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티아 (78)화 (78/130)

#78

“믿기 힘들겠지만 저는 여기 들어오기 위해 많은 걸 걸었습니다. 아슬랭에서의 제 지위, 어머니의 신뢰….”

그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일그러졌다.

“제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슬랭 소백작은 제 이부형제였습니다. 삼 년 전, 그가 파살리아에서 살해당했을 때, 시신을 수습해 준 것이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리안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건….”

“압니다. 그건 어차피 제 형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수정 호수 건너편에서 온….”

아덴이 말꼬리를 흐렸다.

“…당신처럼.”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리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은 복잡했으나 눈앞은 하얗게 깨끗했다.

아덴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자가 그랬죠, 여기에는 누군가를 찾으러 왔다고.”

아리안은 아덴이 말하는 ‘그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지크였다.

“일종의 거래였습니다. 그가 제 이부형제의 목숨을 연장해 주는 대신, 저는 돕겠다고 했죠. 삼 년 전 파살리아에 왔던 건 그런 이유였습니다.”

불과 며칠,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했습니다. 제게도, 그에게도. 모두에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한숨 같았다.

“그리고 그 재판이 벌어졌을 때, 저는 그자가 찾으려던 게 누구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탄식과 자조가 섞였던 목소리는 다시 원래의 무미건조한 톤을 되찾았다.

아덴이 아리안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국왕이 신관을 총애한다는 소문을 들은 건 얼마 전입니다. 당신이 아직 여기 남아 있다는 건 그자가 결국 실패했다는 거겠죠. 그러니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걸….”

아리안은 간신히 입을 뗐다.

“내가 당신 형제의 시신을 수습해서, 지크가 당신 형제에게 며칠의 삶을 더 줬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도 상관없습니다.”

아덴이 시선을 옆으로 떨어트렸다.

“권력이나 명예, 부귀. 그런 걸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이미 많습니다. 그러니 저 하나쯤은 이런 이유로 움직여도 되겠죠.”

그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 순간 아리안의 깊은 밑바닥에 남아 있던 권능의 마지막 조각이 움직였다. 아리안은 아덴을 바라보았다. 한순간의 통찰력이 이 혼혈 왕자를 꿰뚫었다. 그리고 아리안은 어째서 지크가 자신의 화신(化身)으로 아슬랭 소백작이라는 인물을 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였다. 이곳에서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꽃피우지 못했던 문명의 시대를 열고 야만의 시대를 저물게 할, 언젠가 아리안과 같은 자들 곁에 앉게 될 이 차원의 영웅.

아덴이 조용히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아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당장 움직입시다.”

“다, 당장?”

“예.”

그가 몸을 돌려 반대편을 향해 박수를 한 번 쳤다. 짝, 하는 소리가 울리자마자 문이 열리고 밖에서 기사 두 명이 들어왔다. 조금 전 아리안을 이 방으로 안내했던 두 기사였다.

“오늘 밤에는 만찬이 있었고 저도 오늘 도착했죠. 지금 빠져나가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 못 할 겁니다.”

아리안이 얼이 빠진 사이에 아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질 테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그가 두 기사를 향해 무언가를 작은 소리로 명령했다. 넋이 나가 있던 아리안이 핫 하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퀸트 관문은 어떡하고? 당신과 내가 없어진 걸 알면 곧바로 봉화가 뜰 거야. 그러면 퀸트 관문은 닫힐 거고.”

어느샌가 아리안은 예전처럼 반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아덴도, 그의 두 기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밤 내로 퀸트 관문을 통과할 겁니다. 그들이 이 방이 빈 걸 알아차렸을 땐 우린 이미 관문을 빠져나간 뒤겠죠.”

그렇게 말한 뒤 그가 아리안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길이 험할 겁니다.”

“…괜찮아.”

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심할 시간은 없었다. 모든 것은 폭풍 같이 진행되었다.

이윽고 방으로 커다란 궤짝을 든 일꾼 둘이 들어왔다. 궤짝 안에는 황금과 값진 기름, 향료, 비단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당신은 돌아가십시오. 당신이 여기 온 걸 국왕이 이미 알고 있으니 돌아가는 모습도 보여 줘야겠죠.”

“그럼….”

“곧 이들이 당신에게로 찾아갈 겁니다. 이건 당신에게 바치는 뇌물이고요.”

“뇌물이라고?”

아리안은 열린 궤짝 안에서 흘러나오는 번쩍거리는 황금의 반사광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네. 당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신관이니 제가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당신은 뇌물을 받는 성격은 아니겠죠. 이걸 돌려보내십시오. 물론 돌아올 때 이 궤짝에 든 건 황금이 아니라 당신이고요.”

“그렇게 쉬울까?”

“오늘 밤이라면, 네. 그렇습니다.”

아덴이 단언했다.

하기야 그의 말이 맞았다. 아덴은 파살리아에 도착한 지 몇 시간 채 지나지도 않았다. 그가 싣고 온 수레의 짐들이 아직 미처 다 파살리아의 창고로 옮겨지지도 못했고. 만찬이 끝난 것도 얼마 전이었고 모두가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정말 가능할까? 정말 파살리아를… 3년간 빠져나가지 못했던 파살리아에서 이렇게….

그러나 아리안이 상념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가십시오.”

아덴이 그를 말로 밀었다.

아리안은 엉겁결에 그의 내실을 나오고 말았다.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그는 자꾸만 뒤를 흘끔거렸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방으로 돌아오자 몸종이 그의 옷을 벗는 것을 도왔다. 그 몸종은 요한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아리안은 언제든 요한이 그 눈을 통해 자신을 지켜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관님. 이왕자 전하께서 보내신 물건이 도착했는데요….”

다른 몸종이 어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 왔다. 아리안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에 최대한 평온하게 대답했다.

“들여보내세요.”

***

아리안은 궤짝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위에는 값비싼 비단이 얹혀 있었고 다시 그 위에는 황금 물병, 향료 단지 따위가 또 올라가 있었다. 궤짝은 흔들렸고 그의 위에 얹힌 물건들은 무거웠다. 게다가 세 발 단지의 한쪽 발끝이 그의 견갑골을 아프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안은 그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함 속에서 같은 것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정말로?’

그 의문만이 끝없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흔들리던 궤짝이 멈췄다. 누군가 위에서 뚜껑을 열었다. 아리안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몸을 들어 올렸다. 설령 눈앞에 요한이 양팔을 벌리고 서서 ‘짜잔! 재밌었지?’ 따위의 말을 지껄이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각오하면서.

다행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요한이 아니었다. 아덴이 서 있었다.

“어서 옷을 갈아입으십시오.”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안에게 옷가지를 건넸다. 그것은 튼튼한 바지와 셔츠, 짧은 튜닉에 가죽 허리띠였다. 모든 것은 간소했고 눈에 띄지 않았다. 두건이 달린 로브와 가죽 부츠도 같이 있었다.

아리안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신발 끈을 묶는데 아덴이 그에게 말했다.

“말을 탈 것입니다. 승마는 어느 정도 하시죠?”

“약간은….”

아리안은 자신 없이 대꾸했다.

글쎄. 그가 마지막으로 말을 탄 것은 하이드파크에서였다. 물론 앞에는 말을 끌어 주는 하인이 있었다. 그보다 더 이전에는 말을 잘 타던 시절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장성을 따라 며칠 내내 말을 달린 적도 있었지만 모두 옛일이다.

아리안의 자신 없는 대답에 아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 기사 중 한 명이 당신과 함께 말을 탈 것입니다. 그녀도 당신도 그렇게 무겁지 않으니 속도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여분의 말을 끌고 갈 것이니 중간에 말을 갈아타면 됩니다.”

그는 정말로 모든 것을 예상해 준비해 놓은 듯이 침착했다. 아리안은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덴이 앞장섰다. 그들은 하인들이 쓰는 복도를 통해 이동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밖에 말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가 빠짐없이 준마였다.

날씬한 체구의 기사가 아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가죽 갑옷을 입지 않고 아주 가벼운 옷만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아리안을 먼저 말 위에 밀어 태우고 자기도 올라탔다.

아덴이 말에 올랐다. 그들은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성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 곁의 쪽문은 열려 있었다. 야경꾼 한 명이 그들을 보더니 잽싸게 비켜서서 문을 더 활짝 열었다. 기사 한 명이 허리를 굽혀 그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야경꾼이 그것을 번개같이 품 안에 숨겼다. 아리안은 그를 힐끔댔다. 아는 얼굴이었다…. 숨을 죽였다. 말들이 하나씩 쪽문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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