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82)화 (82/130)

#82

“칼릴! 정말 당신이었어! 맙소사, 나, 난, 여기서 당신을 만날 줄이라고는… 도르센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내가 있는 걸 알고 온 거야? 당신을 만나려고 했는데….”

아리안.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목소리는 삼 년 전과 한 치 다름없이 그였다.

흉곽 안쪽이 술렁거렸다. 칼릴은 아리안에게서 달아나듯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멀리도 가지 못하고 고작 두 발자국 떼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리안은 약간 당황한 듯 팔을 앞으로 뻗어 더듬었으나 칼릴에게 닿지는 못했다. 그가 칼릴을 따라오려다가 멈칫했다.

“칼릴?”

그 부름에 칼릴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의 신체를 더듬었다. 이마. 눈썹뼈. 귓바퀴. 턱. 그리고 칼릴은 그제야 그의 성장을 알아차렸다. 아리안은 키가 더 자랐다. 살집이 있던 뺨에는 살이 내려 전보다 수척했고 대신 성숙함이 맴돌았다. 눈은 여전했다. 영롱한 녹색 눈. 그러나 눈꼬리가 조금 더 떨어지고 콧대가 날렵해지며 전과 다른 농숙한 빛이 얼핏얼핏 비쳤다.

성장. 필멸. 짐작하고 있던 바였으나 그것을 막상 목도하자 알 수 없는 충격이 그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칼릴? 괜찮아? 두통이 있어? 아, 맞아! 몸은 어때? 상처는….”

아리안이 또다시 재잘거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칼릴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은 과거 한 침대에서 잠들었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와 함께 그에게는 익숙지 못한 감정이 분출했다. 원망, 미움, 그리움. 전부 다 생소했다. 칼릴은 그것들이 화산처럼 폭발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아리안을 관찰했다.

아리안은 무구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믿을 수는 없지.’

칼릴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런 얼굴로… 삼 년 전에도….’

그 생각을 했을 때 떠오른 감정은 통각을 닮아 있었다.

“이제 연기는 안 해도 돼.”

칼릴은 통각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리안이 어깨를 흠칫했다. 칼릴은 그것이 죄책감이나 혹은 속을 간파당한 데에 대한 충격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아리안은 그저 삼 년 만에 듣는 칼릴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공회가 네게 뭘 시켰는지 이미 알고 있어.”

칼릴은 주의 깊게 아리안의 얼굴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너도 내키는 건 아니었겠지.”

어쩔 수 없는 냉소적인 비웃음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치들의 병신 짓이야 천 년 이천 년 일도 아니지만… 정말로 데릴라 짓거리를 꾸미다니. 그것도 나를 상대로.”

아리안은 입을 벌린 채 멍해진 얼굴로 칼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칼릴은 그 얼굴이 놀랍게도 정말 무구하다고 생각했다.

“…데릴라가 뭐?”

아리안이 멍청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칼릴은 그 어리석음을 비웃으면서 대꾸했다.

“네가 날 중독시킨 걸 알아.”

“중독…?”

“…애정의 묘약 말이야.”

칼릴은 사랑 대신 ‘애정’이라는 발음을 할 때 아리안을 죽이고 싶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리안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붉어졌다. 그 붉은 기가 삽시간에 이마 끝에서 목덜미까지로 내려갔다.

“그, 그건….”

“해독제는 어디 있지?”

칼릴은 아리안이 변명하게 두지 않았다. 변명을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반대로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는 후자를 눌러 죽였다.

“너 같은 자들이 해독약 없는 독약을 만들 리 없지.”

“해독약이라니? 그, 그건, 그건 일회성이었어. 약효도 이미 다 했고…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그때 얘기를….”

아리안이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 지껄였다.

칼릴이 하, 하고 낮게 숨을 내뱉었다.

“약효가 다했다고?”

“그래. 애, 애초에 그렇게 강한 약도 아니었어… 그때 하룻밤으로 이미….”

아리안이 웅얼거리다가 파드득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칼릴. 궁정 마법사, 아니, 이제는 국왕이 되었는데, 그러니까, 그건 그냥 단순한 이곳 차원의 악의가 아니야. 그건 당신이나 나 같은 거야. 신성 재판 자체가 예언의 일부였어. 당신을 여기로 추방한 건 실수였고… 이걸 공회에 알려야 해.”

아리안의 말이 길어졌으나 대부분은 칼릴의 머릿속으로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칼릴은 단지 공회라는 단어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억누르던 원망과 미움이 참을 수 없이 커졌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팍이 부풀어 오르고 어깨가 얕게 오르내렸다.

“…칼릴?”

아리안이 그를 불렀다. 걱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니. 칼릴의 착각이리라. 아리안이 그를 걱정한다면 오로지 그 이유는 예언 때문이겠지. 언젠가 그가 재앙의 왼쪽에 서는 기수가 되리라는 그 예언.

“괜찮아?”

칼릴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발이 저절로 뒷걸음질 쳤다. 더 이곳에, 아리안과 같은 자리에 있다가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방을 나왔다.

“칼릴!”

아리안이 그에게로 달려들려고 했다. 그는 그 전에 문을 닫았다. 쾅쾅쾅,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기다리던 닛사가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전하. 그가 맞습니까?”

칼릴은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이 든 마법사는 마치 대답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칼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목덜미와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닛사는 그것을 알아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문 준비를 할까요?”

“아니. 일단은….”

칼릴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그는 곧 완전히 허리를 폈다. 창백해졌던 얼굴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일단은 이대로 둬.”

닛사는 잠시 칼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미뤄 두고 단지 엘테아 체류가 예정보다 길어지겠구나 하는 한 가지만 떠올렸다.

이후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는 간소했다. 닛사뿐만이 아니라 사령관,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자들마저 칼릴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령관은 엘테아 주둔군의 향방, 거기에 더해 부르텔로 퇴각한 둘째 왕녀의 군대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닛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리를 접는 마법의 여독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자리가 파했다.

식사 시간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칼릴은 식탁 앞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다른 생각에 빠진듯한 얼굴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닛사뿐이었으나 그녀가 입을 굳게 다물었으므로 모두가 의아해할 뿐이었다.

방으로 혼자 돌아온 칼릴은 탁자 앞으로 걸어가 주전자째로 물을 들이켰다.

방은 넓고 천장이 높았다. 과거 엘테아의 영주가 쓰던 이 침실은 3년에 걸친 내전 동안 도시의 소유권이 이쪽저쪽으로 오가는 과정에서 화려한 가구나 장식 같은 것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소실되었으나 그 규모만은 여전했다.

엘테아는 중부 최대의 도시였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비옥한 올굽 평원의 물자가 이곳을 통해 왕국 전체로 퍼졌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오브강을 이용한 수상 무역이었다. 이 거대한 침실은 그 부유함의 증거였다.

칼릴은 방 가운데에 놓인 긴 카우치에 털썩 몸을 내던졌다. 팔다리가 무거웠으나 정반대로 전신에는 날아갈 것처럼 열기가 들끓었다. 그의 손안에서 작은 열쇠가 굴렀다. 아리안이 갇힌 방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 그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그 작은 감옥. 꾀죄죄한 행색의 아리안.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찬물을 다시 들이마셨다. 냉수가 식도를 통과해 위장까지 내려가며 속을 진정시켰으나 잠시였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술의 취기가 지금 다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방을 빠르게 서성였다. 열쇠를 몇 번 꾸욱 쥐었다 놓았다. 거친 손바닥에 열쇠 자국이 뚜렷이 남았다.

메데이아의 깔깔대는 비웃음 소리가 떠올랐다.

‘아, 짚이는 데가 있나 보군. 맙소사. 제2의 삼손이, 트리스탄이 여기 있었군.’

사랑의 묘약(중세 유럽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설에 등장하는 사랑과 죽음의 음료. 상대와 불가항력으로 사랑에 빠져, 하루를 못 만나면 병이 나고 사흘을 못 만나면 죽는다고 전해진다.).

사랑의 묘약이라니!

그런 치졸한 수법이라니 그야말로 공회가 쓸 법한 것이었다.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침실을 뛰쳐나갔다.

아리안이 갇힌 방은 음습한 복도 끝에 있었다. 칼릴이 내린 명령은 달아난 죄인을 다치지 않게 생포해 놓으라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좋은 대우를 받을 리는  없다. 칼릴은 그 당연한 사실을 스스로에게 주지시켜야만 하는 현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는 문 앞에 당도했다.

복도는 컴컴했고 문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마저…. 칼릴은 우악스럽게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손이 덜덜 떨려 몇 번이나 열쇠가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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