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얼굴을 보여 보시오.”
아리안은 후드를 벗었다. 사실 기나긴 여정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기 때문에 아리안은 꼬질꼬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모는 제대로 감춰지지 않았다. 병사들의 얼굴이 더 기이해졌다. 그들이 서로 작게 수군거렸다. 아리안은 더욱 불안해졌다.
“이쪽으로 오시오.”
“무, 무슨 일이죠?”
아리안이 묻자 병사가 대답했다.
“별건 아니오. 순례자들은 상인이나 난민과 출입 절차가 다르오.”
정말일까? 하지만 정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리안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리안은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대로 작고 좁은 감옥 같은 방에 갇혔다.
“열어 줘! 열어 줘요!”
첫 두 시간은 쉴 새 없이 방 안을 빙빙 맴돌면서 문을 두드리고 고함을 쳤다.
“누구라도 좋으니 사람을 불러 줘요! 왜 날 여기 가둔 거야!”
그다음 두 시간 동안은 여기에 갇힌 이유를 알기 위해 애썼다.
“난 첩자가 아니에요! 난 순례자라구요! 난….”
마지막 두 시간은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뒤에 아리안은 완전히 지쳐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문이 살짝 열리더니 안으로 음식이 들어왔다. 아리안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음식을 안으로 밀어 넣은 손은 재빨리 사라지고 문이 다시 쿵 닫혔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이어졌다.
둥근 양철 쟁반 위에는 거친 빵에 퍽퍽한 곡물죽이 놓여 있었다. 아리안은 일단 그것을 먹었다. 자백제가 들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자백이라도 할 수 있게 누군가 들어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따듯한 것이 속에 들어가자 피로가 밀려왔다. 아리안은 쪼그린 채 설핏 잠들었다.
며칠이 더 흘렀다. 아리안은 더 꾀죄죄해졌다.
나흘째 되던 날 음식을 가져다준 사람이 문을 평소보다 더 넓게 열었다. 아리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재빨리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이 더 열리면서 사람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조금 마른 소녀였다. 그녀는 아리안의 꼴을 마주하더니 흠칫했다. 첫날 하루 종일 문을 두들겨 댔던 탓에 손에 남은 상처에 거뭇하게 딱지가 붙어 있었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안색은 초췌했다.
아리안이 음식을 내려놓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저기… 난 어떻게 되는 거야?”
대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가 몇 분 뒤에 돌아왔다. 문틈으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보이는 것이 불쑥 들어왔다.
“내, 내가 줬다고는 말하지 말아요.”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기고 쿵 문을 닫아 버렸다.
아리안은 그녀가 떨어트린 수건을 주워 들었다. 이런 곳에서 마주한 대가 없는 호의에 마음이 조금 따듯해졌다. 그는 수건으로 손에 남은 상처를 살살 닦아 냈다. 상처는 제때 처치하지 않은 탓에 딱지와 수포가 뒤섞여 차마 못 볼 꼴이었다.
‘어쩌면 이 상처가 나를 죽일지도 모르지.’
아리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 냈다. 그는 수건의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그것으로 온몸을 닦았다.
누군가 그를 가둬 두었다면 분명 목적이 있겠지. 그는 최악을 상상했다. 파살리아로 되돌려 보내지는 것… 아무튼 그 최악조차 영원한 기다림은 아닐 것이다.
***
칼릴은 그답지 않게 조급하게 움직였다.
닛사가 진정하시라는 충언을 올렸으나 한 귀로 들어왔다가 반대편으로 흘러나갔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이미 사흘을 소모했다. 부르텔 북쪽으로 보낸 군대에서 돌아온 척후병을 만나기 전까지는 도르센을 비울 수 없었던 탓이었다.
처음 그는 척후병을 만나는 일을 오스발에게 일임하려 했으나 모든 이들의 결사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침착하려고 했다. 반절쯤은 실패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엘테아에 가 있었다. 엘테아에서 ‘비슷한 사람’을 잡아 두었다는 소식을 전령이 전해 왔던 그 순간부터.
당장 몸을 일으켜 달려가려는 그를 닛사가 막았다. 닛사는 자기가 보고 오겠다고, 맞다면 데려오겠다고 자청했다. 칼릴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의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여장은 간소했다. 그는 닛사만을 데리고 움직였다. 아직까지 태양이 모두 지지 않았으므로 닛사의 마력은 충분히 남아 있었고 단 두 명을 움직여 엘테아까지 가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다.
엘테아 주둔군의 사령관은 도르센의 오래된 가신이자 유능한 기사였고 동시에 칼릴이 신뢰하는 부하이기도 했다. 그녀는 칼릴이 이렇게 빨리 달려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약간 놀란 표정이었으나 아무튼 당황하지 않고 칼릴을 맞이했다.
엘테아는 칼릴이 떠났을 때에 비해 제법 정비된 후였다. 이 중부 최대의 도시는 여전히 난민으로 우글거렸으나 그래도 수로와 육로는 거의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칼릴은 올굽 평원의 물자가 남부로 흘러나가길 원하지 않았으므로 이 일은 제법 기쁜 일이었다.
사령관은 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칼릴은 다른 볼일이 먼저였다.
“그자는?”
칼릴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사령관이 아, 하고 머리를 기울였다.
“가둬 두었습니다. 별 저항은 없었습니다.”
그 대답에 칼릴은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명치에서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으나 그것이 분노인지 기쁨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침착하게 명령했다.
“안내해.”
사령관이 그를 성 안쪽으로 데려갔다.
“정말 달아난 신관입니까?”
사령관은 자세한 상황은 몰랐기 때문에 그저 닛사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늙은 마법사는 큰 마법을 펼쳤음에도 동요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글쎄. 달아난 건지 잃어버린 건지. 아니면 버렸던 건지.”
사령관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들은 곧 한 방 앞에 도착했다. 문은 낡았으나 튼튼했고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방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까웠다. 닛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하….”
그녀가 칼릴을 향해 무어라고 말을 하려 했다. 칼릴은 손을 들어 올려 그것을 막았다. 닛사가 입술을 닫고 뒷걸음질 쳤다.
칼릴은 사령관에게 열쇠를 건네받아 직접 문을 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군의 심기를 짐작한 닛사가 사령관을 붙잡고 같이 뒤로 물러났다. 사령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닛사를 내려다보았다.
“전하께서 들어가시게 둡시다.”
“하지만 위험한 자라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찾던 자가 맞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닛사는 이미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한 달 전, 오스발이 뿌려 두었던 첩보원들이 파살리아의 소식을 가져왔다. 이왕자가 파살리아를 도망치듯 빠져나갔으며 그 이후로 국왕이 대노하였다는 전보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파살리아와 아슬랭의 동맹을 믿지 않았다. 수정 호수의 요정족이 이제 와서 왕국의 권력 다툼에 끼어든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
닛사는 오래전 이왕자 아덴과 함께 파살리아를 방문했던 아슬랭 소백작을 떠올렸다.
‘그자가 신관을 만났었지….’
닛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슬랭과 신관 사이에 친분이 있었다면 요정족들이 신관을 파살리아에서 빼내려 하는 것도 납득할 만한 일이다. 이왕자가 동맹을 가장하여 파살리아에 들어간 것도 처음부터 신관을 빼내기 위해서였다면 국왕의 분노도 설명되고.
끼이익.
묵직한 문이 바닥을 긁고 경첩이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하.”
칼릴이 낮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는 그 틈에 섞여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닛사는 사령관과 함께 더 뒤로 물러났다.
칼릴이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한 발짝, 두 발짝. 고작 그것이었다.
텅,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후우. 후우.”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다.
방 안은 어두웠다. 창문은 없었고 닫힌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흐릿한 불빛이 전부였다.
부스럭, 하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바닥에 손이나 무릎 따위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저, 저기요. 이봐요. 높으신 분인가요? 나, 나는 첩자가 아니라니까요. 얘길 좀 전해 줘요….”
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칼릴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에게로 가까워지는 그림자를 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며 실루엣이 차츰 뚜렷해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이루는 친숙한 선. 칼릴은 그 선을 따라 저 신체를 밤새도록 입술로 쓰다듬은 적도 있었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이루는 뼈마디의 모양까지가 마치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뚜렷하게 떠올랐다.
다가오던 그림자가 우뚝 멈췄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칼릴은 그의 한결 다급해진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빠르게 쿵쿵대는 심장의 속도.
“…칼릴?”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릴은 이 이후를 상상했다. 왜 여기 있느냐, 날 잡아 가둔 것이 당신이냐, 어떻게 된 거냐, 왜 지크프리트를 죽였느냐… 그 외의 수많은 추궁들.
“카, 칼릴….”
먹먹하게 메인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는 이상했다.
그림자가 빠르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뜨거운 두 손이 와락 그의 양팔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칼릴은 소금 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