알갱이는 간신히 눈 밑을 구르지 않고 아래 속눈썹에 고였다가 천천히 홍채로 스며들었다.

그는 울음을 참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칼릴은 어째서 화가 났던 것일까? 해독약을 내놓으라던 그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리안이 야생 박하 잎을 씹어 만들었던 사랑의 묘약은 아주 단순한 주술이었다.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했고 만드는 것이 어렵지도 않으며 효과가 그리 강하지도,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그런 단순한 주술로 칼릴 정도의 강력한 차원 마수를 이렇게 오랫동안 묶어 둘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용서한 게 아니었던 걸까.’

아리안은 눈물 어린 눈을 한번 깜빡여 눈물을 털어 내고는 생각했다.

‘기억을 되찾아서, 그래서….’

생각이 이어졌다.

이어진 생각 끝은 파살리아에서의 마지막 밤, 칼릴이 바닥에 떨어진 그람을 주워 그 날카로운 칼끝으로 아리안의 심장을 찔러 불멸성을 빼앗았던 그 밤까지 닿았다.

‘그걸로도 용서할 수 없었던 거야.’

그 질량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한 이 청색 초거성 급 초고밀도 생명체는 추락의 상처로 기억을 잃은 틈을 타 자신을 희롱한 아리안을 증오하게 된 것이다.

‘내 잘못이야….’

한순간의 탐욕에 눈이 멀어 그를 상처 주었다.

‘그렇게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기어이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기억을 잃은 칼릴의 다정함과 달콤함에 취해 자신의 잘못을 잊고 있었다. 애초에 그 관계는 자신을 진짜 도르센 대공이라 믿던 칼릴의 정신적 불안정함에 기댄 관계였다. 그나마조차 묘약으로 시작된 허상에 불과했고.

그때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아리안은 다급히 이불자락으로 콧망울 옆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냈다.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소리를 죽일 생각조차 없는 거친 발걸음이 침대로 다가왔다.

아리안은 눈동자를 올렸다가 굳어졌다.

칼릴이었다.

긴 눈이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리안은 황급히 시선을 떨어트려 그것을 피했다.

눈을 아래로 떨어트리고 입을 다문 아리안을 얼굴을 칼릴이 집요하게 훑었다. 서늘한 시선이 아리안의 붓고 갈라진 입술 끝에 닿았다. 그의 눈썹 끝이 한 번 꿈틀거렸다. 그가 몸을 돌렸다.

“상태를 살펴라.”

그러자 그 곁에 서 있던 의사가 다가왔다. 의사가 그를 살폈다.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열을 재고 이불을 젖히고 옷자락을 밀어 올려 피부를 확인했다. 그 내내 칼릴은 곁에 석상처럼 서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리안은 속눈썹을 떨면서 어떻게든 칼릴의 시선을 피해 보려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뒤에 의사가 아리안의 손의 붕대를 살폈다.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교체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그녀는 염증이 생겨 고름과 딱지가 뒤섞인 아리안의 손등에 몇 가지 항생과 지혈 작용을 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약초로 만든 연고를 바른 뒤 새 붕대로 묶었다.

아리안은 파상풍 생각을 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파상풍 예방 접종을 하고 왔을 텐데…. 거기에 생각이 미친 아리안은 스스로가 우스워져 작게 미소 짓고 말았다. 불멸성을, 신성을 잃고 필멸의 존재로 추락하리라는 예상을 어찌 했겠는가? 쿠마에의 시빌라(아폴론의 신탁을 받은 무녀이자 예언자)도 자신의 최후를 예견하지는 못했다.

“흉터가 남을 수도 있겠군요.”

의사가 아리안의 입가에 살짝 떠올랐던 미소를 의아하게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곧장 시선을 거두었다. 칼릴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칼릴은 대답 없이 긴 눈으로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안은 차마 입을 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손가락만 꿈질거렸다.

다른 몸종이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리안은 그것을 마셨다. 달콤씁쓰레한 액체가 식도로 넘어갔다. 아리안은 몇 가지 약초의 이름을 떠올리다가 말았다. 잠이 몰려왔다. 눈꺼풀을 깜빡깜빡거리는데 위에서 칼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인하고 나지막한 저음. 냉철함과 신뢰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여전히….

칼릴과 의사의 대화가 이어졌다.

아리안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큰 병은 아닙니다. 약간의 영양 불균형과 피로가 겹친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 젊으니 금방 회복할 테고요.”

“이동은 가능한가?”

칼릴의 질문에 의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직은 힘듭니다. 마차 여행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하루에 그리 오랜 시간을 이동하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거리를 접는 마법을 버틸 수 있을는지….”

의사가 말을 아꼈다. 칼릴은 시선을 아리안에게 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정도의 요양이면 괜찮아질 것으로 판단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의사가 조심스레 다시 말했다.

칼릴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의사가 찔끔하여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나 칼릴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한 번 저었을 뿐이었다.

“되었다. 나가라.”

의사와 몸종이 서둘러, 그러나 소리 내지 않고 방을 떠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사라졌다.

이제 방 안에는 아리안과 칼릴 단 둘뿐이었다.

아리안은 밀려오던 수면욕이 도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긴장감이었다. 손끝이 따끔거렸다. 그는 눈을 감고 잠이 오는 척을 했다. 눈꺼풀과 뺨 위로 따끔한 시선이 떨어졌다.

아직, 아직 아리안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와 대면할 준비. 용서를 빌거나,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거나, 재앙에 대해 말하거나… 그 무엇도.

다행히 칼릴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낮은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어지던 침묵이 끝났다.

“우린 이제 도르센에 갈 거다.”

그 목소리는 갑작스러운 데 비해 침착하고 냉정했다.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떴다.

칼릴이 그 목소리만큼이나 차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서늘한 푸른 눈.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우, 우리?”

“그래. 너하고 나.”

칼릴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넌 아마 그 땅에서 죽겠지. 인간의 수명대로.”

그렇게 말하는 그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리안은 그 표정에 실린 감정을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칼릴이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그의 발소리가 침대에서 멀어졌다.

***

다행히 아리안의 병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틀 뒤 아리안은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아래가 지나치게 난폭하게 혹사당했던 탓에 걸을 때마다 약간씩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리고 걸었다. 의사는 연고를 처방하며 그마저 곧 나아질 것이라 말했다.

칼릴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열흘이 가기 전에 그는 닛사를 불러 도르센까지 거리를 접는 마법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닛사가 준비되기까지의 이틀 동안 그는 엘테아를 둘러보았다. 엘테아의 분위기는 어수선했으며 전후의 혼란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그 전쟁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불안에는 타당성이 있었다. 왕녀의 군대는 부르텔에서 다시 전력을 가다듬고 있었고 남부의 영주들이 그녀의 군대를 먹이고 입히는 이상 그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을 터였다.

칼릴은 사령관과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지내며 수많은 안건을 처리했다. 그는 아리안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큰 효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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