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83)화 (83/130)

#83

“제기랄!”

여러 번의 시도 끝에야 간신히 열쇠가 돌아갔다. 그는 자물쇠와 열쇠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방 안은 복도와 다를 바 없이 어두웠다. 칼릴은 핏발 선 눈으로 어둠 속을 훑었다.

그 한구석에 아리안이 있었다. 그는 방의 모서리에 웅크리고 있었고 졸음이 덜 깬 얼굴이었다. 눈을 끔뻑거리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 방에는 가구조차 제대로 없었다. 아리안은 가로 세로의 곱이 2평방미터나 고작 될 듯 말 듯 한 조그마한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너덜거리는 모포 한 장을 둘러쓰고 있었다.

석벽에서는 냉기가 밀려왔다. 칼릴은 자신의 온몸에서 끓어 넘치는 열기 탓에 그 선득함을 이제야 인식했다.

아리안은 눈처럼 창백했다.

그 얼굴을 보자 열기에 분노가 섞였다. 이 분노는 묘약 탓에 촉발되었으리라. 더 이상 묘약에 감정이 휘둘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칼릴은 그에게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잡았다.

“해독제를 내놔.”

그는 아리안에게로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당장!”

그 낮은 음성이 텅 빈 석실을 웅웅 울렸다.

아리안이 얼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허우적거리듯이 앞으로 뻗어 나와 칼릴의 팔을 더듬었다. 그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칼릴은 그 온도마저 견디기 힘들었다.

“해독제라니….”

아리안의 목소리는 넋이 나간 듯도 했고 혼이 빠진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딱 그 표정만큼이었다.

“그건 박하 잎으로 만든 거야. 그건, 그냥 하룻밤을 위한… 그런 거였어. 해독제는 없어. 애초에,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은 거였다구. 약효는 이미 다 떨어졌을 테고….”

푸릇한 눈동자에 울먹울먹 눈물이 고여 갔다. 칼릴은 그 눈동자가 서서히 젖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목도해야만 했다.

“왜 이제 와서 그 얘길… 그때 용서해 준 게 아니었어?”

용서라고?

칼릴은 아리안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동시에 팔에 닿아 있던 아리안의 손도 떨어져 나갔다.

주저앉듯이 바닥에 손을 짚은 아리안이 칼릴을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칼릴은 그 시선이 주제넘다고 생각했다. 지금 누구보다 원망이 큰 사람은 칼릴이었다. 아리안이 아니라.

울먹울먹한 눈이 억울하다는 듯이 칼릴을 보았다.

칼릴은 잡아먹을 듯이 아리안을 마주 노려보았다.

“약효가 다 떨어졌다고? 그럼 지금 이건?”

“지금 이거라니….”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에 칼릴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아리안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당겼다. 커다란 손이 길고 가는 목을 낚아챘다. 아리안은 화살에 꿰인 사슴처럼 작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끌려왔다.

몸이 다가오자 아리안의 냄새가 났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진탕을 굴렀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신성함, 그 절정에 있는 냄새였다.

“난 당신이 그날 날 용서한 줄 알았어… 나한테 키스해 줬잖아. 내가 키스할 때도….”

아리안이 또 영문 모를 소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 칼릴은 그 입술이 발음하는 단어를 참을 수 없었다. 그 단어가 그를 자극했다. 그 단어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칼릴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칼릴은 예전을 기억한다. 홀린 듯이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키스를 애타게 바라는 아리안의 눈빛을. 키스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그를 훔쳐보던 아리안을.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몽롱한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얼굴을 붉히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다. 애초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살인자에게 붙잡힌 양 혼비백산하며 펄떡거리는 거부 반응을 예측한 것도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듯이 커다래진 눈이 칼릴을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펄떡거리는 소리가 칼릴에게까지 들렸다. 얼굴은 기절할 것처럼 창백했다. 그 반응에 칼릴의 눈이 붉어졌다.

“하….”

비웃음과 신음 중간 정도의 소리가 흘러나갔다. 그는 아리안의 목을 더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아리안의 눈썹이 일그러지면서 괴로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칼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손에 힘을 풀었다. 아리안이 작게 콜록거리면서 달아나려고 발로 바닥을 밀었다. 그의 몸이 약간 뒤로 물러났지만 벽이 등에 닿아 있어 더는 멀어지지 못했다.

“왜? 이제는 이럴 필요도 없다는 건가?”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나, 잘 모르겠어. 칼릴, 왜, 갑자기, 여기서….”

아리안의 눈은 이미 눈물로 흥건했다. 이제 곧 넘쳐흐를 듯이 아래 속눈썹이 축축했고 동공 표면이 넘실거렸다. 변명을 주워 삼키는 입술이 달싹거렸다.

칼릴의 시선이 거기에 꽂혔다.

잠시 중얼거리던 아리안이 그 시선을 느꼈는지 말을 멈췄다. 입술이 딱 다물리며 재잘거리던 소리도 멎었다. 겁먹은 듯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두 눈이 칼릴을 올려다보았다. 칼릴은 그 눈이 황홀히 젖어 입맞춤을 갈구하던 것을 기억했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촉발된 감정에 불이 붙었다.

칼릴의 손이 우악스럽게 아리안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리안이 비명 대신 히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 위로 다시 입술이 붙었다. 칼릴의 손이 아리안의 등을 더듬었다. 거친 옷 밑으로 곧고 미끈한 등선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알아차리자 아리안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리안이 손으로 칼릴의 머리를 밀었다. 칼릴이 약간 밀려나며 입술이 떨어졌다.

“자, 잠깐만. 잠깐만… 칼릴. 오해가 있어. 오해야… 그 약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약이 아니야.”

아리안이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칼릴의 머릿속에 들어가기는커녕 귓전에서 튕겨 나왔다.

칼릴이 어렴풋이 몽롱해진 눈으로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

차원 마수가 그 흥분과 정반대로 건조하게 속삭였다.

아리안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거짓말이 아니야. 믿어 줘… 그 약은 그런 게 아니었어. 그리고 난… 난 당신이 날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용서 안 했어.”

어떻게 용서한단 말인가?

사랑의 묘약으로 그를 희롱하여 이 단일 차원에 영원히 묶어 두려는 추악한 계획을.

그리고 그 계획이 절반이나마 성공했음을.

분노와 흥분이 같은 기울기로 치솟았다. 약에 지배당하는 육신이 끔찍하면서도 욕망은 달콤했다. 이전까지의 금욕적인 3년이 거짓말처럼 이 몸을 만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칼릴은 손을 뻗어 낡은 옷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우악스러운 힘에 소매 솔기가 뜯어지며 안쪽이 드러났다. 칼릴은 그것마저 벗겨 냈다.

“하지 마, 하지 마….”

아리안이 두려운 듯이 중얼거렸다. 저항은 크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칼릴의 행위를 기꺼워하지도 않았다. 칼릴은 흥 하고 나직하게 비웃었다.

“왜? 전엔 좋아서 자지러지지 않았나? 날 먼저 희롱했던 것도 너였어.”

“아냐, 그땐… 그때는….”

아리안이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땐, 미안해. 그때는… 그건 미안해. 그냥….”

“미안하다면 행동으로 보여 봐.”

칼릴이 아리안의 뺨으로 입술을 붙여 미끄러트리면서 속삭였다.

“내켜서 시작했던 건 아니더라도 네가 이 짓을 좋아했던 건 진짜였잖아.”

그것마저 연기였다면 아리안은 대단한 배우가 틀림없었다. 칼릴은 굳어 있는 아리안을 비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면 그런 척이라도 해 봐.”

비웃는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진 아리안 위로 떨어졌다. 모순적으로 그 입술은 부드러웠다.

곧 허름한 옷이 뜯어져 나가고 그 틈으로 칼릴의 손이 들어왔다. 딱딱한 손바닥이 집요하게 아리안을 쓰다듬었다. 그 몸은 여전히 희고 보얗고 반짝거렸다. 몇 번 어루만지기도 전에 칼릴은 완벽하게 흥분했다. 성기가 터질 듯이 발기하고 뒤통수가 아플 정도로 뻐근하게 저려 왔다.

약으로 촉발된 흥분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리안의 몸에서는 그를 미치게 하는 향기가 났다. 아리안은 더 이상 불멸이 아닌데도 그 신체와 피에서는 여전히 정순하고도 아름다운 향기가 풍겼다. 칼릴은 그의 떨어진 핏방울에서 황홀한 백합이 피어오르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 흰 목을 덥석 물어뜯었다.

“아….”

희미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가 피부를 파고들며 핏방울이 스며 나왔다. 그 핏방울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겨 올랐다.

칼릴이 입을 떼고 피 묻은 얼굴로 아리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원 마수의 푸르고 가느다란 눈초리에는 이미 이성의 기색이 희미했다. 아리안의 몸은 이제 숨길 수 없으리만치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아니. 네가 시작한 거야.”

칼릴이 다른 대답을 했다. 그리고 거의 즉시 아리안의 몸 위로 올라타며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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