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80)화 (80/130)

#80

도르센까지는 먼 여정이었다.

발로 걷는 여행은 그야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이전 순례길을 따라 육 년을 걸은 적이 있었지만 아무튼 옛일이었다. 아리안은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 가며 길을 따라 걸었다.

왕국의 가도는 잘 정비된 편이었으나 3년에 걸친 내전 탓에 많은 길이 끊어지거나 소실되어 있었다.

운 좋게도 아리안은 엘테아까지 가는 상단을 만났다. 그들은 순례자의 옷을 입은 아리안을 기꺼이 일행에 끼워 주었다. 아리안은 상단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여정이 중반쯤 왔을 때 그들은 오브강의 지류에 도달했다. 작은 항만은 엘테아와 올굽 평야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엘테아까지는 수로로 고작 이틀 거리였다.

그러나 그 항만은 지금 닫혀 있었다. 선원들은 보이지 않았고 몇 척의 텅 빈 선박만이 항구에 정박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소식을 접했다.

“허, 참. 엘테아가 다시 점령당했다는군.”

상단주가 혀를 차며 걸어 나왔다. 마차 바퀴를 손보던 나이 든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뭐요? 그럼 이제 어떡해?”

“어쩌긴….”

상단주도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이 상단은 남부에서 식량을 싣고 엘테아까지 가던 길로, 올굽 평원으로부터의 식량 수급이 막힌 탓에 폭등한 중부의 식량 가격으로 시세 차익을 노리던 차였다. 한데 엘테아가 다시 도르센에게 함락당했다 하니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엘테아가 그렇게 됐으면 왕녀는 어쩌고 있다던가?”

“어디더라, 부르텔이던가 거기까지 후퇴했다던데….”

“그쪽에서 군량을 사들이고 있지는 않다고?”

“그거야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겠지?”

“육로로 엘테아까지는 못 가나?”

“간다 해도 뭐 밀 가격이 예전만은 못하겠지. 본전치기야, 본전치기.”

그들이 한참을 수군덕대더니 여자가 에라이, 하고 바닥에 침을 퉷 뱉었다.

상단주가 마차에서 약간 떨어진 나무 아래에서 부르튼 발을 주무르고 있는 아리안에게로 다가왔다.

“이보시오, 순례자 양반.”

발을 주무르던 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잖아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던 차였다.

“아무래도 엘테아까지는 못 갈 것 같소. 수로가 죄다 막혔어. 육로로 간다 해도 곡식 가격이 예전만치는 못할 거고….”

“그럼 어떻게 하나요?”

“에휴. 뭐. 어떻게든 팔고 가긴 해야지, 여기까지 싣고 왔으니. 우린 부르텔까지 갈 거 같은데, 왕녀의 군대가 거기서 곡식을 사들이고 있을 테니 말이요.”

상단주가 영 입맛이 쓴 표정을 지었다.

“그쪽은 어찌하겠소? 부르텔까지 같이 갈 거요?”

아리안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부르텔이 대륙의 어디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패퇴한 왕녀가 군대를 물렸다니 도르센에서 가까운 위치는 결코 아닐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엘테아로 가야 해요.”

“수로가 막혔으니 한참 돌아가야 할 터인데… 하긴 순례자 양반이니 길을 함부로 바꿀 수도 없겠지.”

그러면서 상단주가 한숨을 쉬었다.

“전쟁 때문에 이래저래 우리 같은 사람들만 고생이오.”

아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고마웠어요.”

“별말을, 우리야말로 뭐 적적지 않게 왔지. 조심해서 가시오. 군대가 한바탕 휩쓸고 갔으니 도적들을 만나지야 않겠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니겠소.”

“그쪽도 몸조심하구요.”

상단주가 아리안을 향해 악수를 권했다가 굳게 두어 번 흔들고는 물러섰다.

아리안은 다시 마차 쪽으로 향하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손에 힘을 주어 아픈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아리안은 항구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는 고된 여정의 여파로 밤새도록 끙끙 앓았는데 이는 몹시 생소한 일이었다. 열이 올라 핑핑 도는 머리로 아리안은 자신의 필멸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작은 상처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피로마저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무력하게도 느껴지고 슬프게도 느껴졌다. 그는 눈물 몇 방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것을 열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잠을 청했다.

다행히 아침이 되자 열은 내렸다. 몸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어제처럼 무겁지는 않았다.

그는 짐을 챙겨 여관을 나왔다. 이른 새벽, 항구는 물안개에 잠겨 있었다. 가을 공기는 쌀쌀했으며 강의 습기가 섞여 눅눅하기까지 했다. 온 사방에서는 축축한 비린내가 났다.

아리안은 이정표를 더듬어 다시 길을 나아갔다.

혼자 걷는 시간 동안은 이전과 달리 수많은 상념이 휘몰아쳤다. 아리안은 모든 불길하거나 유쾌하지 못한 상상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내고 애써 밝은 생각을 하려 했다.

그는 파살리아에서의 한 밤을 떠올렸다. 칼릴이 부드럽게 그의 등을 쓰다듬던 밤을.

더 옛날도 생각했다. 칼릴에게 반드시 데리러 갈 것이니 기다려 달라고 부르짖던 그날과, 연회의 밤 몰래 칼릴의 방에 숨어들어 그를 기다리던 초조한 몇 시간을. 아리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던 칼릴… 그것은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약간 우습게까지 느껴졌다.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킥킥 웃고 말았다.

그런 날들이 한참 더 지나자 어느새 아리안은 엘테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강을 낀 도시는 수면에 반사된 빛으로 반짝거렸다.

이 강을 넘으면 올굽 평원이었고 거기서 강을 따라 평원을 북서로 가로질러 올라가면 도르센이었다. 아리안의 계획은 여기서 배를 타고 올굽 평원을 통과한 뒤에 거기서 다시 육로로 도르센까지 이동하는 것이었다.

수로를 따라 배들이 들락거렸다. 강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다리 위로 무언가를 그득그득 실은 수레들이 바쁘게 오갔다.

도시의 소란스러움과 열기가 아리안이 있는 멀찍한 곳까지 전해졌다. 그것과 함께 아리안은 긴장된 분위기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리나 창칼을 든 병사들이 돌아다녔다.

아리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막 전쟁을 끝낸 도시는 모든 것에 예민했다.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모든 선박과 수레는 통행증이 없으면 이곳 엘테아의 항구를 절대 통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항구는 성벽 안쪽에 있었다.

그는 아덴이 준비해 준 순례자의 신분 패를 가지고 있었지만 갓 전쟁을 겪은 이곳에서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도시로 가까워질수록 미처 지워지지 못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치열했던 전투의 자취였다. 물비린내에 섞여 그것은 더욱 역겹게 느껴졌다.

도시 입구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전쟁 난민들이었다. 병사들이 그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 곁을 지나가다가 얼결에 병사가 건네는 빵 덩어리를 하나 받고 말았다.

“아니, 나는….”

그러나 병사는 아리안의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냉정하게 잘라 냈다.

“한 명에는 그것 하나뿐이야! 다음!”

“아니, 난….”

아리안은 이 줄이 도시로 들어가는 줄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성벽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그러나 그가 미처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뒤에서 사람들이 사납게 아우성쳐 댔다.

“욕심부리지 마!”

“받았으면 빨리 꺼지라고!”

“우린 굶주린 애가 다섯이야!”

병사가 따라 고함쳤다.

“빵은 많아! 소리 지르지 마! 밀지도 말고!”

아리안은 결국 빵 하나를 들고 그 줄에서 쫓겨났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에 탄 것처럼 거뭇하게 지저분한 난민들이 성벽 앞에 모여 있었다. 엉성한 천막은 색색으로 알록달록했으나 그 밑의 사람들은 모두 추레했다. 아리안의 꼴도 사실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리안은 손가락을 빠는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볼이 움푹할 정도로 말라 있었고 얼굴이 지저분했다. 그 애는 아리안이 손에 쥔 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리안은 아이에게 빵을 줘 버렸다. 그러자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빵을 조금 뜯어내 아리안에게 도로 건넸다. 그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너 다 가져도 돼.”

아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아이가 아리안을 몇 걸음 따라오다가 멈췄다. 아리안은 아이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복작복작한 성문 앞을 한참 헤맨 뒤에야 간신히 성으로 들어가는 줄을 찾아냈다. 주로 상인들이 그 줄에 서 있었다. 그들은 수레에 올라타 있거나 아니면 나귀, 또는 말을 타고 있었다.

아리안은 그 틈에 끼어들었다.

그는 차례가 오기까지 이틀을 꼬박 기다렸다. 마지막 날 새벽에는 서리가 내렸다. 그는 모포를 둘러쓰고 그 서리를 고스란히 맞았다.

세 개의 해가 하늘 정중앙에 올라갔을 때쯤 드디어 아리안의 차례가 되었다. 피로하고 지루한 기색의 병사가 아리안의 신분 패를 확인했다.

“어디서 왔지?”

“아, 아슬랭이요.”

아리안은 긴장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긴장하고 말았다.

“아슬랭?”

“요정은 아니에요. 그곳의 신전에서 왔어요. 저는 순례자예요.”

아리안은 아덴이 일러 준 대로 대답했다. 신분 패에는 그가 소속된 신전이 적혀 있었다.

병사의 얼굴이 기이해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곁의 다른 병사에게 아리안의 신분 패를 넘겼다. 아리안은 불안해졌다. 그런 적이 여태까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병사가 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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