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9)화 (79/130)

#79

어두운 길을 말과 기수들이 조용히 지나갔다.

얼마나 왔을까. 선두에서 세 번째에 있던 아덴이 말 위에서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낮게 휘파람 불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기수들이 일제히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무리의 기수들은 중간에 한 번 말을 갈아탄 것을 제외하면 쉬지 않고 달렸다. 중간에 누군가가 아리안이 흔들리는 말 위에서 자칫 혀를 깨물거나 탈수로 정신을 잃지 않도록 설탕물에 적신 천 뭉치를 입에 넣어 주었다. 아리안은 달착지근한 천을 빨면서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욱신거리고 허벅지는 다리 대신 나무토막이 달려 있는 것처럼 얼얼했다. 이전 대형 선박의 3등 칸에 타고 대서양을 건넌 적도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고된 여정은 아니었다.

남색 서광이 동녘의 산맥 줄기를 따라 흐릿하게 떠올랐다. 어둠에 잠긴 울퉁불퉁한 대지 끝, 두 산맥이 포개지는 사이에 우뚝 솟은 성벽이 보였다. 퀸트 관문이었다.

수백 년간 파살리아의 방어선 역할을 했던 난공불락의 요새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기수들이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췄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풀린 말들이 헐떡댔다. 아덴이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들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관문이 가까워졌다.

일행은 모두 멈추었다.

강철로 된 육중한 요새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수십 미터는 될 법한 높은 성벽 위에 화톳불이 점점이 이어졌다.

“신원을 밝히시오!”

성벽 위에서 누군가 외쳤다.

아덴이 말을 몰아 선두로 나섰다. 그의 곁으로 기사 한 명이 따라붙었다. 아덴이 기사에게 눈짓하자, 기사가 활을 들어 화살에 왕자의 인장을 매달아 쏘았다. 피윳, 화살이 성벽 위로 솟구쳤다.

그들은 잠시 기다렸다. 오 분 정도가 흘렀다.

쇠사슬 도르래가 끼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요새 문 곁의 사람 한 명, 말 한 필이 겨우 통과할 법한 작은 철문이 열렸다. 사슬 갑옷을 입은 노인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등에 활을 차고 있었고 곁에 비슷한 차림의 한 여자가 따르고 있었다.

“이왕자 전하.”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빨리 다시 뵙는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슬랭에 일이 있어 급하게 귀환하는 길이오. 이 자들은 내 기사고 모두 아슬랭의 요정족이오.”

“저자는?”

퀸트의 수문장이 손가락을 뻗어 두 명이 나누어 탄 말 한 필을 가리켰다. 아리안이 탄 말이었다. 아리안은 약간 늘어져 있었고 등 뒤의 기사는 끈으로 그의 몸을 자신의 몸에 단단히 동여매 고정한 채였다.

“병자요.”

아덴이 조용히 대답했다.

“요정의 병이오. 파살리아의 물이 맞지 않았던 모양인데, 흔한 풍토병이오. 아슬랭에서만 치유할 수 있소.”

“그래도 이리 급히….”

수문장이 부리부리한 눈을 일그러트렸다. 의심하는 눈길은 아니었고 그저 당혹스러운 듯했다.

“파살리아에 도착하신 것이 몇 시간이나 되셨다고요.”

“경이 걱정하는 것을 아오.”

수문장의 관심은 오로지 동맹이었다. 수문장은 국왕을 섬긴다기보다는 파살리아를 섬겼다. 그가 지키는 것은 파살리아 그 자체였다.

“동맹은 걱정할 것 없소. 이미 부왕과 형님 전하를 모두 뵈었소. 내가 가져온 물자는 파살리아에 남아 있고,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것보다는 아슬랭에 있는 편이 동맹에는 더 도움이 되겠지.”

아덴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는 서두르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수문장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십시오.”

“수고롭게 해 미안하오.”

“제 일입니다. 단지 신분 패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시오.”

아덴은 마치 이런 상황을 연습이라도 했다는 듯이 물 흐르듯 대답했다. 인원수에 맞춰 미리 준비해 둔 신분 패가 내밀어졌다. 수문장과 함께 선 여자가 그것을 확인했다.

“이상 없습니다. 모두 아슬랭 요정들입니다.”

“문을 열어 드리게.”

“예.”

그들은 짧게 말을 나눈 뒤 옆으로 비켜섰다. 작은 철문 안쪽에서 병사 몇 명이 나와 일행을 감시하듯 안내했다.

철문은 비좁고 높이가 낮아 모두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아덴조차 그랬다.

철문 안쪽은 어두운 복도였다. 석벽이 이어졌고 천장은 낮았다. 퀸트 관문은 두 겹의 높고 두꺼운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오백 명의 병사들이 주둔했다. 성벽은 에포나 산맥의 두 산줄기가 포개지는 좁은 틈을 막는 댐처럼 지어져 있었는데, 이 높고 견고한 두 겹의 성벽 위에 다시 두꺼운 석재 천장을 얹어 위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과거 그림자 마수와의 전쟁의 흔적이었다. 비록 이제는 본격적인 전쟁을 겪은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요새는 훌륭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말들이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모두 침묵했다. 말발굽 소리가 여기저기 메아리쳤다.

복도 끝은 바닥이 좁고 천장이 넓은 기이한 공터로 이어져 있었다. 천장 아래에는 수백 개의 석궁이 설치되어 있었다. 침입자는 절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리라.

공터를 빠져나가자 또다시 복도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성벽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아덴이 수문장을 돌아보았다. 수문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병자의 쾌유를 빕니다. 아슬랭 백작께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리하겠네. 시간이 촉박하여 길게 인사하지 못함을 이해하게.”

“물론입니다.”

일행은 다시 말 위에 올라탔다.

그들의 뒤에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덴은 한 번 뒤를 돌아 굳건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읽기 어려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리안은 그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안 있어 그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제 올핀델까지 쉬지 않고 간다.”

짤막한 명령에 기다리던 기수들이 대답 대신 말고삐를 느슨하게 풀었다. 말발굽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퀸트 관문이 그들의 등 뒤로 멀어졌다.

***

올핀델은 작은 도시였다. 인구는 적었고 성벽은 낮았다. 토지는 농지로 쓰기에는 척박했고 어업을 하기에는 가물었으며 숲은 빈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았다. 이곳은 왕국이 동서로 갈라지는 갈림길이었다.

올핀델 사람들은 주로 여행객이나 상단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 수십 가닥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올핀델에 모였으나 가장 큰 것은 북서쪽 올굽으로 가는 가도였다. 아슬랭으로 가는 동쪽 통행로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리안은 여기서 아덴과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아덴의 목적지는 아슬랭이었고 아리안은 정반대였다.

아리안이 그 결심을 전달했을 때 아덴은 담담했다. 그는 잠시 아리안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도르센 대공에게로 가는 겁니까?”

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또 입을 다물었다. 이 혼혈 왕자의 표정은 읽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얼마간이 지나서 그가 다시 물었다.

“그가 새로운 왕입니까? 당신들이 이번에 택한 건 그입니까?”

“아….”

아리안은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떤 시대에서건 ‘높은 자들’은 필멸의 세상에 관여했다. 왕을 고르고 예언을 내리고 편을 갈라 전쟁을 했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언제나 그래 왔다.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대공은 그런 게 아니야. 어차피 내가 편드는 쪽은 항상 졌어. 포에니 때도, 또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그건 당신이 항상 약한 편에 섰기 때문일 겁니다.”

그 후에 아덴은 약간 웃었다. 그건 완전한 미소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모호했으나 충분히 의미는 전달되었다.

아리안은 그를 바라보면서 과거의 무수한 전쟁들, 그가 편들었거나 또는 편들지 않았던 그 전쟁들을 떠올렸다.

아덴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필요한 건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도르센까지는 험난한 여정입니다. 전시이니 더 그럴 테고요… 호위를 붙여 주겠다 해도 당신은 거절하겠지요?”

그 말대로였다.

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슬랭으로 갑니다. 그러니 아마 이게 마지막이겠군요.”

아덴이 침착하게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언제나 아리안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아리안은 그에게 국왕과 재앙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건 아덴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 재앙은 아리안과 같은 사람들의 책임이고 의무였다.

“국왕은… 예전의 그가 아니야. 조심해. 파살리아에는 가급적. 휴우. 안 가는 게 좋을 거야.”

“예언입니까?”

“아니.”

예지와 투시의 힘, 통찰력이라고도 부르는 그 힘은 이제 아리안에게서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점점 더 사라져 언젠가는 영영 없어지겠지. 그러니 그 전에 마지막으로 이 하나만은 괜찮을 것이다.

“언젠가 너는 우리 중의 하나가 될 거야.”

아리안은 조용히 속삭였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아마 없겠지.”

그리고 그는 아덴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예언이 맞아.”

아덴은 말이 없었다.

작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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